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와 제국주의
잔디와 제국주의
  • 황대권
  • 승인 2007.02.02 1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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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읍내에 나갈 때마다 국도 양편에 잔디밭이 하나 둘 늘어나더니 올해는 보이는 곳마다 잔디밭이다. 멀리서 언뜻 보면 무슨 골프장이 들어섰나 하고 착각할 지경이다. 대체작물을 찾다 찾다 잔디가 돈이 된다니까 너도나도 뛰어든 모양이다. 모르긴 몰라도 골프장 건설과 펜션 바람 분 것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하긴 가까이 있는 장성군에서 잔디로 떼돈 벌었다는 소문이 나돈 지도 꽤 오래되었다. 수입 농산물 등쌀에 주곡 생산 면적이 날로 줄어드는 이 현실을 어찌 바라보아야 할지 정말 난감하다. 이대로 나가다간 주곡은 모두 수입해서 먹고 겨우 부식류나 조경용 농작물만 재배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아무리 돈이 되는 대체작물이라지만 논에 심어 놓은 잔디를 보고 있으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사람들은 이 잔디가 제국주의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다채로움을 거부하는 잔디

영국인들이 세계에 퍼뜨린 것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잔디이다. 영국은 습기가 많고 겨울에도 온난하여 목초가 자라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영국에는 일찍이 목축과 양모 산업이 발달했다. 영국을 두루 돌아다녀보면 영국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초지가 많다. 17세기 무렵 영국 귀족들은 잡풀과 관목이 우거진 정원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한 가지 종류의 목초를 깔고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가꾼 정원을 즐기기 시작했다. 아직 풀 베는 기계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니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드는 귀족들의 호사 취미였다. 그들은 드넓은 잔디밭 위에서 파티를 열고 장난삼아 그 위에서 놀 수 있는 여러 놀이를 생각해냈다. 오늘날 세계에 퍼진 잔디 스포츠 대부분은 영국이 발상지이다. 가장 대표가 되는 것이 골프와 축구이다. 그 밖에 하키, 볼링, 테니스, 크리켓, 럭비 같은 스포츠도 그렇다. 이들 스포츠는 잔디 위에서 하게 되어 있으니 경기의 보급과 함께 잔디가 전 세계로 퍼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잔디의 제국주의 속성은 스포츠에서보다 조경용 잔디에서 더 잘 드러난다.

제국주의 가장 큰 특성은 폭력과 획일성으로 무장한 지배이다. 잔디밭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었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다양한 생물종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과정 자체가 엄청난 폭력이다. 잔디를 깐 뒤에도 다른 풀이나 꽃이 자리 잡지 못하게 끊임없이 뽑아내고 약을 치는 것도 폭력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휴식과 안정을 느끼는 잔디밭은 사실 폭력과 억압의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또한 드넓게 펼쳐진 잔디밭을 보고 일종의 지배 욕구를 대리 충족한다. 일망무제의 잔디밭 위에 우뚝 서 있으면 마치 자신이 황제라도 된 듯 우쭐한 기분이 든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를 해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바닥은 푹신푹신하지, 마음껏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보고 싶어진다. 잔디의 획일성은 사람의 심성마저 바꾸어 놓는다. 미국에서는 자기 집 잔디를 며칠 안 깎아 더부룩해지면 마을 미관을 해친다고 이웃집에서 신고가 들어오기도 한다. 잔디밭에 민들레와 같은 야생화가 여기저기 피어 있으면 그 집 주인의 영혼도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잔디밭에는 잔디 외에 어떤 것도 자라서는 안 된다. 1960년대 미국 히피 혁명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던 책 <일차원적 인간>을 쓴 허버트 마르쿠제는 혹시 광활한 미국의 잔디밭을 보고 힌트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잔디는 아름답지 않다

잔디가 제국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잔디의 물리적 특성 때문만이 아니다. 실제 역사에 있어서도 제국주의의 전파와 유지에 큰 역할을 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은 새로 개척하는 식민지마다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물 주위를 잔디로 장식했다. 식민지 주민들은 생전 처음 보는 조경 양식이었다. 권위적인 건축물과 함께 잔디 조경은 질서와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식민지가 해방되고 나서도 이러한 조경 양식은 그대로 이어져 거의 모든 관공서와 공식적인 건축물에는 잔디 조경이 필수가 되었다. 잔디의 물리적 특성이 정치적 의도와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잔디 조경을 가장 열광적으로 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세계에서 미국의 잔디 면적이 가장 넓다. 세계의 식량 창고라는 미국의 밀밭이나 옥수수밭도 잔디밭보다는 그 면적이 작다. 세계 최대의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최대의 잔디밭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폭력에 기반을 둔 제국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 듯 잔디밭을 가꾸는 데에도 많은 비용이 든다. 한결같은 잔디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배수 및 급수 시설이 필수이며 수시로 잔디를 깎아 주어야 한다. 미국의 한 도시는 대기 중에 배출된 이산화탄소의 5퍼센트가 잔디 깎는 기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정도이다. 거기에다 틈틈이 농약과 비료도 주어야 한다. 해마다 미국 전역의 잔디밭을 관리하기 위해 약 300억 달러의 돈이 나간다고 하니 도대체 잔디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잔디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잔디밭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도 엄격히 말하자면 자기암시에 의한 착시 현상이다. 잔디밭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귀족들의 취미였고 권력자들의 지배를 미화하기 위한 도구로 쓰였다. 따라서 잔디밭은 신분 상승을 꿈꾸는 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마치 60, 70년대 한국의 중산층들이 집집마다 피아노를 사들였던 것과 비슷하다. 그들은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음악의 가치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피아노를 단지 신분 상승을 겸한 부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잔디밭은 아름답기보다는 그저 보기에 시원할 뿐이다. 아름다움으로 친다면 잔디밭 이전 우거진 야생의 초원이 훨씬 아름답다.

나는 지금도 영국의 한 산속 외딴 집에서 본 버려진 정원의 그 아찔한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영국에 처음 가면 많은 사람들이 반듯하고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영국식 정원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 금방 싫증이 났다. 한번은 영국인 친구를 따라 웨일즈의 산속에 버려진 자기 집을 구경하러 갔다. 자기가 집을 떠난 지 6년이 지났다고 한다. 마당에 턱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고 감탄사가 나왔다. 오랫동안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영국식 정원이 황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풀과 화초들이 제멋대로 나고 죽기를 반복하면서 기가 막힌 균형을 이루었다. 나는 거기서 확실히 깨달았다.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한 정원사는 신의 손길이라는 사실을.

타국의 자율성과 자유를 짓밟고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제국주의가 땅 위에서 맨 먼저 드러낸 모습이 바로 잔디밭이다. 잔디밭은 지구상에 있는 생물종의 다양성을 줄어들게 할 뿐 아니라 농경지를 잠식하고 강과 대기를 오염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잔디밭은 그 쓰임새에 비해 너무 과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우선 땅을 덮고 있는 잔디 면적을 줄이고 그 쓰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할 때다.

황대권 / 전남 영광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태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저서 <야생초 편지>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등

(이 글은 월간 작은 것이 아름답다>(http://www.jaga.or.kr/)에 실린 글을 잡지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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