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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와 방언
icon 허참
icon 2014-09-01 04:08:28  |  icon 조회: 6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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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지않은 소식

바울이 이차여행에서 돌아와 에베소에 있을 때, 그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크리스챤 행동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그들 가운데 논쟁이 있다는 나쁜 소식입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부도덕한 이교도로 보일 만큼 나쁜 예를 남겼습니다.

고린도 크리스챤들은 바울에게 방언을 포함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자주 방언을 했고, 이러한 영적 은사에 대해 그에게 물었습니다.그들의 편지는 바울에게 그들이 필요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의 논쟁이 크리스챤이라는 일치(unity)를 파괴하기 때문에,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다"(고전 1:11).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고전 11:18).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17절).

그들의 논쟁에서,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입니다(고전 1:12). 고린도 크리스챤들의 행동은 잘못이고, 바울은 그들을 바르게 고쳐야만 되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바울의 편지

고전 1-4 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분열의 문제를 볼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불신자처럼 행동했습니다(고린도 전서 3:3).

바울은 교회 내에서의 성적 부도덕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소송에 대하여 그들이 어떻게 할 것을 말했습니다(고전 5:1-13; 6:12-20). 이러한 주제는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강한 어조로 엄중히 대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쓴 말에 대하여는..."(고전 7:1). 첫째, 그는 제 7장에서 결혼에 대한 화제를 다루었습니다.

제 8장은 그들의 다음 주제를 언급하며 시작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1 절).

바울이 그의 편지를 쓰는 방식에서, 우리는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지식"을 자랑스럽게 여겼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지식, 그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조차, 자신의 영적 성장에 유해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교회에서 논쟁과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더 귀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더 나은 지표라고 적었습니다.

제 9장은 사도 바울의 권위를 설명하고, 제 10장은 우상 제물의 음식에 대한 주제로 계속됩니다. 제 1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예배 모임에 있는 몇 가지 문제를 논평하였습니다.

다양한 은사

12장에서, 바울은 방언에 대한 의견을 포함하는 새로운 장을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1절). 그들에게는 자신의 영적 은사를 잘 사용하는데 도움이 되는 적절한 교육이 필요했다.

바울은 비록 같은 성령으로 영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종류의 은사가 있음을 알립니다(4절). 크리스챤들이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모두의 유익을 위해" 이런 특별한 능력을 주신다(7절). 바울은 여러가지 은사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10절).

이 방언은 무엇입니까? 이는 오순절 날에 나타난 표적의 방언 같은 외국어입니까(행 2:1-11)? 또는 이 방언의 은사는 다른 종류의 소리로 나타나는가? 이 초자연적인 은사가 그 소리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사실로(고전 12:10 ; 14:13), 그 방언이 인간의 언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방언이 고린도 교회의 방언과 같은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바울은 로마의 크리스챤들에게 그의 편지에서 유사한 영적 은사를 나열하지만, 그 목록은 방언이나 통역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정기적으로 사용한 유일한 교회라고 보인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같은 영적 은사나 능력을 가진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각인에게 은사를 주시지만 , 어떤 이에게는 권능을 ,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은사를, 또 다른 이에게는 다른 능력을,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처럼, 주신다(고전 12:8-11). 이런 방법으로 은사를 나누어서, 하나님은 크리스챤들이 행하도록, 그리고 서로 도울 수 있도록 격려한다.

인간의 몸의 비유는 이 방법을 보여 줍니다. 발, 손, 눈, 그리고 각각의 지체들은 다른 기는을 제공합니다. 전체 몸에 기여함으로써, 각종 지체는 서로를 도와줍니다(12-27). 하나님은 여러가지 영적 기능을 가진 사람을 임명합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다(28).

바울은 "모두가 사도인가?"란 질문을 합니다. 물론 아닙니다. 모든 크리스챤이 선지자나 교사나 능력이요, 치료자,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29-30).

바울이 그의 주장을 제시하는 방법에서, 어떤 고린도인들은 방언에 있어서는 모든 크리스챤들이 같은 은사를 가져야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들의 영성을 의심했습니다. 그런 일은 그리스도교를 판단하는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하였다. 이런 영적 은사 중에 하나도 성령의 유일한 시험으로 판단될 수 없다.

최고의 영성

사도 바울은 아마도 고린도인들이 그들의 편지에 언급한 것에 동의 하면서, 그들이 더 좋은 영적인 은사들을 가지기를 원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 하였다(31절).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이기를, 그리고 영적으로 보이기를 간절히 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3장에서, 바울은 영성의 가장 좋은 증거로 사랑을 기술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기적의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1-3절).

바울은 "사람과 천사의 방언"에 대하여 말하였다(1절). "사람의 방언"은 인간의 언어를 뜻한다. 그러나 "천사의 방언"은 무엇인가? 성경에는 천사가 사람들에게 말하는 신비적인 언어가 없다. 그들이 사람에게 말할 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천사의 언어를 언급하였을까? 아마도 고린도에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그 소리를 천사의 언어라고 주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면 바울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방언을 말하기 위한 용어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영적인 영역에서 어떤 경우에는 다른 단어가 있다. 하여튼 바울은 사랑이 없는 방언은 아무리 영적으로 조여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삶에 대한 하나님의 방식은 사랑에 근거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필요가 없거나 실패하지 않는다(7-8절). 그러나 영적인 은사는 점차적으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인들이 자랑하는 지식도 사라질 것이다(8절). 바울이 칭찬하였던 예언의 은사도 그칠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9-12절).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활할 때, 그리고 완전하여질 때, 특별한 영적인 지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두가 완전히 알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신령한 메세지와 예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방언은 그와 같이 그칠 것이다. 어떤 영적인 은사들은 일시적으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랑과 같이 영원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방언과 예언

은사들은 귀중하다. 그래서 우리는 은사를 가지기를 원한다(고전 12:31). 그러나 어떤 은사를 가지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사랑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다른 사람을 도우는 은사를 갈망하여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권장합니다(1절). 그는 미래에 대하여 예측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단어의 그릭어는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 발언..., 영감된 메세지를 전하는 능력과 재능"을 뜻한다. 예언은 신령한 영감으로 말하는 것으로 미래의 사건에 관한 예측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예언의 은사는 "영감의 설교"이다. 또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선포하는 은사"이다. 바울은 예언을 말하는 것이 방언을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5절). 영감의 설교는 이해할 수 있지만, 방언은 통역이 없다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알아 듣는 자가 없고...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2,3절). 영감의 설교는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의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고, 권면을 하는 것이다(4,31절).- 그리스도인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우는 것이다.

바울이 방언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예언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였다(5절).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9절). "이와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9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14절). 마음에 결실이 없다면, 그것은 그 말하는 자가 그 소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초자연적인 도움이 없으면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13절).

바울은 이것을 악기에 대한 비유로 설명합니다(7절).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곡조를 식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이 소리의 구별이 없으면, 메세지를 이해할 수 없다. 고린도인들이 방언을 하는 것은 마치 단어를 서로 구별할 수 없어서 그 메세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고린도인들이 고린도에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를 말하였을까? 아니면 그 소리가 단순히 인간의 언어가 아닌 것인가?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의견은 두 가지 가능성을 포함합니다.- 뜻이 없는 소리들, 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외국어. 어느 경우든, 그 결과는 같다. 고린도의 방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말하는 자에게 가치가 있을 수 있지만, 회중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방언과 통역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그의 서신의 일부를 사용했다. 방언을 하는 것이 그들의 정규적인 관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방언이 문제가 되었다.- 고린도인들이 바울에게 조언을 물어야 할 충분한 문제가 있었다.

고린도의 특정 상황으로, 바울은 방언을 하는 자들에게 통역의 은사를 구하라고 충고했다(13절). 그것은 그 소리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배울 수 있도록 번역을 통하여 하라고 했다(5절).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28절). 이것은 방언하는 자가 자신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잠잠하여야 한다. 그들은 순서에 따라 말해야 한다. 그들은 예배를 방해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도움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33절)고 설명했다. 영적 은사를 사용할 때, 혼란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 혼란하면,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사역하시지 않는다.

바울은 예배에서"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질서대로 하라"고 장조했다. 고린도인들의 모임은 질서가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말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 하겠느냐"(23절).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영감을 주는 말씀과 가르침을 듣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24-25절).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그들의 예배모임의 구성을 개선하기 위한 간단한 규칙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ㅇ늬 은사와 재능에 따라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하였다. 기본적인 규칙은, 사랑의 방식에 따라,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절).

한 사람 씩 한번에 말하고, 어떤 모임에서도 단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방언을 말하도록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하라고 하였다(27절). 아무도 그 메세지를 설명할 수 없으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잠잠하라고 하였다(28절).

바울은 강력하게 고린도인들이 그들의 문제를 시정하도록 말하였다. 그러나 방언의 주제에 그는 부드러웠다. 그는 방언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분열을 야기하는 교정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39-40절).
2014-09-01 0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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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2014-09-01 22:02:30
허참 님! 수고가 대단히 많으십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36-37)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38-40)

알았습니다요! 알아요^^
"어부" 방언 말하기를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는 기회가 오기를 기도하지요.

너희에게 편지하는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그런즉 내 형제 허참 이시여!^^
예언하기 전에 방언 먼저 말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방언 말하기를 금하기를 모든 현대방언이 가짜니 모니, 이단이니 하는
진리님을 따라서 하는 헷소리를 금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요?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방언장이 고린도 서에서만 나타 납니까?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한국교단에서는 전무하기로 의아한 성령의 역사, 공중방언?
표적방언, 은사방언 조차 모르는 장로교회 교인들에게는
공중방언 나타날 기회가 전무 합니다요.

그 교회에서 나타 날 걱정일랑 전무한 일로
참으로 헛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