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미국은 큰 나라
역시 미국은 큰 나라
  • 한명수
  • 승인 2007.04.29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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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맑은 미국인의 마음과 박애 정신을 통해 받는 큰 감동

조승희 총격 사건에 즈음하여
지난 16일 이른 아침 버지니아 공대에서 한국인 조승희 군에 의해 32명의 집단 살해 사고가 발생하고 자신마저 자신의 총에 자살해버린 33명의 죽음은 미국뿐만 아니라 뉴스를 접한 세계인을 놀라게 한 대형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나는 그날 아침 캐나다 토론토공항에서 버지니아를 가기 위해 덜레스공항을 가려고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버지니아의 총기 난사 사건이 방송의 일상 프로를 중단한 채 계속되고 있는 것에 놀랐다. 

살해범이 처음에는 아시아계라고 하더니 얼마 후에는 중국계라고 하여, 한국인이 아니라는데 조금은 안심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뉴스에서는 한국계 조승희라고 살인자의 국적이 나오는데, 부끄러움을 넘어 일말의 책임감 같은 것이 생겼다. 그러면서 미국 내에서 한국인의 불이익을 걱정해보기도 했는데, 아마도 이것마저 폐쇄된 민족주의적 이기심에 기인했던 것이 아닌가 하여 가벼운 수치심에 젖기도 했다.

해맑은 미국인의 마음
우리들의 격동하는 자세와는 달리 미국 사람들은 버지니아 주지사를 비롯해서, 이번 사건은 인종 문제도 아닐 뿐 아니라 전혀 한국인의 책임도 아니고, 미국 내의 사건이며 한국인들이 죄책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사과해야 할 편은 우리라고 한다. 그런 미국인들의 태도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황당한 감사가 있을 뿐이었다.

같은 학교 학생들의 말 속에도 “네가 그토록 절실했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을 알고 마음 아팠다”던가 “너 같은 이를 다시 만나면 손을 내미는 용기를 갖고 싶다”고까지 했다. 교정에는 조승희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32개의 기념 추모석뿐 아니라 조승희의 추모석까지 합해서 33개의 추모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그 위에는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성조기와 교기가 덮여 있었고, 장미와 백합꽃과 카네이션이 똑같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동에 젖으며 미국인들의 해맑은 마음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때 일이 너무 부끄러웠다
돌이켜 보면 2002년 6월 13일, 그러니까 5년 전 주한미군 2사단 44공병대 소속 장갑차에 의해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신효순, 심미순 양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 한국에서는 이 사건은 우발적 사고가 아닌 고의적 압살 사건이라고 하였고, 미군 당국에서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 앞 광장에 모여든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외치기를 “미국놈 몰아내고 자주권 회복하자”는 등 연일 평화적 촛불시위라고 하여 서울 광화문 거리의 밤을 밝힌 바 있다.

그때 초점으로 논란되어 있던 이슈를 되짚어 보면, SOFA 제22조 3항에 의하면 주한미군이 공무집행 중 저지른 범죄는 미국이 재판권을 행사하고 그 외의 일반범죄는 한국의 재판권 하에 둔다는 조항인데, 이에 대한 해석의 시각 차이도 컸던 게 사실이었지만, 장갑차 운전병의 잘못은 공무집행 중이란 이론에 따라서 미군사 법정에서 무죄 평결을 받은 다음 그해 11월 27일 두 사병은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귀국하였고, 두 여학생의 부모는 각각 2억 원 상당의 보상금을 받고 끝났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저들이 저지른 사고이며 고의성에 의한 압살 사건이니 악의에 찬 만행이니 하면서 연일 촛불시위가 그치지 않았고, 반미 감정이 고조에 달해 외교 마찰까지 일어날 뻔했던 것을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때에 비하면 이번 한국 국적의 소유자 조승희의 총기 살해 사건을 대하는 미국인의 포용성을 지켜보면서, 그때의 일이 너무 부끄럽게만 느껴짐은 나 한 사람만의 생각일까!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이럴 수가 있을까?
만일 조승희 군이 이번 사건처럼 미국 국적을 갖고 있는 미국 학생 하나가 우리나라의 서울 대학이나 그 외의 여타 대학에서 32명의 무고한 한국 학생을 총기로 난사하였다면 아마도 나라가 뒤집힐 만큼 시끄러웠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같아 보인다.

머리카락 노랗고 눈이 새파란 미국 놈이 우리 머리칼 검고 눈알 검은 한국인을 얼마나 무시하고 평소에 멸시했으면 그 같은 만행을 저질렀을까 하면서 온 나라가 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물론 사고 학생의 정신적 배경이나 그 가족의 고통 등은 아랑곳하지 않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2002년 효순이와 미선이 사고 때도 전국적인 시민단체들이 모여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연일 반미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살해된 32명과 함께 살인자의 추모석을 세워주기는커녕, 그의 시체를 불살라 가루를 내어 뿌리고 물에 타서 온 국민이 나눠 마셔도 시원치를 않아서 계속 무슨 행동이라도 나설 법 했을 것이다. 장미와 백합을 그의 추모석에 세워주거나 태극기와 교기를 덮을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것은 미국의 계획된 것이라고 대미 전쟁도 불사할 것이란 행동에 나서지 않을까 상상케 된다.

깊이 돌이켜보아야 할 몇 가지 생각들
첫째, 우리들은 좁은 민족주의에 갇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애초에 아시아계라고 하여 의아했는데, 그 다음 속보에서 중국계 미국인이라 하여 조금은 안심했고, 연이어 터져 나온 뉴스가 한국인이란 것에 경악하면서, 걱정과 함께 미국 안에서의 한국인에 대한 불이익을 걱정했으니, 이것은 좁디좁은 민족주의의 폐쇄성 사고 패턴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를 성찰해보게 된다.

우리들은 그 살해범이 누구이고 어느 나라 사람이건 간에 무고히 죽어간 학생들에 대한 조의를 표하여야 했으며 애도의 정을 먼저 가져야 했었다. 어느 국민이나 나라가 애국적 민족성이 없는 나라가 있으련만, 우리들은 먼저 기독교적 사해동포적 박애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흑백이나 동서양의 민족 갈등이 우리 가슴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인류애를 구현함에는 끝내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자숙해야 할 것이다.

둘째, 미국인의 박애 정신에 주목하고 본받아야 한다. 피해 학생 32명이 아닌 살인범 조승희 역시 같은 피해자란 대열에 앉혀놓고 조종 33번을 울려주고 33개의 풍선을 하늘로 띄워 보내면서 조승희와 함께 그 가족도 우리와 같은 피해자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를 도와주지 못한 우리(미국인)들의 책임이라고 하면서 “네가 그렇게 필요로 했던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참으로 놀라웠다”는 미국인의 박애 정신에 깊은 경의를 표해마지 않다. 역시 미국은 큰 나라이고 미국인은 큰 나라 사람같이 보이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

셋째, 다민족 문화를 수용하고 민족주의의 좁은 울타리를 거둬내야겠다. 이번 사건의 주범인 조승희 군을 한국인들은 이 나라의 국적 소지자이기에 한국인으로 여기지만, 미국인들은 그 반대로 미국에 살고 있기에 미국인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미국인이다 한국인이다 하는 법 이전의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판단하며 다민족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그를 미국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전혀 한국인으로 고려되어 한국에 그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래도 미국에는 인종주의란 시한폭탄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인에게는 민족주의란 폐쇄성이란 장벽이 가로막혀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민족주의란 좁은 개념을 탈피해야 되는데, 이렇게 주장함은 반민족주의 감정이 아닌 세계화 시대에 사는 우리가 넓은 민족주의에 진입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절제되지 않거나 세를 너무 과시하는 민족주의는 도리어 고립을 자초케 된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재론하거니와 2002년 6월에 있었던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 미국을 향한 시민들의 외침을 보면 당장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소란이었다. 그때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불쌍한 효순이 미선이를 위해 시청 앞으로 모이라”, “미국놈 몰아내고 자주권 회복하자”, “월드컵 4강 힘을 보여주자” 등등 살기 섞인 외침은 정말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읽거나 알아보지도 않은 채 감정에 복받침을 억제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절제되지 않은 민족주의의 발로이거나 세를 과시하려는 소영웅주의의 발로라고만 해석하는 외에 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끝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차제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찾고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의 살 길을 세계인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다민족 타 문화권의 이해의 폭을 한없이 넓히고 세계가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여야 한다. 어려움을 당하는 충격적 사건 때는 피아를 가리기 전에 그가 누구든지 희생자 입장에서 바로 생각하여야 하고, 가해자 역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똑같은 피해자임을 생각할 것이란 한없이 넓은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죄의 유무를 떠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구원의 대상인 인간은 결코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가르침에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견지하여야 될 것이다.

동시에 역사의 길목에서 일어나는 사건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음도 깊이 성찰하고, 이번 사건 역시 세기말적 빗나간 그릇된 문화의 표출이란 의미에서 세계인이 눈여겨보아야 하리라.

한명수 / 수원창훈대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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