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붉은 글씨의 기독교인
[번역] 붉은 글씨의 기독교인
  • 최봉실
  • 승인 2007.03.2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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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견디어 낸 예수

“저는 세속적인 유대인으로, 컨츄리 음악 작곡가이자 디스크자키이지요. 하지만 당신이 하시는 뭐 그런 게 아주 좋습니다. 당신의 북 투어를 쫓아다니고 있답니다.” 나를 인터뷰한 내쉬빌 라디오 방송국 사회자의 말이다. 그는 함께 저녁을 보내면서 새로운 음악에 대한 정보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내가 작곡가인 자신의 꿈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고 있음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운동에 대한 적절한 이름이 없음을 지적하며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다. ‘붉은 글씨의 기독교인’(붉은 글씨의 기독교인 운동은 미국 기독교우파가 낙태와 동성애 문제에만 집중하는 것에 반대하여, 그보다 더욱 중요한 가난과 가정, 평화 등의 문제를 오로지 말씀의 가치를 따라 실천하는 데 더욱 집중할 것을 주장하는 운동. 역자 주). 왜냐하면 성경의 붉은 글씨 부분은 예수가 한 말을 표시해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에서 붉은 글씨로 적힌 부분을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성경의 ‘붉은 글씨 부분’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실 아주 많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다. 이따금 성경을 펼쳐 붉은 글씨 부분을 읽어 보면 아주 마음에 들 것이다. 거리나 학교, 일터에 가서 예수 하면 생각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자,’ ‘온정이 넘치는 자,’ ‘사랑의 예수,’ ‘평화의 상징’ 등과 같은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기독교인이나 교회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보라. 아마도 매우 다른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우리의 어려움은 대부분의 사람이 기독교인과 교회는 예수가 행한 것을 상징하는 존재가 실제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좇는, 정신 나간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행함을 드러내지 못할 때 혼란스러워지고 잘못을 느끼게 된다.

예수는 우리가 배고프고 집이 없는 자, 병들고 갇힌 자와 이방인을 대하는 것을 마치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여길 것이라고 말한다. 이걸 보면 예수는 부유층을 위해 양도소득세 삭감과 빈민들을 위한 식량 지원 삭감(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예산을 삭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2005년 소저너스는 의회에 대한 감시와 항의 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역자 주)이 최선의 국내 정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또는, ‘적을 사랑하라,’ ‘평화를 이루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하는 그에게 ‘테러리즘에 대한 우리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포함된 시민들에게 상당한 크기의 ‘추가 피해’를 가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바로 예수다. 많은 교회들과 월스트리트의 무역업자들, 그리고 미국 제국을 유지하고 있는 워싱턴의 권력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큰 문제거리다. 하지만 종교인이든 아니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이다. 그러나 교회는 광고주들이나 매체나 정치가들보다 훨씬 더 믿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예수는 여전히 훨씬 고매한 존재로 남아 있다. 어찌하였든 교회를 견뎌내고 살아남은 것이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 모두는 너무 자주 그가 한 말을 잊어버린다. 그런데 다시 우리를 예수와의 진정한 만남으로 이끄는 두 책이 있다.

<The Secret Message of Jesus>(예수의 비밀스런 말씀)는 브라이언 맥로렌(Brian McLaren)의 새 책이다. 여기서 말씀이란 종종 교회 자신조차도 알기 어려운 비밀로 되어 있으며, 완전히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 같아 보이는 TV의 목사들은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할 그런 말씀이다. 브라이언은 ‘새로운 교회(emergent church, 흔히 ‘이멀징교회’라 부른다. 역자 주)’라 불리는 새로운 영적 운동의 지도자인데, 이 운동은 교회에서 자라난 세대를 예수에게로 돌이키도록 이끌고 있으며, 종교 사회 밖의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전에는 교회에서 결코 들어보지 못한 그런 예수를 만나고 그에게 매료되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말씀, 즉, 온정과 정의가 실현된 새로운 세계와 정의로 이끄는 말씀이 자신들이 갈급해왔고 기다려왔던 바로 그 복음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그의 책은 예수의 메시지를 전혀 다시 배우도록 돕는다. 아마도 예수의 말씀을 이제야 처음 배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할 것이다.

“당신이 기도하는 그것을 경계하라.” 셰인 클레이본은 이 경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젊은 기독 청년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그의 걸음을 따르도록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이 젊은 기독 운동가는 자신의 책 <The Irresistible Revolution>(거부할 수 없는 혁명)에서 바로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가 예수를 따르면서 결국 이르게 되는 지점은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종국적으로 이르게 되는 곳과 같은 그런 안락한 교외의 안식처나 예배처, 혹은 문화적 양식이 아니다. 심지어 그는 기독교우파의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교리를 시험하는 리트머스 종이로 여기는 정치적 충성도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으로 복음에 대한 충실함을 생각하는 것 같다.

여러 해 동안 셰인은 기독교 공동체의 집중된 힘을 바탕으로 필라델피아와 캘커타의 거리, 나아가 이라크의 전쟁 지역에서 복음을 실천하고 있다. 책에서 그는 우리를 순례의 여정으로 이끈다. 자신의 불확실함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열정을 나누고, 자신의 인간적 약점과 모순을 인정하면서, 사회와 교회를 비판하며, 자신의 노력의 ‘보잘것없음’과 그가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를 전심으로 수용한 채 세상의 변화를 향한 희망을 발산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를 ‘소박한 길’(The Simple Way)이라 부른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길, 하나님나라의 길, 십자가의 길인 ‘그 길'의 삶에 더욱 가깝게 살아감으로써 성경이 세상의 논리를 어떻게 전복해내고 있는지를 재발견한다고 믿는다. 물론, 그러한 모습은 언제나 세상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조금은 미친 것으로 여겨져왔다.

미국의 종교, 사회, 정치의 풍경이 총체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이 나라 곳곳을 동분서주하는 동안 나는 새로운 힘과 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도 희망의 가장 거대한 징표는 자신의 신앙을 이 땅에 실천하고자 열망하는 새로운 기독교 세대일 것이다. 개인의 영성과 넘쳐나는 순응주의, 그리고 오직 ‘미국을 축복하는 하나님’만 부르짖는 기독교 정신은 세상에서의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타협해왔으며, 그러는 와중에 새로운 기독 세대들의 의식을 잠들게 했다. 스스로 하지 않을 일로 신앙을 정의하는 것으로는 이 세대를 압도할 수 있는 공의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지 못한다. 젊은 세대들은 자신의 헌신과 열정과 재능을 바칠 가치 있는 일에 갈급해 있다.

브라이언과 셰인의 책은 신앙인들이 다시 복음을 들고 일어나 불을 피어내고 있음을 증거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좌파나 우파와 같은 범주로 쉽게 구분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범주에 도전하는 능력을 지닌다. 이 두 책은 다시 예수를 사랑하게 되어 다음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 ‘붉은 글씨’의 기독교인들 모두의 선언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다시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신다.

* 짐 월리스는 <소저너스>의 편집장이다. 
* 번역 / 최봉실


<미주뉴스앤조이>는 <Sojourners>의 허락을 받아
Jim Wallis의 칼럼 원문, 번역문, 해설을 동시에 게재합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양심적인 미국 지성인들의 생각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수준 있는 글로 영어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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