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보다 더 귀한 것
사리보다 더 귀한 것
  • 양국주
  • 승인 2007.02.24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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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강도 향산군 보현사의 옛 절 안심사 터에 세워진 부도전. (양국주)  
 
묘향산의 명사찰 보현사는 서산과 사명대사의 유적으로 유명하다. 좀 더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북한에 있는 사찰마다 항일 의병을 이끌던 서산대사와 관련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만큼 서산대사의 활약이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한편으로는 반일 국민감정을 위해 서산대사의 이름도 적잖게 동원된 흔적도 없지 않다.

반면 남한 내의 사찰에는 원효대사와 관련이 유난히 많다. 원효가 평생 전국을 돌며 불사를 일으켰을 리 만무하건만, 원효 이름 두 자가 빠지면 절 축에도 끼지 못해서일까? 남한 내 수 만 개에 달하는 본사와 말사는 고사하고, 불상을 모신 암자까지도 원효의 이름은 세존 이상의 큰 권위를 가진다.

그리도 많은 사찰의 공통적인 유행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셨다는 것이다. 자장율사가 중국 종남산의 문수보살에게서 살아생전 부처님이 걸쳤다는 의발과 다비식에서 건져 올린 진신 사리 가운데 100과를 얻어 적멸보궁을 봉안함으로 우리나라에 사리 신앙의 기원이 되었다. 이후 세워지는 절간마다 외국에서 부처의 치아까지도 무제한적으로 수입하여 세존의 진신 사리 없는 절간은 절간 대접받기조차 어려운 형국이 되었다. 자장이 가져온 진신 사리가 100과이건만 한국 사찰에 봉안된 진신 사리를 위해서라면 열 명도 더 넘는 세존이 생존했어야 할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마저 나온다.

종교가 생명처럼 여겨야 할 최고의 가치와 경배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부처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존재에 관한 물음과 큰 깨달음으로 인류에게 값진 유산을 남겼다. 기독교와 다른 접근을 통해 영혼의 본령을 추구하는 일에 그 위대성이 있다. 불자들이 자신의 누더기 옷에 절하고 사리를 받드는 모습을 부처가 본다면 무어라 말할까?

만해의 제자로 해인사와 다솔사의 주지를 지낸 효당은 "죽으면 공(空)으로 돌아가야지, 사리는 무슨 놈의 사리!" 하시며 다비식을 물리치고 화장터의 고열로 사리까지 불태웠다. 사리가 나와야 큰스님 대접받는 세태를 거스르는 그의 모범은 단순히 공이 관념적 사유를 넘어선 역사적 결단이요 행동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실제 고승의 사리는 부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 있다. 더욱이 불자들이 사리며 치아, 심지어는 부처의 발톱까지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모습에서 일그러진 기복종교의 변질과 타락을 보게 된다.

북한은 김일성 수령 살아생전 그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에서 <만수무강연구소>를 설치하였다. 여기에 종사하는 인원이 물경 5,000명 안팎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지어는 문수동의 남산 봉화 진료소는 물론이고, 청계산과 만청산 등에 연구소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 첨단 의료 장비를 갖추고 장군님의 건강을 보살피는 전담 연구를 한다. 장군님의 발톱마저 연구하여 최고 통치자의 만수무강을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연구원들에게 제공되는 최고의 공급과 특권은 이 기구가 갖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머지않아 북한 전역에 설치된 김일성 부자의 동상과 더불어 혁명 사적지마다 장군님의 발톱을 사리처럼 봉안하는 촌극마저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수령님과 장군님이 신격화의 단계를 넘어 북한 인민의 생사여탈권을 쥔 신이기 때문이다.

   
 
  ▲ 이미 부활하고 텅 비어 있는 예수님의 무덤까지도 우리는 숭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양국주)  
 
기독교는 하나님 이외의 우상에 대한 경계의 교훈을 계명의 제1로 삼고 있다. 과거 한국 교회가 건강한 신학과 믿음의 실체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했을 때, 박형룡 박사를 따르는 것만이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것이고 이 울타리를 벗어나는 모두는 이단시하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주기철 목사의 결단도 우리에게는 배움이 대상일 뿐 예배의 대상은 아니다. 목회자로 큰 족적을 남긴 한경직 목사의 신사참배는 성자도 실수를 경험할 연약한 인간임을 보여주었다.

교회 공동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혼의 공간이며 울타리이다. 심지어는 교회당마저도 우상이 되고 있다. 예배는 영원하나 교회당은 한시적인 탓이다. 불가에서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사리탑이나 부도전을 보고 모름지기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제자도의 첫걸음으로 '나'를 버리라고 하였다. 내 몸에서 자식과 부모, 명예와 재물마저도 버려야 할 것으로 강조한 것 아닌가? 그래야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양국주 /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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