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를 텃밭으로
잔디를 텃밭으로
  • 김종희
  • 승인 2007.02.14 04: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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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살 집을 마련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집 앞 잔디밭에 쌓인 낙엽을 긁어내는 일이었다. 도대체 몇 년 동안이나 낙엽을 치우지 않았는지, 옆집의 깔끔한 잔디밭과 비교되는 것은 물론이고 덕지덕지 눌어붙은 낙엽들이 여간해선 긁어지지 않았다. 몇 시간 애를 쓴 다음에야 그나마 일한 티가 겨우 났다. 12월말 추운 겨울인데도 집집마다 잘 다듬어진 잔디밭을 보면서, “미국 잔디는 참 튼튼하기도 하구나” 생각했다. 그러는 동시에 황대권 님이 쓴 ‘잔디와 제국주의’라는 글이 갑자기 떠올랐다.

미국에서 아파트에 살지 않는 담에야 대개 집집마다 크든 작든 잔디밭이 있게 마련이다. 한국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이곳에 사는 한국 할머니들이 집 앞이나 뒷마당에 펼쳐진 잔디밭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실까. 침을 꼴깍 삼키지 않을까. 잔디밭을 모조리 갈아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뚝 솟아오르지 않을까. 한국 할머니들이 폭력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잔디를 갈아엎어서 텃밭을 만든 다음, 상추도 심고 오이도 심고 고추도 심었다가, 결실을 거두어서 옆집, 뒷집, 건넛집 이웃들에게 조금씩 나눠주면, 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미국 처음 온 촌놈이 개코쥐코 객쩍은 소리 늘어놓는다고 타박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래도 한국 사람이 괜히 한국 사람인가.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산다”는 남다른 근성으로 고달픈 이민 생활도 너끈히 견뎌내며 당당히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 집 앞에 있는 잔디밭 다 갈아서 텃밭 만듭시다. 나중에 옆집에 사는 백인 할머니한테 나눠주면 아주 좋아할 걸요?” 하고 집을 장만해준 분에게 얘기했더니, “우선 집세나 꼬박꼬박 내고 나서 나중에 얘기해봅시다” 한다. ‘깨갱.’

하긴 잔디밭이야 돈 주고 사람 써서 다듬으면 된다 치더라도 텃밭이야 어디 그런가. 주인의 정성을 다해서 보살피지 않으면 밭은 주인에게 그 귀한 결실을 선물로 주지 않는다. 다른 일에도 게으른 주제에 텃밭 얘기를 공연히 꺼내서 공염불만 한 셈이다. 그래도 영어 되면 언젠가는 물어나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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