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교회의 몫, 정부의 몫
[번역] 교회의 몫, 정부의 몫
  • 최봉실
  • 승인 2007.04.0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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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을 위한 정부의 역할, 성서가 밝힌다

2007년 4월 <소저너스>는 네 가지 주요 쟁점인 ‘빈곤‧환경‧공공 보건‧재난 구조의 장벽’에 대한 사례 연구를 살펴본다. 이 각각의 사안과 관련하여 정부의 역할을 놓고 논쟁이 붙었다. 교회의 정치 철학과 정치 신학의 차이점 때문이다. E. J. 디온의 글(‘The Overlooked Schism : America's religious communities and the battle over government.' by E. J. Dionne Jr. Sojourners Magazine, April 2007. Cover. 역자 주)이 지적하고 있듯이, 정부의 적절한 역할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 교회 분열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이다. 그렇게 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성서는 교회의 역할뿐만 아니라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도 말한다. 물론 그 둘의 역할은 같지 않다. 로마서 13장에 따르면, 국가는 죄 없는 사람을 보호하고 죄인을 벌함으로써 법의 통치를 바로 세우도록 되어 있다. 즉, 공익을 보장하는 정부의 역할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적절히 수행해야 교회는 세상에서 져야 할 자신의 역할을 비로소 제대로 질 수 있다. 교회는 ‘두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들을 귀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전할뿐만 아니라, 국가를 향해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와 평등과 공평은 기독교 공동체가 담보해야 할 중요한 성서적 가치이지만, 정부가 책임지고 획득해내야 할 기준이기도 하다.

신앙의 사람들은 ‘제한된 정부'(limited government)라는 관점을 지지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보수주의적 입장이 주장하는 ‘작은 정부’(small government)와 다르다. 이 작은 정부에 대한 주장에서는 사회를 장악하는 부의 권력에 맞서는 공공 부문의 능력을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때때로 감지된다. 그렇다고 ‘큰(강력한) 정부’(big government)와도 같지 않다. ‘큰 정부’란 보다 많은 통제력을 탈취하여 개인의 권리와 부당한 국가에 대항하는 힘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정부이기 때문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좌우 논쟁의 해답은 작은 정부나 큰 정부가 아니라, 지혜롭고 효과적인 선한 정부인 것이다.

사적(시장) 부문, 공공 부문, 시민사회(비정부 및 비영리단체. 여기에 신앙 공동체도 속한다). 사회를 이루는 이 모든 부문들은 그 구성원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원활하게 기능해야 한다. 마치 세 개의 다리가 있는 걸상과 같다. 다리 하나가 너무 길면 걸상은 균형을 잃고 기울어진다. 각 부문은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지닌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부문이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한 사회는 각 부문이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때 제대로 돌아간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간 후, 피해를 입은 걸프 코스트(Culf Coast)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실질적인 도움을 준 이들 가운데는 종교 단체가 있었다. 그들은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차원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신속하게 일을 수행했다. 많은 정부 기관들이 무능을 드러낸 반면, 종교 단체들은 재난을 당한 이들에게 더 많은 온정을 보여준 동시에 더욱 효과적인 구조 능력을 발휘했다. 많은 이들이 일반적으로 정부의 역할을 경시하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 사실을 언급했다.

하지만 교회가 구조와 구제는 할 수 있지만 제방을 다시 쌓을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종교 단체가 빈민 구제에 전 예산을 할애한다 하더라도, 국내와 전 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교회는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하는 4,660만 미국인들에게 의료 지원을 제공할 수 없으며, 맞벌이 가족에게 충분한 주택 공급을 보장할 수도 없을뿐더러, 노년층을 위한 사회보장도, 어린이들을 위한 사회 안전망도 제공할 수 없다. 오직 정부만이 종종 시민사회와 협력하는 가운데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 또한 교회는 부모와 자녀들에게 가족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할 수도 없다. 오직 사적 부문과 노동 운동만이 적절하고 공평한 고용을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이다.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은 사적 부문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해왔다. (그리고 정부의 역할을 지나치게 의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일정 정도 개인 경건을 강조하는 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 주제와 관련한 론 사이더의 설명(‘For the Common Good : A biblical perspective on the role of government.' by Ronald J. Sider. Sojourners Magazine, April 2007. 역자 주)에 따르면, 성서는 정부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정의’(Justice)와 ‘의’(Righteousness)를 실현하라는 성경적 명령에 입각해 책임 있게 통치할 권위를 지닌다고 본다.

나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장차 ‘새로운 협력 관계(파트너십)’이 무수히 형성되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그 문제들은 사회의 한 부문이 해결하기에는 간단히 말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새로운 연대와 공통 기반을 발견해가는 가운데 우리 모두의 힘이 요구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협력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유가 절실하다. 이는 실제적으로 말해서, 시장들과 시의회, 판사들과 경찰, 교회와 학교, 비영리단체와 재단, 기업의 총수들과 노조 관리들, 가정과 심지어는 매체까지, 이 모두를 아우르는 단합된 힘으로 긴 안목을 가지고 우리 사회 전체의 청사진을 마련해야 함을 의미한다.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가톨릭에서 견지하고 있는 주요 원칙이 유용한 도움이 되겠다. 그것은 ‘보완성’(subsidiarity)이라는 것이다. ‘보완성'이란 ‘합법적으로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위들’ 중에서 사안에 가장 근접해 있는 권위 조직이 최초로 그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동일한 가톨릭의 교리는 다음의 내용도 함께 명시하고 있다. ‘공동의 선을 위해 더 큰 사회적 조정과 규제가 필요할 경우에는 보다 큰 정부의 역할이 요청된다.’

압도적인 빈곤의 문제와 같은 경우, 그것은 단지 한 부문만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책임이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함께 청사진을 모색하고 공유해야 한다. 각 지역 사회에서, 그리고 국내 정책 차원에서도 정부만이 공적인 헌신과 안전장치와 표준, 그리고 자원의 배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거나 또는 보장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의 난제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비전과 동력은 소위 시민 사회의 ‘조정 제도’ 안에서 종종 가장 유용하게 발휘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자원과 제도를 이용해서 그것을 가장 훌륭히 결합시켜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바로 그러한 새로운 협력 관계가 필요하다.

이렇게 문제에 대해 ‘다원주의’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다양한 정치적 관점에 각기 서 있지만 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차원에서 교회와 비영리기구의 동력을 시장 부문과 정부의 동력과 결합시켜내는 새로운 인적 동원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사회상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이 또한 필요한데, 그 사안에 가장 근접해 있는 최소 단위의 사업 계획에 힘을 실어주는 것을 전제로 하는 한편, 종교 사회의 도덕적 힘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자원의 새로운 결합이 필요할 터인데, 공적 예산과 마찬가지로 기업의 영리와 인류애적 활동에 기여하는 단체들의 자금을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요구해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요청되는 것은 새로운 책임이다. 즉, 이러한 바탕에서 우리 사회의 전체 건강에 대한 책임을 우리 모두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 짐 월리스는 <소저너스>의 편집장이다. 
* 번역 / 최봉실


<미주뉴스앤조이>는 <Sojourners>의 허락을 받아
Jim Wallis의 칼럼 원문, 번역문, 해설을 동시에 게재합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양심적인 미국 지성인들의 생각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수준 있는 글로 영어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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