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의 자살로 본 기독교인들의 자살
가룟 유다의 자살로 본 기독교인들의 자살
  • 정양오
  • 승인 2007.03.16 1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분별하는 것이 더욱 긴요하다

작년 연말에 한 목사님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악했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 처음에는 누가 늘 지켜보고 있다는 강박관념과 환청에 시달렸고, 마침내 누군가 자기를 쫓아오면서 지켜보는 것이 보인다는 환상 단계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금년 들어 연이은 크리스천 연예인들의 자살로 사회와 교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매주 교회 출석도 꽤 잘하는 독실한 신자들로 알려져 있다. J 양은 죽기 하루 전 인터넷 홈페이지에 “하나님 품에 안겨 쉬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할 정도였다.

‘그들이 왜 하나밖에 없는 생명(生命)을 끊는 것일까? 자살의 동기와 종류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른 것인가? 하나님은 자살할 자유와 권리를 주셨는가? 자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자살은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가? 자살한 사람은 지옥 간다고 정죄하면 안 되는가? 주로 교인의 자살을 바라보는 교회 공동체는 무관한 것인가?’

아마 시원한 답은 없고 알쏭달쏭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영원한 미해결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수많은 자살 사건을 접하면서, 성경에 리얼하게 그려진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을 추적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가룟 유다의 자살 원인

성경 기자들은 가룟 유다를 가리킬 때마다 그의 이름 앞에 “열 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고 껄끄러운 코멘트를 함으로 아주 질이 다른 한 사람이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한 멤버로 가담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그는 공동체의 재정을 관리하는 회계였다(요 12:4-6, 13:29).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세리 공무원 출신인 마태가 상당히 수리에 밝아 회계에 적합한 인물일 것 같은데 가룟 유다를 내세운 것으로 보아 초기의 신실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공금을 관리한다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잘 발달된 요즘도 보통 관공서나 은행의 공금을 관리하는 자리에 사람을 임용할 때는 그의 재산 상태, 금전 거래 상황, 얼마나 청렴한지 인성까지 조사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돈을 만지다 보면 주머닛돈이든 쌈짓돈이든 사적인 일에 유용하거나 횡령하여 범죄를 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요한이 가룟 유다의 부정직한 행동에 대해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간 도적이라“(요 12:6)고 노골적으로 꼬집는 것을 보면 그를 보는 제자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던 것 같다. 유다는 일련의 타락의 과정을 통해 초심을 잃었고 우리 주님을 향한 신실성, 정직성을 상실하는 자리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계직을 끝까지 유지한 것을 보면 아마 예수님의 사랑과 기다림 때문이었을 것이다(요 13:1~2).

또 한 번은 부활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향유를 부었다. 노동자 1년치에 상당하는 돈이 순식간에 땅바닥에 쏟아지는 것을 보고 그는 “왜 저 큰돈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지 않고 허비하는가?”(요 12:5)라며 분노하였다. 만약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해 이를 두게 하라...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는 예수님의 코멘트가 없이 피상적인 관찰을 한다면, 가룟 유다 자신이야말로 가난한 자와 나그네의 하나님(레 23:22)을 잘 섬기고 있지만, 향유를 쏟아 버린 마리아나 그 귀한 재화를 낭비하도록 방조한 예수님이야말로 약자나 빈자에 대해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전혀 배려도 없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난할 수 있다. 가룟 유다에게는 다른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헌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얼마든지 바칠 수 있는 고귀한 희생, 거룩한 낭비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바보들의 액세서리로만 비쳤을 것 같다.

그가 진정으로 추구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뚜렷한 답이 없다. 그가 로마에 대항하는 열심당원으로서 예수님의 명성을 이용한 멋진 정치 개혁의 야망을 가졌는지 모를 일이다. 성경 텍스트가 보여주는 대로 어떤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돈에 대한 집착, 탐욕이 그를 채우고 있었다. 마치 말씀을 들었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였다(마 13:22).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다(약 1:15). 가룟 유다에 대한 자살 사건은 욕심 많은 개구리가 황소 흉내를 내려고 억지로 배를 불리려고 하다가 ‘빵’ 하고 터져 죽었다는 이야기처럼 인간의 사악한 욕심이 그 뿌리임이 분명하다. 이 욕심을 구체적으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는데(요일 2:15-16), 이른바 죄의 삼위일체라고 불린다.

어떤 형태의 죄든지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이 작은 욕심에서부터 시작하여 달콤하게 속삭이는 죄를 계속 마음에 품고 실행하여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구렁텅이로 자폭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자살의 제일 원인은 욕심이요, 그로 인한 죄의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덧붙여 이런 인간의 탐욕스런 내면에 죄의 바이러스로 멋지게 포장 공사를 하여 감염시키고 어떻게 해서라도 새 생명의 싹을 트지 못하게 하도록 훼방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탄의 실존이 그것이다(요 13:2, 눅 22:3-4). 따라서 자살은 죄요 죄의 결과물일 뿐이다.

가룟 유다의 자살을 옹호하는 변명들

가룟 유다의 심리 상태를 추적해보면 마지막 유월절 파티에서 예수님의 여러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고 함으로 그의 심령 상태가 칠흑같이 어두운 고독을 드러낸다(요 13:30). 밖으로 나온 그는 예수의 몸값을 흥정한다. 대제사장이 던지는 노예의 몸값으로 은 삼십을 받아 쥔 그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아마 ‘이건 아닌데’ 하는 그의 내면의 고동 소리로 괴로워했을 것이다.

이윽고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의 사형 언도를 지켜본 그는 그렇게 좋아하던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후회하면서 통사정을 해보지만 “그건 네 문제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일언지하에 내처버리는 저들의 싸늘한 모습을 보며 더 이상 호소할 길이 막혀 버린 막다른 상황에서, 예수는 전혀 죄가 없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이 그의 양심의 법정을 두드릴 때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용서 못할 자신을 향해 불가피한 분노의 불을 내뿜었을 것으로 본다(마 27:3-5).

탐욕으로 가득 찬 그는 제자들로부터 “도적이라”고 따돌림을 당하는 수모와 갈등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예수님을 팔았고 자신을 자살로 몰고 간 정신분열증 환자로 본다. 또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야욕(탐욕)을 품고 있었던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이 사사건건 더 큰 분노의 감정, 증오심으로 축적되었을 개연성을 생각할 수 있다.

요즘은 가룟 유다의 죽음은 비참한 자살(自殺)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그의 거룩한 뜻을 성취한 도구로서 희생양이므로 숭고한 죽음(自決)로 보려는 발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또한 그는 고행을 통해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것으로 간주하여 비난 받을 일이 아니라고 봄으로 바티칸에서는 그를 복권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 번은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국제 정신과 분야 전문인 회의에서 '심리 치료에 대한 인간의 가치'(the human value on psychotherapy)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한 미국 정신과 의사는 "사람들이 온전해지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치 큰 타이어 속에 단단한 쇠로 된 바퀴가 있음으로 타이어를 유지하는 것처럼 믿음이란 중추 바퀴 같아서 생명을 끌어오고 인간성을 결합시킨다"라고 외쳤다.

독일의 바우어 박사(Dr. Bauer)는 "인생에 있어서 소망이 가장 중요하다. 소망은 하나의 신비인데 우리는 그 정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병들어 혈색이 좋지 않고 시선을 아래로 깔고 있던 환자들이 의사의 소망스런 진단을 듣는 순간 살갗이 분홍색으로 바뀌며 눈이 빛나고 치료가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페루에서 온 발데스 박사(Dr.Valdez)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치료의 힘은 남을 판단치 않는 사랑이다. 자기가 죄인인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용납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치료 효과는 없다"고 하였다.

그들의 주장을 보면서 일찍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영감 어린 편지 내용, 믿음, 소망 사랑이 최고의 묘약이라고 로버트 슐러 목사는 강조한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자살을 정신적 갈등, 죄책감, 우울증 등 정신적인 질병의 결과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현대 과학의 연구 성과도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으로 잘 활용하는 것이 지혜이다. 그러나 자살을 단순히 마음이나 정신적인 질병의 한 결과로 국한시킨다면 자칫 영적인 질병을 간과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자살의 원인은 죄로부터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마귀의 역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 바이러스를 집어넣었다(요 13:2, 마 22:3).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요 13:27)는 표현은 자살이 단순히 정신 병리학의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문제는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더라도 영적인 문제는 영적인 접근 방법이 옳고 복합적인 경우인지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자살을 예방하기 위한 노력들

요즘 자살을 예방하려는 다양한 접근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生을 命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의지가 없는 로버트로 만들지 않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 뜻이 있다. 더구나 십자가에 목숨 버린 사랑으로 죄에서 우리를 건져 영원한 새 생명을 주셨는데, 자살은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에게는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죄로 타락한 이 지구촌의 인생이라면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삶의 고난과 각종 질병이 불가피하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극복할 힘도 주셨다고 믿는다. 자살이야말로 최대 최적의 도피처라고 속삭이는 거짓말 바이러스는 고난 앞에 좌절함으로 우리의 귀한 목숨까지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파란 하늘, 맑은 공기, 이런 걸 느끼기만 해도 큰 행복이란 걸. 살아 숨쉬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라고 고백하는 백혈병 소년과 엄마가 둘이 함께 쓴 '정표 이야기'라든지 “내가 온 힘을 다해 암과 싸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내게는 아직 한쪽 다리가 있어요”라면서 꺼져가는 마지막 생의 작은 불꽃이라도 너무 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일깨워주는 주변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예수를 팔고 빌라도 법정의 사형 언도를 본 가룟 유다는 “무죄한 피를 팔았다”는 자학과 절망의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며 일말의 기대를 걸고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갔었지만 그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한 방울의 동정도 찾을 수 없었다. 무죄한 예수를 죽여 인간적인 기득권을 움켜쥐는 데 혈안이 된 이들에게서 꺼져가는 한 생명을 돌봐줄 그 어떤 여력도 찾을 수 없었다. 죽어 버린 종교의 한 단면이다.

안타깝게도 예수의 수난으로 수라장이 되어 버린 제자들도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세 번이나 부인을 하는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다들 자기 살겠다고 뿔뿔이 흩어졌다. 만약 제자들 공동체에서 허우적거리는 가룟 유다를 보듬어줄 만한 좋은 멘토라도 있었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넋두리를 해본다.

최근 교회 안에 벌어지고 있는 자살 뉴스를 들으며 오늘의 교회가 마치 화석화한 유대교처럼 교회 안에서, 총회 안에서 사람을 살리려는 노력보다는 생사람을 잡는 인권의 사각지대는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타문화권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에게는 남모를 고독이 많다. 특히 사모님들이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것을 많이 본다. 선교비 보내는 데 믿음 없이 무슨 고급 병이냐고 핀잔하기 전에 참 수고한다는 따스한 위로 한마디가 저들을 감동하게 한다. 성도들이 알아줄 이 없는 목사님들의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저 생계비는 말할 것도 없고 끼니를 걱정하는 개척교회 목사님들의 눈물겨운 삶이 우리 주변에는 없는 지 돌아봐야 한다. 지상교회는 너나 할 것 없이 영육의 크고 적은 상처로 신음하는 병원과 같다. 모두가 서로서로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다.

가룟 유다의 자살 미스터리는 아직도 많은 미스터리다. 자살이라는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강하여 자살 모방 신드롬 현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구원 받은 성도라고 안일한 생각을 갖거나 방심은 금물이다. 이런 자살 유혹의 마수가 어느 순간에 찾아올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갖고 깨어 있어야 한다. 가룟 유다를 정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어떤 면에서 인간적으로 양심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의 자살을 미화하거나 동정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애절한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곳으로 가버린(행 1:25) 사람에게 구원을 얻었다고 억지를 부린다 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다. 사탄이 얼마나 잔인하게 역사하는지 밝히 드러내어 가룟 유다와 같은 그런 탐욕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분별하는 것이 더욱 긴요하다.

정양오 / 남아공 선교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