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교회 분규, 어떻게 할 것인가?
한인 교회 분규, 어떻게 할 것인가?
  • 허성규
  • 승인 2007.04.26 1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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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의 자각과 연대로 교회가 세상의 존경 받도록 하자

언론 매체를 통하여 발표된 최근의 통계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의 교인 수는 감소되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사실은 많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있는 점이다. 개종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교회의 분쟁’이라고 밝히고 있다.

필자는 여러 번 한인 교회의 분쟁에 관한 주제로 의견을 발표하여왔다. 그동안 주로 분쟁의 거시적인 측면만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분쟁의 미시적인 측면, 즉 한인 교회 분규의 패턴을 다루고자 한다.

한인 교회에서 분규가 발생한 후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자. 첫째 분규의 원인을 발생시킨 당사자(유감스럽게도 대부분 분규의 중심에 담임목사가 있다)는 필요한 성경 구절을 이용하여 그 비리를 덮어버리려 시도한다. 즉 “교회에서는 형제의 허물을 사랑과 용서로 감싸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하고, 빠짐없이 등장하는 메뉴는 ‘자기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의 티만 보려 한다'는 성경 구절이다. 설교 시간을 이용하여 그러한 성경 구절은 반복된다.

그래도 비리를 밝혀야 한다는 교인들의 외침이 있으면, 이제는 성경 말씀을 이용하여 비판적인 교인들을 비방하고 저주하기 시작한다. 얼마 전 한국의 대형 교회 목사가 교회 재산을 교인들의 동의 없이 은행에 저당 잡혀 아들 사업체에 사용한 일이 발생하였고, 이에 여러 장로와 교인들이 항의하였을 때 그 목회자는 공적 예배에서 “나를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으리라”고 말한 사실이 월간지에 발표된 것을 본 적이 있다.

문제는 순진무구(?) 한 많은 교인들이 이러한 황당한 설교에도 ‘아멘' 하며 화답하고 맹목적 추종자가 되어가는 서글픈 현실이다. 이러한 교인들의 분규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말들로 나타난다.

“교회에서는 무조건 평화를 지켜야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만 치리하실 수 있으므로 교인들은 조용히 기도만 하면 됩니다.”

“이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교회로 가면 됩니다.”

“나는 이 편 저 편도 아니고 하나님 편입니다.”

그래도 교인들의 항의가 계속되면 다음 단계로 진행한다. 설교 중에 담임 목사는 ‘이 교회를 떠나겠다’ 식의 애걸 반 위협조로 나오면서 동시에 열성 지지 교인을 시켜서 목사 지지 서명을 받기 시작한다. 이러한 경우 반대편에 서있는 교인들은 교회가 교단 소속이면 분규의 문제를 노회에 제소하게 된다.

필자는 교회 분규가 노회에 가서 잘 해결되었다는 소리를 결코 듣지 못하였다. 왜 그런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노회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중재자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노회의 목사들은 분쟁의 당사자인 목사 편을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와중에 담임목사의 세가 불리하다고 여겨지면 추종 신도를 데리고 나가서 다른 교회를 차리게 된다. 판세가 우세하다고 판단되면 갑자기 공동회의를 다음 주에 실시한다고 발표하고, 공동회의에서는 군부독재 시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의 꼭두각시놀음과 같은 체육관 선거처럼, 문제점에 대한 찬반 토론을 철저히 봉쇄하고, 담임목사의 맹목적 추종 세력은 목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회의를 몰고 간다. 따라야 할 회의 절차는 대부분 무시된다.

이러한 비민주적 절차로 당회를 해산하고 당연히 담임목사를 비판하는 당회원을 제거하게 된다. 그 다음 단계는 당회를 대체할 운영위원회를 결성하는 수순을 밟는다. 운영 위원회는 물론 담임목사를 지지하는 교인들만 임명하게 된다.

바른 교회를 위하여 외치다가 소수가 된 교인들은 다음 단계에서 이 분쟁을 사회 법정으로 가서 해결하여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만일 사회 법정으로 가면 담임목사 편에서는 법적 싸움에서 훨씬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왜냐하면 교인들의 헌금을 법적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교인들은 자기들의 개인 비용으로 법적 비용을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담임목사 쪽은 그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상대방이 지쳐서 포기하기를 바라고, 사실 많은 분쟁의 경우를 보면 이러한 단계에서 목사 쪽이 일방적으로 이기는 게임으로 끝나고 있다.

교회의 비리를 바로잡자고 호루라기를 부는 교인들은 소수가 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의 분위기상 목회자의 잘못을 비판하기가 쉽지 않고, 많은 교인들이 목회자를 비판하는 것은 신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고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령 교회의 비리를 바로잡자고 교인들의 동참을 호소하더라도, “용서합시다” “기도해봅시다” 등 겉으로 듣기에 번지르르한 무책임한 말만 하며 피하곤 한다.

교회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당회를 해산시키고 운영위원회를 만드는 것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헌법을 중단시키고 내각을 해산하여 혁명위원회를 설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왜 모든 쿠데타는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낮은 저개발 국가에서만 일어나는가? 쿠데타가 선진국에서는 일어나지도 않고 쿠데타가 설령 발생한다 하여도 국민들의 저항으로 성공할 수가 없다.

한인 교회에서 유달리 분규가 많이 발생하는 사실은 많은 교인들이 기복신앙과 미신적 신앙에 세뇌되어 개신교 탄생의 주역인 마틴 루터의 저항 정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담임목사가 관련된 분규에는 교인들은 저항하지 않고 대충 은혜롭게(?) 넘어가려 하니 담임목사가 주도한 쿠데타는 성공하기 쉽고 당연히 성공한 쿠데타는 다른 교회에도 영향을 미쳐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끊임없는 한인교회 분규의 실상이다.

게다가 내가 다니는 교회는 분쟁이 없으므로 우리는 타 교회의 분쟁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많은 교인들의 입장이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개별 교회에 대한 분규에 공동 책임 의식을 가지고 분규 방지를 위한 행동에 동참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한인 교회는 교인의 기복적 신앙과 교회 조직 자체의 제도적 미비로 인하여 분규가 발생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영어 이름인 protestant가 의미하듯이, 개신교 신자들은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즉 잘못된 것에는 저항하여야 한다. 저항에는 물론 핍박이 따른다. 성경에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의를 위하여 저항하다가 손해를 보더라도 계속 저항하라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이곳 미국에서도 마틴 루터 킹과 흑인들의 민권 운동을 통한 저항 정신이 없었다면, 우리 한인들도 소수 인종으로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저항을 조직적으로 하기 위하여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필요하고, 기독교개혁실천운동과 같은 시민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기윤실은 분규 방지를 위하여 여러 대안(로스앤젤레스 기윤실이 발행한 <성도여 개혁을 외쳐라> 참조) 을 제시하여 왔다. 가장 중요한 대안은 장기적으로는 교인들의 의식 개혁에 주력하고, 단기적으로는 교회 재정의 투명성 제고에 치중하여야 한다. 재정의 투명성만 유지하여도 한인 교회 분쟁의 80%는 방지된다고 확신한다. 현재 분규가 발생되고 있는 교회들을 보라. 모두 ‘돈'과 결부되어 있다.

기윤실은 교회 분쟁 방지와 개혁을 위하여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의 자각과 협조 없이는 이러한 개혁이 성공할 수 없고 한인 교회의 분규는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제는 뜻있는 교인들과 성직자들이 힘을 합쳐서 한인 교회의 분규 방지와 개혁을 위하여 힘써 노력하여 한인 교회가 사회로부터 우려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허성규 /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샌버나디노 회계학과 교수, LA기윤실 공동대표
* 이 글은 LA기윤실 소식지 4월호에 실린 것으로, LA기윤실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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