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도 "껍데기는 가라"
선교지에서도 "껍데기는 가라"
  • 이득수
  • 승인 2007.02.26 18: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먼저 한국 내에서부터 개신교의 수와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 이런 위기 상황을 대처하는 한국 교회의 리더십은 너무나 피상적인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지나친 세속주의와 영지주의에 빠져서 무엇이 진정한 복음인지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의 공격에 한국 교회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위기 속에서 100년 전의 부흥을 그리워하며 대규모 행사 위주로 세력 유지 내지는 반전을 시도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런 부정적인 역할은 바로 한국 선교사가 사역하는 해외 선교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바깥에서도 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를 깊이 진단하려고 한다.

해외 선교지에서는 한국 교회의 약점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해외 선교지에서 나타난 한국 교회의 진단은 바로 어쩌면 문제의 핵심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바로 우리의 깊지 못한 영성과 실천을 찾아내고 회개하고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단지 우리의 추한 모습을 지적하는 모습에서 마치고 싶지는 않다. 

복음을 둘러싼 껍질을 찾아서 버려야 한다.

1) 한국이라는 껍질

다니엘 2장은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해도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과 영광과 계획을 드러내는 데에 별로 걸림돌이 없음을 보여주고 계신다. 그것도 세계 역사의 가장 강했던 강대국의 식민지로 끌려간 서너 명의 주님의 일꾼만으로 충분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바벨론 왕을 두려움에 집어넣을 정도의 비전을 보여주시면서, 주님의 나라는 역사 전반에 걸쳐서 나타날 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알려주는 환상을 보여주었고, 주의 나라의 절대성과 영원성과 초월성을 계시해주었다. 그분의 나라는 인간의 나라와는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나라들을 심판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나라가 망하면 마치 주의 나라도 역사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의 왕국 아래에 주의 나라를 두려는 어떤 노력에도 찬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바벨론 왕에게 나타난 환상에서처럼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결국 다 멸망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의 나라 운동을 한 나라의 발전과 재력에 의존하려는 모든 노력을 우리는 중단해야 한다. 한 나라의 문화나 경제력이나 성공담이 복음 전파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조차 우리는 거부해야 할지도 모른다. 주님의 나라는 우리가 소속해 있는 어떤 나라이냐에 상관없이 독자적인 나라를 건설하고 계시고 그 나라가 나타나서 이 땅의 나라를 무기력하게 하는 것으로 종말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근에 여러 아시아 나라에서 부상하고 있는 한류나 우리의 발전이나 심지어 현대의 초강국인 미국 같은 나라의 지원으로 주님의 나라를 지원할 수 있을 거라는 일체의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 오직 주의 나라는 주의 능력만으로 시작할 수 있다. 비록 시작이 겨자씨같이 작을지라도 그렇게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강력한 나라나 종교나 이즘(ism)도 이런 주의 나라를 무너뜨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이들은 먼저 다니엘이 경험했던 그 영원하고 강력한 주의 나라를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먼저 주의 나라의 의와 사랑과 능력을 깨달아 이 세상에서 주의 나라를 우리를 통해서 보여줄 수 있다. 그래서 껍질을 본질로 내밀지 않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목회자라는 껍질

목사 혹은 선교사라는 직업이 한국에서는 여전히 존경의 대상일지 모르나, 복음에 대해서 저항하고 있는 선교지에서는 목사라는 직업이 밝혀지면 추방의 대상이 되어서 숨겨야만 하는 직업이다. 그러기에 이런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목회자 출신의 선교사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자신을 목사로 호칭받기를 거부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목사와 선교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를 선호한다. 아마도 이런 호칭을 사용하는 내면의 깊은 동기가 인간의 존경을 받기 위한 본능이라면 우리는 완전히 껍질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이다.

선교지 방문을 하려고 했던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다. 입국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 해당 대사관을 방문했다. 물론 직업란에 당당히 'pastor'라고 기록했다. 그러자 대사관 직원이 “목사가 자국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방문 목적과 초청자 이름과 주소 등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등 까다롭게 굴자 화를 내면서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나는 매우 바쁜 몸이지만 너희 나라를 도와주기 위해서 방문하는데 이럴 수 있느냐”고 항변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대사관 직원이 “우리나라는 당신과 같은 사람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비자를 신청한 목사님도 신발에서 먼지를 털며 돌아갔다고 한다.

한국 교회에서 정식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으려면 해당 신학대학원을 수료한 다음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에야 정식 선교사가 될 수 있다. 한국 교회에서도 여전히 목회자 선교사를 정식 선교사로 인정하고 후원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선교지에서는 그런 신분을 갖고는 들어갈 수도 없고 오히려 감추어야 되는 신분이다.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진정한 신분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말라고 귀신들에게도 명령하였다. 자신의 신분이 밝혀질 경우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빨리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 자신의 신분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려주셨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정확한 신분을 제자들에게는 설명해 주었지만 외부인에게는 때가 이를 때까지 알리기를 원치 않으셨다.

우리가 주의 종이라는 사실을 더 자세히 알수록, 우리가 주의 종으로서 활동을 더 활발히 할수록, 세상은 우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몸부림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목회자며 선교사며 신분을 이용해서 자국에서 받은 존경을 선교지로까지 갖고 가려고 한다. 이것은 껍질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조용한 복음의 혁명을 일으킬 자이기에, 우리의 신분이 조용히 조심스럽게 지혜롭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비록 우리의 신분이 드러나서 핍박을 받고 추방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겸손히 인내하면서 그 고난을 감수해야 할 존재이다. 우리의 상급은 이 세상에 받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득수 / 서남아시아 B국 선교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