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의 설교가 지루하게 느껴지십니까
목사님의 설교가 지루하게 느껴지십니까
  • 성기문
  • 승인 2007.02.03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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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석하는 교회의 담임목사의 설교가 지루하고 주일 대예배에 대한 흥미를 잃는 일이 생긴다면, 십중팔구는 신앙의 열정이 사라진 ‘신자 탓’을 하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설교는 지루하고 지루해질 것이다. 그러나 소위 평신도로 오랜 세월을 설교를 듣고 신학대학원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고 이제는 설교를 종종하게 되는 입장에 놓이니, 앞서 이야기한 대로 누구 탓만 누구 핑계만 하면서 일방적으로 매도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신자를 탓하기 전에 설교가 지루할 때 먼저 생각해야 할 아홉 가지를 작성해보았다.

필자는 설교를 과학이자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예술적인 면만 너무 강조하다 보면 기계적 설비나 분위기 혹은 설교자 자신의 개인적인 즉흥성과 역량에 너무 몰두하는 쏠림 현상이 생길 수 있고, 또 과학적인 데만 몰두하다 보면 무미건조하고 지나치게 딱딱할 수 있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도 설교란 ‘하나님과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임재에 근거한 신자의 믿음과 행위와 관련된 쌍방향 의사소통에 다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설교자들이 갖는 일방전달 식의 태도와 청중들이 30분 정도의 설교 시간을 무조건 참고 견디는 믿음의 시련에 대한 통과의례 식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사실 최근에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장경동 목사의 장점(본인도 매번의 집회 때마다 이야기하는 것처럼)을 필자도 높이 사는 것도 그것과 관련된다. 준비된 메시지를 청중들이 열려진 마음으로 듣고 이해해야 설교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만큼 청중들의 준비된 혹은 열려진 자세와 태도가 설교의 성패를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 최근 들어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설교는 쌍방향 의사소통이며 삶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모름지기 다음과 같은 삼박자가 잘 갖추어져 할 것이다. 첫째로 제대로 된 성경 본문 이해가 있어야 하며, 둘째로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로 소화되어야 할 것이며, 셋째로 청중의 영적인 상태가 분별되어 적절한 위로와 적절한 책망이 있어야 할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렇게 행해진 설교가 설교자의 삶을 통해서 확인되고 청중들의 신앙의 변모와 제대로 된 행위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설교자들의 지루해지는 설교를 한번 세부적으로 분석해보자.

1) 설교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편향된 경우
한국교회의 설교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때는 탈(脫)세상적이거나 친(親)제국주의적 설교가 있었고, 이승만 정권 때부터 김영삼 정권 때까지는 사회·정치·경제적 불의를 가리거나 정권을 찬양하는 해바라기 설교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정권으로부터의 비호를 받고 대다수의 청중들을 바보로 만들기도 했지만, 소위 의식 있는 지성인들과 청년층을 교회가 잃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김대중 정권 들어서는 일부 지역적 혹은 계층적 기반을 둔 기독교인들이 맹목적 반(反)정권의 기치를 내세우며 정치적으로 편향된 설교를 쏟아내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친북·친사회주의도 마찬가지지만 친미·친시장경제적 자본주의 혹은 반공민족주의가 한국 기독교의 절대 가치인 것처럼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그 사상 검증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이러한 태도와 입장은 많은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특별히 지식인들과 청년들을 그리고 교회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내쫓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2) 설교가 지나치게 자기 과시나 자기중심적인 해석과 주장으로 가득 찬 경우
1)에 대해서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될 수는 있지만, 2)부터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부흥회나 특별집회의 경우에 녹화 실황이나 실제 참여해보거나 테이프를 들어보면 대부분 발견할 수 있는 문제인데, 성경 본문과 2-3시간의 말씀이 서로 무슨 관계인지 잘 몰라 어안이 벙벙하게 만드는 경우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도 그렇게 하는 설교자들이 아직도 있다. 사실 지금까지는 자기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기 과시형으로 하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것을 솔직하거나 ‘젊은 취향’의 설교자라고 착각하고 설교 시간을 사유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한국교회 강단의 가장 큰 문제가 주제 설교나 목적성 설교 혹은 즉흥 설교였다. 한참 이상한 곳으로 굽이굽이 돌아다니다가 좋고 은혜로운 내용으로 마쳐지면 그만이던 ‘아멘’이던 시대도 있었다. 오히려 설교 준비 안 하는 것이 미덕이던 시대의 일이다. 사실 설교의 필요 혹은 명령이 몇 분 전에 ‘오다’(order)가 떨어지던 적도 있었고, 갑자기 설교를 부탁하는 데에야 다른 수가 있나! 그럴 때는 복음적이고 좋은 레퍼토리 중에서 하나 꺼내 설교라도 해주면 그래도 중간은 가는데. 그럴 때도 자기중심적인 해석과 자기중심적인 과시의 설교를 할 때면 설교자가 미워진다. 이럴 때 채널이 돌아간다. 리모컨이 불을 뿜게 된다.

3) 일부 청중들의 눈치나 비위를 맞추려는 설교인 경우
자기중심적인 설교와는 반대로 청중들이 무서워 설교가 왜곡되는 경우도 많다. 요즘은 ‘월급’ 설교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라 더 그런 것 같다. 설교자가 교회 개척 멤버가 아닌 경우에는 맥을 못 춘다. 재정적인 기여가 큰 ‘말발이 센’ 신도나 신도 그룹(심지어는 처가 쪽)에 휘둘려 다닐 수밖에 없다. 큰 교회들의 경우에는 담임목사 주위에 인(人)의 장막(帳幕)이 있다고들 하지 않는가? 마치 오래 전 절대 권력의 황제가 탐관오리나 내시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경우와 유사하다고 할까? 강남에 있는 교회들이나 대형교회 혹은 지역적인 편향성이 강한 교회들의 경우에는 설교자들이 거의 유사한 정치적인 발언과 주장으로 설교를 얼룩지게 하는 이유도 그것에 있다고 하겠다.

물론 교회가 처한 현장성이 강조되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그분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많이 드는 것을 보면, 정치적인 회심보다는 정치적인 타협의 산물이 그러한 설교로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이런 교회들이 아니더라도 이런 저런 설교하면 누구누구 집사 장로 떠나지는 않을까 하는 노심초사에 담임목사뿐만 아니라 자격지심(自激之心)이나 자기검열(自己檢閱)에 빠지게 되는 부목사 (교육)전도사가 적지 않다고 말하면 너무 비관적일까.

4) 백과사전식 설교의 경우
어떤 성경 본문을 가지고도 항상 똑같은 결론이 나오는 설교를 말한다. 또한 주제 설교의 경우에 이 주제에 맞는 다양한 성경 구절을 여러 가지로 나열하는 설교를 말한다. 본문은 본문 나름대로 사회적·문화적·역사적, 그리고 문맥적인 측면에서 고유함과 독특성이 내포되어 있다. 항상 같은 내용과 결론을 내리려고 노력하라고 본문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5) 설교가 내용 나열은 되는데, 실제적인 적용이나 도전이 적은 경우
신학 중에서 현장성이 결여된 신학을 ‘안락의자’(armchair) 신학이라고 부른다. 설교 중에도 지적 유희나 자기만족적인, 그리고 심지어는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설교인데, 실제적인 적용이나 현장성이 우러나지 못하는 설교가 있다. 현실 감각이 부족한 설교를 말한다. 실제적인 적용이나 도전이 적은 설교를 말한다. 어떻게 살라든지 이러저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이렇게 위로하시거나 이렇게 책망하신다가 아니다. 혹은 위로나 책망이 있지만, 현 상황과 동떨어진 이야기다.

예를 들어서 신도들은 가난하게 사는데 설교자는 돈타령이나 하고 ‘남의 나라 이상적인 말’만 하는 경우다. 혹은 교회 내에서 편당과 편파를 만들어서 그들을 위한 메시지만 전하는 경우다. 설교자를 위한 사람들과 설교자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골을 더 깊게 만들어주는 부류다. 심방을 너무 골라서 다니는지, 아니면 부목사들만 심방을 시켜서 그런지 교회 교인들의 돌아가는 속내를 제대로 파악치 못하는 부류다.

6) 설교가 항상 울부짖거나 소리 지르는 스타일인 경우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서 우리는 설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필자는 설교단의 뒤 배경에 웬 수풀이 우거졌는지, 강단(講壇)이 크리스털인가 아닌가에 별 관심은 없지만, 설교자의 쉰 목소리나 항상 높은 톤 혹은 울부짖는 스타일은 듣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자신들은 나름대로 장점이라고 장담하겠지만, 듣기에 좋지 않은 목소리나 습관을 갖고 있다. 설교가 커뮤니케이션이라면 말이다. 영어도 못하면서 영어를 자주 쓰거나 수동태나 비문법적인 표현을 많이 쓰는 설교자들도 설교를 지루하게 만든다.

7) 설교의 톤이 너무 낮거나 변화가 없는 경우
설교가 지루한 요인도 여기에 속한다. 심지어 카리스마적 설교에 지친 한 사람은 조용히 말씀만 전하는 사람이 더 좋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이 경우도 좋은 설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청중을 집중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설교가 차분하고 조용한 것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쉽게 명료한 것이 좋지 너무 낮고 변화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는 좋지 않다.

8) 설교가 별 내용이 없이 지나치게 긴 경우
설교가 횡설수설하면서도 30분을 넘는 설교도 있다. 이런 경우는 카리스마적 교회 혹은 지나치게 열광적인 교회들이 그렇다. 이들은 마치 설교자가 주문을 걸고 자신들은 쉽게 자기최면에 걸려들기 위해서 교회에 온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설교는 예배 중간에 위치해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9) 설교가 매주 매년 그 내용이나 주제가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경우
사실 성경은 항상 그대로고 해야 될 설교는 많고 해야 할 주제와 내용은 그저 그렇고, 쩍하면 입맛이고 한데, 해 아래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 자위하는 분들도 있다. 아니 체념하기까지 한다. 출근카드 찍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일부 열성 신자들은 기침 소리 농담 소리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도 “아멘, 할렐루야”로 장단을 맞추게 된다.

결론
독자들이 다니는 혹은 다니던 교회의 설교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 나올까? 앞서 언급한 열 가지 문제점들은 다소 과장된 면은 없지 않지만, 모두 실제적인 경험과 증언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설교는 설교자의 일방적인 메시지와 수십 분 동안 부동자세로 들어야 하는 청중들의 대결장(對決場)이 아니다.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이 설교와 삶 속에서 만들고 세워가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것이다.

특정한 설교자가 지나치게 주목을 받는다든지 그의 설교를 듣지 않으면 예배가 개운치 않다거나 예배드린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런 사람들이 몇 시간 차를 몰아서 특정한 교회로 가거나 특정한 설교자가 강단에 서지 않으면 교회 참석을 꺼리게 되는 사람들이다. 필자가 볼 때 이런 사람들은 이미 중증(重症)이다. 심각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자 중독 혹은 특정 설교 패턴에 물든 것이지 청중의 바른 자세는 아니다. 

설교자가 본문에 대한 진지함과 열정과 깊은 탐구가 없다면 그 설교를 듣는 청중에게 그러한 것들을 요구할 혹은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청중은 설교자를 닮아가며 그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슬픈 현실을 수용하고 탈피할 자세를 갖추는 것이 21세기의 설교자의 본분이 아닐까 한다.

성기문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말씀발전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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