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가 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사야가 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 정양오
  • 승인 2007.03.2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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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찔림은, 그가 상함은”

성경 찾아 보기 : 이사야 52:13~53:9

지난 2004년 4월 8일 예수의 수난일인 금요일(4월 9일) 수난주일 예배 설교를 준비하면서, 당시 유행한다는 영화 '예수의 수난'을 보러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우리의 주요 사역이 국공립학교를 순회하면서 학생들에게 예수 영화를 접촉점으로 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 예고 광고가 나오기 전부터 이미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담임목사가 먼저 본 후 신앙생활에 좋겠다고 생각되면 선교사의 호주머니를 털어서라도 한번 모두 보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를 순회하며 누가복음을 배경으로 한 예수 영화(CCC 프로젝트) 420여 회를 상영하면서 전도에 상당히 많은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늘 아쉬운 점은 이 영화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피 흘리는 장면을 찾아볼 수 없어,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하고 아쉬워하곤 했다.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처음부터 수난과 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왠지 영적인 느낌이 이상야릇하기만 하였다. 다 보고 나서도 그 감동이 어떤 은혜와는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내 영의 코드가 자꾸 거부를 하는 것 같았다.

로마 군인들의 잔인성, 사탄의 역사…, 정작 강조되어야 할 복음의 핵심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 구원이요, 연민을 불러일으킬 육신의 고통보다 어쩌면 영혼의 고통일 텐데, 알 수 없는 아람어와 라틴말 대사에 영어 자막으로 확실히는 잡히지 않지만, 뭔가 본질이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끌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이런 대목인지도 모른다. 구태여 카톨릭 신자가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라는 안경으로 평가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관람 후 왠지 교인들에게 여러분도 한번 보라고 권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영화는 카톨릭 전통주의자인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말하기를 “그것은 나의 신앙을 반영한다”(A Catholic Film with a Catholic Message.), “나는 카톨릭교회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는다”라고 하였다. (Gibson has declared, “It reflects my beliefs.” “There is no salvation for those outside the [Catholic] Church…I believe it.) 따라서 일반인들이 잘 관찰하지 않으면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성경적 메시지보다는 카톨릭적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Richard Bennett and J. Virgil Dunbar은 지적하기를 “이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영향은 잠재적인(subconscious) 신성 부정과 은근히 그리스도의 수난 과정 속에서 예수보다는 마리아를 생각나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Andrew J. Webb은 이 영화는 다만 슬픔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희생의 환상과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마리아를 떠올린다고 하였다.

놀랄 필요가 없지만 비성경적 비복음적인 카톨릭 신학에서는 현재 온갖 액세서리를 동원하여 마리아의 역할을 과대 포장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머니 품에 쌔근쌔근 잠들어 힘없는 어린 아이의 이미지를 갖게 하고 있다. 요즘도 세계 도처의 동상에서, 사진에서 마리아는 피눈물을 흘리며 현현하여 역사하는 신으로 주변의 카톨릭교도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확실히 로만카톨릭은 “예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기보다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빌린 하늘의 여신을 믿는다는 것이 틀림없다.

영화는 하나의 영상 작품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작품 속에서 사실의 과장이나 왜곡 축소가 전혀 문제될 필요가 없다. 어떤 면에서 재미있는 작품으로 관객을 동원하여 비즈니스에 재미를 보면 그만이다. 멜 깁슨은 자기의 재능을 이용하여 그가 따르는 카톨릭 사상과 교리에 충실하면서 사업적인 수완을 보였다고 할 수도 있다. 혹자는 “어떤 내용들이 성경에 있지 않지만 성경에 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록 성경의 사실을 변경하지 않는다 해도 성경의 사실이 잘못된 인상(Image)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설령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눈을 뜨게 되고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이 영화는 성경이 보여주는 복음의 진수가 아님을 알아차려야 한다.

본문에 하나님은 환상의 사람, 이사야의 눈앞에 신령한 망원경을 대시며 먼 미래를 보게 하신다. '구약의 최대 사상'(思想)이라고 소개하는 내레이터의 해설과 함께 여호와의 종의 노래 그 네 번째 곡인, 뮤지컬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막이 열린다.

장엄한 서곡 “보라, 내 종!”

여호와께서는 손가락으로 저 먼 앞을 가리키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선지자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보라, 내 종!"이라고 하시며 장중한 종의 노래 서곡을 시작한다. 처음에 이사야는 혹시 종이라면 자신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 종은 인간의 여느 다른 종과는 차원이 다른 종이다. 무지몽매한 인생들이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땅만을 보고 소망이 없는 땅의 것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데, "하늘을 보라, 영원한 슈퍼스타 메시아를 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마치 이것은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힘차게 외친 말을 회상하게 한다(요 1:36). 종(Servant)이란 죽어도 살아도 오직 주인만을 위해 봉사하는 자유의지가 없는 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 사실을 증거한다(빌 2:6~8).

죄인들 앞에 무릎을 꿇어버린 하나님의 종

팡파르를 울리며 화려하고 멋지게 출현할 메시아를 학수고대하던 유대인들은 수난자(受難者)이신 '여호와의 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휘황찬란한 왕관을 쓰고 위풍당당하신 메시아라면 쉽게 납득할 수 있는데, 죄인이 써야 할 초라한 가시관을 쓰고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남루한 누더기에 무릎을 꿇은 왕이라면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의 눈이 아니고는 전혀 상상을 불허하는 대목이다.

섬기러 오신 종을 말하고 노래하기는 쉬워도 그를 닮아가는 종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삿대질을 하며 증오하고 달려드는 원수를 위해서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목숨을 버린 대속의 지고한 사랑을 어떻게 이성으로 감히 측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백만 분의 일이라도 그를 따르는 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은 못할망정 미워하지는 말아야지", "내 속에는 사랑할 힘이 없으니 주여 도와주소서." 어쩌면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가진 남다른 고민이요 항구적인 기도 제목이리라.

“내 종이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성육신으로 시작된 수난의 생애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인생의 죄 짐을 짊어지신 수난의 절정에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 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라고 하신다. 오직 순종의 삶으로 일관하였던 그의 지혜는 십자가에서 열방의 죄를 대신 지시고 속죄의 피를 뿌린 대제사장이셨다.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 끝장난 메시아, 침을 뱉음을 당하고 내동댕이쳐서 완전히 매장되어버린 이 나사렛 예수가 그 십자가로 죄를 용서하고 삼일 만에 인류의 최대의 적,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늘의 보좌에 앉으시니 오고 가는 역사의 길목에서 사탄이 깜짝 놀라고, 온 지구촌이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어버린다.

구원 받기로 작정된 택자들이 동서남북에서 그 참혹한 십자가를 사랑하며 모여들고 있으니 놀랄 일이요, 마침내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니, 세상 열방은 너무 당황하고 너무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어 버렸는가. 이것이 오늘 교회가 만민을 향해 깃발을 힘차게 드는 이유이며, 신앙고백이며, 그를 따르는 성도들의 긍지와 축복이리라.

한 옥타브를 높여 중반부의 절규 :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종의 노래는 중반부에서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한 옥타브를 높여 종의 낮아짐을 노래한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고 절규한다. 은혜의 시대, 구원의 날이 왔는데도 여전히 불신앙의 세대는 복음을 거절한다. 영육의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 앞에서 오히려 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들었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죄인의 완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대체 왜 믿지 못할까? "그는 주 앞에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묘사한다. 한마디로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biography)는 한마디로 형편이 없다. 역사 속에 몰락해버린 로마 식민지 유대 출신이요 게다가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무시하던 그 나사렛 동네 출신이다. 명문가문도 아니요 사회적 신분도 별 볼일 없는 "연한 순 마른 땅"인데 그 누가 쳐다본단 말인가.

그의 한평생은 목마름과 시장함으로 이어져 예수님의 실제 나이 서른 셋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인 것 같고(요 8:57) 그의 최후가 저주의 십자가임에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노래하고 그를 높이며 그분만을 섬기는 자들은 웬일일까. 오늘 내가 십자가 그늘에서 영원한 안식을 발견한 것은 오로지 그의 은혜이다. 이것이 믿는 자의 비밀이다.

종반부의 엄청난 스타카토로 클라이막스 : “그가 찔림은, 그가 상함은”

이제 종의 노래는 점점 세기(crescendo)를 더하여 수난의 종반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마치 바닷물이 요동치는 엄청난 스타카토로 연주가 진행된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그가 찔림은…그가 상함은…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세상에 있을 때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지만" 세상은 그를 천대하였고, 우리 주님이 빌라도 총독 앞에서도,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 앞에서 조롱을 당해도, 벌거벗은 수치를 당해도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죄가 많은 죄인일지라도 욕을 먹을 때는 먹더라도, 죽을 때 죽더라도 한마디 하는 것이 본능이요, 지극히 정상일 텐데 더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의 침묵(amazing silence)에 빌라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었으리라(막 15:4~5).

왜, 무엇 때문인가? 죄! 다름 아닌 바로 내 죄가 그를 벙어리가 되게 하였다. 다름아닌 바로 내 죄가 그를 찔렀다. 바로 내가, 내 죄가 그를 죽인 것이다. 그가 찔리고 터져 죄 없으신 옥체가 성한 곳이 없이 파열된 것은 죄로 인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우리의 영육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함이었다(사 53:5). 이 위대한 영감의 계시 앞에서 헨델은 '메시아' 작곡의 펜을 떨어뜨리고 흐느적거리기 시작하였단다. 철저히 인권이 유린당하고 자유를 박탈당한 이 처절한 죽음 앞에 "다 이루었다"고 승리를 선언하신다(요 19:30).

하나님의 구속 사랑을 확증하였고(롬 5:8), 범죄자에게 내리는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Infinite wisdom planned), 하나님의 섭리인 이 위대한 구속 계획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 갈보리의 완벽한 승리에 인간의 그 어떤 것을 더 할 필요가 없다. 구속의 시작도 마침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역사의 현장에서 그 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었는가? 그 누가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였는가? 오직 예수뿐이다.

이사야에게 보여준 종의 노래는 마침내 약 700여 년 후 AD와 BC의 한가운데 우뚝 서신 메시아, 인류의 유일한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 갈보리 승리의 교향곡이 온 누리에 울려 퍼졌다.

오늘날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모든 성도들에게 보여준 이 갈보리의 노래는 지구촌 인류의 마지막, 최대 최고의 '새 예루살렘 영광의 교향곡'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계 21:4). 그때는 그야말로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천군천사의 관현악단이 팡파르를 울리고 주의 택한 뭇 백성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풍당당한 백 보좌에 앉으신 만왕의 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오직 예수 제일의 신앙을 지키고, 복음 일념으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린 선한 용사들을 우리 주님이 직접 어루만져주시며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더 이상 설교를 할 필요가 없고, 세계 선교도 끝이 나고, 더 이상 예수 믿으라고 외칠 필요가 없어진다. 그분은 지금도 문 밖에 서서 "내 사랑아, 문 열어 다오"(계 3:20) 하시면서 곤욕을 당해도 입을 열지 않으셨던 그 인내하심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의 목숨 버린 사랑과 용서를 끝까지 저버리고 전도자의 복음을 듣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순진 무궁한 어린양 예수의 불 같은 진노와 심판에 놀라고 또 놀랄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여,

이 부활의 계절에 아직도 꽁꽁 얼어붙은 저 북녘 하늘의 깜깜한 지하에서도, 어두운 무슬림의 쇠사슬에서도, 예수 구원을 외치다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지면서도 소리 높여 부르는 승리의 노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을 우리 함께 노래해보자. 이사야처럼.

정양오 / 남아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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