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아메리칸 드림 속에서 만난 하나님
깨어진 아메리칸 드림 속에서 만난 하나님
  • 홍성종
  • 승인 2007.02.14 22: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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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죄로 종신형에 처한 지명선 씨와 그를 돕는 사랑의 손길들

   
 
  지명선 씨가 수감되어 있는 감옥으로 가는 고속도로. 처음 이 길은 절망과 어둠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난 지금 그는 새로운 희망과 생명의 길을 찾아나가고 있다. (홍성종)  
 
 “열세 살 즈음이었던가. 그날도 어김없이 아버지는 술에 취해 들어와 고함을 치며 닥치는 대로 살림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피해 달아난 어머니와 우리 남매들은 어두운 골목길에 쪼그리고 앉아 무서워 떨며 밤을 지새웠다. 그날, 추적추적 내리던 빗물에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끝이 안 보이는 두려움과 가난의 굴레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광활한 미 대륙에서 플로리다 주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 모양이 프라이팬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90도 돌려놓은 것과 흡사하다. 이 때문에 특별히 손잡이 모양인 플로리다 주의 북서부 지역을 가리켜 ‘팬핸들(Panhandle)’이라 부른다. 이 팬핸들 지역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연방고속도로 I-10 언저리에 자리 잡은 남부의 작은 도시 스니즈(Sneads, 인구 1,996명, 면적 4.5평방 마일). 플로리다 주도인 탈라하시(Tallahassee)로부터 40마일 서쪽에 위치한 이곳 스니즈의 주정부 관할 교도소(Apalachee Correctional Institution, East Unit)에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지명선(42) 씨가 현재 8년째 복역 중이다. 엄밀히 말하면 종신형+26년 반. 죽어서도 못다 치를 형량이다. 그의 국적은 여전히 대한민국.

무지개 빛 꿈을 안고 미국 땅을 밟은 지 5개월 만에 그는 살인죄로 종신형의 죄수가 되어 지금껏 세상과 단절되어 지내고 있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셋. 그때까지 그의 삶은 암울한 회색빛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목수인 아버지는 공사판을 전전하며 삶의 고단함을 날마다 술로 달래었다. 연신 풍겨내는 술 내음과 포악한 술주정에 가정은 평안한 날이 없었다. 공사판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터를 찾느라 서너 달이 멀다 하고 옮겨 다녀야만 했다. 초등학교 땐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할 정도였다. 그나마 초등학교라도 어찌어찌 졸업했다. 그것이 학력의 전부이다.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은 얽히고설킨 2남 3녀의 가족 관계와 가난이 전부였다. 그런 아버지마저 1988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을 억압한 아버지의 그림자가 걷히자 이번엔 절망이 뻗쳐왔다. 죽어서도 아버지는 그의 삶을 짓누른 셈이다. 장남으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중압감, 불쌍한 어머니의 삶을 어떻게든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했다. 공사판 일은 물론이고, 용접, 자동차 정비. 나이 서른이 되도록 집과 일터 이외에는 한눈을 팔 겨를이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길이 없는 가난의 굴레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더는 삶의 의미를 찾기가 힘들었다. 꿈에라도 못 잊을 불쌍한 어머니도 그의 자살 충동을 막지는 못했다. 목숨을 끊으려 약을 먹기도 하고, 칼로 손목을 긋기도 했다. 보다 못한 주변의 사람들이 정신과 치료를 권했다. 한강성심병원에서 만난 의사는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그에게 몇 개의 알약을 쥐어주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육신의 고통까지 안게 된 그의 인생은 한없이 허물어져만 갔다.

그런 중에 미국에 살고 있는 둘째누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집에서 가내 봉제업을 하고 있는데, 일손이 필요하니 명선이가 와서 도우며, 미국에서 치료도 받고, 일해서 번 돈은 어머니에게 생활비로 보내 드리자는 제안이었다. 어린 나이에 일찍 집을 나가 어느 날 갑자기 미국 사람과 결혼했다고 나타난 누이가 못마땅했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1998년 3월에 편도 비행기 표를 끊어 꿈의 땅 미국 마이애미에 첫발을 디뎠다.

“처음에는 아주 좋았어요. 일감도 늘어나 재봉틀도 늘리고, 제가 손재주가 좀 있어 집안 여기저기 수리도 하고, 냉장고니 텔레비전이니 이것저것 고치기도 하고, 조카도 ‘삼촌, 삼촌’ 하면서 좋아했어요. 미국인 자형도 출퇴근하면서 일부러 제 방에 들러 인사하고, 누이가 질투할 만큼 가족들과 가까워졌어요. 이런 게 사는 재미인가 보다 생각했어요.”

그러나 행복은 봄바람처럼 잠깐 스쳐 지나갔다. 일감도 차츰 줄어들고, 누이의 약속도 엇나가기 시작했다. 한번은 그가 요도 결석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아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미국 병원은 의료보험 없으면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계신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결심했다. 이러한 처지를 눈치 챈 어머니도 누이에게 아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호소했다. 한국행 비행기 표 값은 어떻게 해서라도 꼭 갚겠다고 했다. 누이는 누이대로 명선이 믿고 벌여놓은 일이 얼마인데, 고스란히 남게 될 빚 걱정에 노발대발했다.

“한 번은 무작정 고속도로로 나왔어요. 경찰에게 붙잡히면, 영어도 못하고, 관광비자로 와서 떠도는 사람이니 추방하겠지 생각했어요. 그게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집 가까운 들판을 가로질러 호숫가 느티나무 아래서 그리움을 달랬어요. 유일한 낙이었죠.”

운명을 바꾼 사건 당일 아침

누이가 젖은 머리를 말리며 전화기를 들고 한국의 어머니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동생 문제를 둘러싸고 격해지더니 욕지거리가 오고가는 것이다. 순간 명선 씨는 머리카락이 곧추섰다. 애지중지하던 재봉틀이고 뭐고 닥치는 대로 부숴버릴 요량으로 마침 눈에 띈 연장통에서 장도리를 빼어 들었다. 그 순간, 원을 그리며 휘두른 연장에 어린 조카가 머리를 얻어맞은 것이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조카 곁에서 한참을 서서 현실과 꿈 사이를 헤맸다. 앰뷸런스에 실려간 조카는 불행하게도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열다섯 살의 소녀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달아난 명선 씨는 어머니 품 같던 느티나무 아래서 다음날 경찰에게 붙잡혔다. 끝 간 데 없이 추락한 지명선 씨 삶의 제1막은 그렇게 끝났다.

2007년 새해,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찾아와 뜻하지 않는 살인죄로 삶의 운명이 바뀐 지명선 씨를 면회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1200여 명이 함께 수용된 교도소의 경비는 삼엄했다. 짙은 체스넛 차림의 교도관들이 하나하나 면회객의 사진을 찍고, 몸수색은 물론, 한 사람당 세 명씩으로 면회를 제한했다. 100여 평의 면회 장소인 식당에는 주말을 맞아 약 30여 명의 면회객과 재소자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교도관의 삼엄한 경비 속에 제한된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식당 한쪽 벽면을 장식한 평화로운 시골 풍경의 벽화 앞에서 교도소에서 제공하는 즉석 사진을 찍기도 했고, 더러는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명선 씨는 단아한 키에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랫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서인지 눈빛에는 순진함이 묻어났다. 이야기 중간마다 교도관의 호출이 있을까봐 민감한 표정으로 자주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기도 했다. 수용 생활이 거듭할수록 눈물샘이 엷어진 탓인지, 이야기 도중 감정이 격한 대목에서는 가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감옥 생활이 어느새 8년 되었다.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지명선 씨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자신을 다듬어나가고 있다. (홍성종)  
 
다음은 지명선 씨와 나눈 대화 내용.

요즘 어떻게 지내는가?

잘 지내고 있다.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고생했는데, 많이 좋아졌다. 매일 다섯 시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주로 성경을 읽고, 어머니와 주변의 고마운 분들에게 편지를 쓰며 지내고 있다. 성경은 지금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데, 이미 수십 차례 완독했다. 편지는 한 달에 어림잡아 160통쯤 쓴다. 편지를 쓸 때마다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분들에게 필요한 성경 말씀을 찾아 편지에 쓴다. 편지가 유일하게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는 통로인 셈이다.

어머니께는 주로 어떤 내용의 편지를 쓰는가?

어머니가 칠순이 넘어 눈도 잘 안 보이고 다리도 불편하기 때문에 동생들이 방문할 때 모아둔 편지를 읽어준다. 날마다 한 통씩 쓴다. 혹시나 어머니가 혼자서도 읽을 수 있도록 큰 글씨체로 쓰기 때문에 내용은 많이 못 쓴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교회는 못 나가시지만, 어머니가 좋아하는 성경 한 구절을 외우는 날이 아들을 만나는 날이라고 희망을 주며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어떤 계기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는가?

본래 집안은 불교 쪽이다. 열성 신자는 아니지만 어머니 따라 초파일이면 절에 찾아가 촛불 켜놓고 빌기도 하고 그랬다. 처음 마이애미에서 수용되어 재판을 기다라고 있을 때 백도현 목사님 부부(당시 마이애미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가 주일마다 찾아왔다. 연세 많으신 목사님은 “명선아, 명선아, 기도해야 한다” 했다. 손바닥을 보이며 예수님이 여기에 못 박혀 십자가에서 죽었다느니 도통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귀찮아 그만 찾아오라 했다.

한번은 백 목사님이 소포를 보내왔다. 혹시 무료한 시간을 달래라는 소설책인가 싶어 보니 성경책이었다. 화가 치밀어 침상 너머로 던져버렸다. 시간이 지나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궁금해서 열어보니 요한복음 3장이 펼쳐져 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그럼 그렇지” 하고 곧바로 팽개쳤다. 그 당시 늘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다. 약을 먹으면 대개 몽롱하고 곧바로 잠이 온다. 근데 약을 먹은 후에도 잠이 오지 않아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일어나서 다시 눈에 띈 성경을 보니 또 요한복음 3장이었다. 그 이후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학력을 극복하고자 한국에 있을 때에도 틈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일 때문에 바쁠 때에도 일주일에 한 권 정도 읽으려 노력했다. 국어사전을 항상 끼고 다니면서 모르는 말이 나오면 찾아보았다. 책 읽기를 좋아한 습관이 있던 터라 일단 거부감이 없어진 후로 성경을 줄기차게 읽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마이애미 교도소에 있을 때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도 받았다.

성경을 수십 회나 읽었다니 놀랍다. 특별히 좋아하는 부분이 있는가?

빌립보서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성경을 많이 읽는다 해도 나 자신은 항상 부족하다. 양삼석 목사님(아가페장로교회, 플로리다 파나마시티)은 “너는 항상 빵점짜리 신앙인”이라고 핀잔한다. 양 목사님이 그렇게 질책해도 왠지 기분이 나쁘지 않다. 목사님이 빵점짜리라고 하실 때, 너무 그러지 마시라 한다. 그래도 한 20점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웃음). 교도소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요사이 좀 힘들다. 신앙 관련 책도 보고 싶고, 교도소 내 처우도 그렇고 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다. 다른 재소자들은 1년 단위로 옮기기도 하는데, 그동안 나는 아무 불평 없이 조용하게 지냈다.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교도소를 옮기는 문제와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적어 편지를 했더니 애틀랜타 영사관에서 즉각 연락이 왔다. 이 때문에 교도소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으로 이송하는 문제가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들었다.

정말 예상 못했던 일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추방 명령을 받아 잔여 형량을 한국에서 복역하는 것뿐인데, 종신형이니만큼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런데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젭 부시 주지사가 퇴임 전에 한국 이송에 서명해서 현재 후속 조치가 진행 중이다.

사실, 우발적인 살인과 오랫동안의 우울증 등이 참작이 되어 처음엔 15년 형 정도 기대했다. 그러나 누이 가족이 이에 반발하며 사형을 청원했고, 그 과정에서 종신형으로 바뀌었다. 그 당시에는 말도 안 통하고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도 할 수 없었다. 최근 들어서 항소할 수 있는 기한이 올해 8월로 다다라서 재심을 청구한 상태였다. 그런데, 한국 이송 문제가 새롭게 떠올라 항소 중에는 형량에 관해 다툼이 있기에 또다시 항소를 포기하는 서류를 제출했는데, 생각보다 결과가 빨리 나왔다. 이제 유일한 희망은 한국 이송이다.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한국으로 이송된다 해도 잔여 형량을 살아야 한다. 당장 변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연로하신 어머니를 뵐 수 있다는 것만으로 희망이다(잠시 눈시울을 붉히다). 이곳에서 모범수로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성실히 수용 생활을 하면 감형도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평생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과 어린 조카에 대한 참회의 마음으로 살도록 하겠다. 사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를 나온 학력으로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수용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해 기술 교육과 검정고시를 치러 사회 적응 준비를 할 계획이다.

자식을 잃은 누이의 가정 또한 고통이 크지 않겠는가? 속죄의 뜻을 전한 적이 있는가?

말로 표현해서 뭐하겠나?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분이 누이일 것이다. 현재 법원의 명령에 따라 누이에게 어떤 접촉도 금지되어 있는 실정이다. 편지도 못하게 되어 있다. 죄송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속죄의 뜻을 전하고, 실제로 변화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지금까지 주변의 많은 분이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안다.

양삼석 목사님은 정신적인 지주이다. 우울증으로 오랫동안 약을 복용해야만 했는데, 결정적으로 약을 끊는데 양 목사님의 도움이 컸다. 약을 끊는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약이 몸에 받지 않았다. 약을 먹어도 별 효과가 없는 것 같고, 어떨 땐 약을 먹으면 토하기도 했다. 재판 진행에 관한 모든 절차를 양 목사님이 관리하고 있다.

한국 이송 문제는 애틀랜타 총영사관의 이자형 영사님(현 이스라엘 영사)의 역할이 참으로 컸다. 영사님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 주셨다. 서류를 인계 받아 채진원 영사님이 일을 처리해 주고 있다.

때마다 면회와 편지로 용기를 주시는 부모님 같은 이승모, 손명례 장로님 내외, 형님 같은 이승환, 박경주 집사님 부부(탈라하시한인침례교회), 박경진 집사(LA 거주)도 많이 의지하는 분들이다. 물질적인 후원과 기도를 아끼지 않으신 신정인 목사님(마이애미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과 성도님들, 특히 초기 재판 이후로 통역과 재판 절차 등을 맡아 수고하시는 이중희 집사님께도 늘 감사를 드리고 있다.

재소자와 부랑아들을 위한 목회를 하신 존경하는 이영철 목사님도 고마운 분이다. 그 외에도 여러분이 편지로 사랑을 전해 주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도움을 주신 분들도 있다. (인터뷰 끝)

   
 
  감옥에서 지명선 씨가 그린 그림. 그 그림 속에 그의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다. (홍성종)  
 
한국 이송 문제, 어느 정도 진척되고 있나

플로리다 주지사 산하 법무담당실의 Susan L. Smith(국외 수용자 이송 담당, International Prisoner Transfer Coordinator)는 “현재 항소 취하 확인 서류를 비롯한 필요한 서류가 도착하는 대로 미 법무부와 한국 외부무로 보낼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이 같은 절차가 끝나면, 다시 플로리다 법무부(State of Attorney)로 이첩되어 피해자 측과 협의한 후 최종적으로 결정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플로리다 주정부 교정당국과 한국 법무부 측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주 애틀랜타 총영사관의 채진원 영사는 “현재 우리 정부 측 법무부에 모든 서류를 제출한 상태”라고 밝히고, “지명선 씨가 교도소 내에서 부당한 처우를 당하지 않도록 정식으로 접촉했으며, 교도소 측으로부터 지명선 씨가 이감을 원할 경우 해마다 7월에 있는 심사를 통해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명선 씨는 공교롭게도 한국 이송 문제가 대두하면서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최종적인 결정이 나오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난관이 있는데도, 한국 이송이라는 희망이 오히려 차분한 수용 생활을 방해하고, 자신을 조급하게 할 수 있다는 염려를 전했다.

현재 지명선 씨의 이복누이인 피해자 측은 한국 이송 문제 관한 일체의 언급을 회피하고 있으며, 지명선 씨 또한 법원의 접근 금지 명령(Injunction)에 따라 누이와는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지명선 씨의 재판 절차를 대행하고 있는 이중희 씨(마이애미중앙장로교회 집사)는 “피해자인 누이도 사고 이후에 남편이 사망하는 등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전하며, “이 문제는 매우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피해자 측 동정을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이송 문제가 확정되기까지는 피해자 측 동의를 물론이고, 아직도 많은 장애가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명선 씨의 한국 이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꿈에라도 그리는 어머니와의 감격적인 재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지명선 씨 스스로가 성실한 수용 생활을 유지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또한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처럼 지속적으로 ‘사랑의 바통’을 이어가는 손길들이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홍성종 / 플로리다 주재기자
<미주뉴스앤조이>는 지명선 씨 한국 이송을 위한 청원서 온라인 서명 작업을 벌이고자 합니다. 그가 비록 끔찍한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옥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참회하고 새로운 삶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도 계속 수감 생활을 하겠지만 모친 가까이에 있고자 하는 혈육의 정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처럼 한국에서도 많은 분들로부터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미주뉴스앤조이>는 서명 작업과 함께 앞으로 진행 상황을 지속적으로 보도할 것을 독자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지명선 씨 후원 문의 및 서명서 보내는 곳 : 탈라하시한인침례교회 남선교회(회장 김대성, 850-445-5315)

   지명선 씨 한국 이송을 위한 서명운동 참여하기 
(위의 서명지를 출력하셔서 주위에 계신 여러 분들과 함께 서명하신 다음, 서명지에 기재된 주소로 직접 보내주시든지 <미주뉴스앤조이>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작은 물방울이 커다란 바위를 뚫습니다. 믿음이 현실이 되는 것은 우리의 작은 걸음걸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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