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방집 예배당], 믿음의 혈통으로 고난의 파고 넘다
[약방집 예배당], 믿음의 혈통으로 고난의 파고 넘다
  • 김종희
  • 승인 2007.05.0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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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여 년에 걸친 배씨 일가의 일대기를 담은 역사 신앙 소설

개인 또는 한 가문의 일대기는 커다란 역사의 흐름과 결코 무관하게 이뤄질 수 없다. 대개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의미를 깨닫지 못할 뿐이다. 흐름을 거스르는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친일파가 대표적인 예이다. 자신들이야 당대에나 후대에나 온갖 호사를 부리고 떵떵거리면서 살아가지만, 그로 인해 뒤틀리고 어그러진 역사는 어찌할 것인가. 개인의 역사와 시대의 흐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호흡을 함께한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축복은 고난의 세월도 기꺼이 감내해내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 경남 김해에서 약방을 운영했던 배성두는 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약방집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그것이 나중에 김해교회가 되었다. (사진 제공 배기호)  
 
홍성사에서 출간한 소설 <약방집 예배당>은 4대에 걸친 한 가문의 일대기이다(출판사는 6대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소설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4대이다). 소설을 채우고 있는 1801년부터 1924년까지 120여 년의 조선 역사는 어떠했는가. 나라의 문을 활짝 열 것인가 문고리를 단단히 틀어쥘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서 조정은 갈팡질팡했다. 쇄국으로 방향을 정한 다음에는 천주교를 믿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박해했고, 동학혁명을 일으켰던 세력들을 무참히 분쇄했다. 미국의 개신교는 조금씩 조금씩 선교의 길을 터갔다. 나라의 숨이 서서히 끊어졌고 결국 일본에 먹혀서 지배를 받게 되었다. 역사의 샛바람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가문도 그 한가운데서 역사와 아픔을 같이했다. 충주 관찰사 배수우는 대문이 12개나 있는 집을 가지고 있을 만큼 부유했다. 하지만 신유박해의 칼춤을 견뎌낼 도리는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난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매던 배수우 부부는 아무 연고가 없는 땅에서 허망하게 죽는다. 홀로 된 배수우의 아들 배광국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김해에 가서 한의를 배워 작은 약방을 운영한다. 양반에서 중인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배광국의 아들 배성두는 아버지의 약방을 이어받는다. 그러나 미국 선교사를 통해 개신교를 접한 그는 약방에서 마을 사람들과 예배를 하고 성경을 공부한다. 약방 운영보다 교회생활과 기도생활에 더 집중했던 그는 김해교회와 합성학교를 세운다(<약방집 예배당>이라는 소설 제목은 여기서 말미암는다).

배성두의 아들 배동석은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인 대구 계성학교와 서울 경신학교를 거쳐 세브란스의전을 다니던 중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항일운동을 하다가 모진 고문과 옥살이 끝에 요절한다. 배동석의 누이동생 배천례는 당시 성행했던 이른바 '사진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시집을 간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초기 이민자들은 피와 땀에 전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다가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한 나라의 질곡과 한 가문의 고난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호흡을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 배성두의 아들로, 김해교회에서 평등사상을 깨친 그는 선교사들이 세운 계성학교, 경신학교, 세브란스의전을 다니면서 민족의 독립에 대한 꿈을 키웠다.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가 5년간 옥고를 치르고 폐결핵을 앓던 끝에 33세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사진 제공 배기호)  
 
소설의 절반 이상은 배동석이 김해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계성학교와 경신학교를 다니면서 젊은 혈기로 일본인들과 싸웠던 일, 훗날을 기약하며 세브란스의전에서 공부하다가 때가 익자 국내 자금을 모아 만주 군사학교와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던 일, 3·1만세운동 때 학생 군중 지도책을 맡고 김해와 마산에서도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일, 재판을 받다가 일본 판사에게 의자를 집어던져 법정모독죄까지 추가돼 10년 형을 언도받은 일, 5년간 수감생활을 했으나 고문으로 인해 쇠약해진 육체에 폐결핵이 덮쳐 가석방 중인 1924년 8월 세상을 떠난 때까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아버지 배성두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강조했다면, 아들 배동석은 아버지가 세운 교회에서 평등사상을 자각하고 몸을 던져 그것을 실천했다. 선조들의 신앙은 이런 모양으로 후손들에 의해서 결이 한층 두터워졌다.

그러나 호흡이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항일운동을 하다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먼저 하늘나라로 간 남편을 대신해 김복남은 어린 두 아들 배대위와 배유위를 대구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외삼촌 밑에서 한약 조제하는 법을 배우게 했고, 이들은 약사가 됐다. 이들 역시 혹독한 일제강점기를 거쳐야 했다. 처참한 한국전쟁도 견뎌야 했다. 배유위의 장남으로 이 소설의 기초 재료가 되는 가문 사료들을 다 갖고 있는 배기호 장로는 이 시기를 '바벨론 포로기' '영적 방랑기'라고 표현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때도 있었고,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배신하는 때도 있었다고 했다.

1971년 미국으로 이민을 온 배기호 장로는 선조들의 믿음을 잘 계승해서 자신의 후손들에게도 그것을 물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출간하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30년이 넘도록 자료를 모으고, 어른들의 구전을 녹음했다. 할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오갔던 중국을 오갔고, 남편 될 사람의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하와이로 향하는 배를 탔던 고모할머니를 만났다.

   
 
  ▲ 선조들의 신앙을 후손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간절함은 배기호 장로로 하여금 자료를 구하는 데 수 십년을 바치도록 만들었다. (김종희)  
 
방대한 자료를 모았으나, 이것으로 글을 써줄 작가를 찾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갖은 곡절 끝에 소설가 박경숙 씨를 만나서 작업을 시작했다. 굴곡한 역사를 살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글로 담아내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기호 장로는 선조들의 역사적인 사실(fact)이 많이 들어가길 원했으나, 작가는 상상력 넘치는 문학적 표현을 선호했다. 책이 출간된 다음 배 장로는 "담고 싶었던 내용이 20%밖에 못 들어갔다"고 아쉬워했지만, 작가 역시 "문학적 표현을 담은 많은 부분들이 싹둑 잘렸다"고 서운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작자는 수십 년간 발이 닳도록 자료를 모았고, 작가는 한 가문의 역사와 한 나라의 역사를 머리에 온전히 담는 노력을 기울인데다가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최대한 결합해서 글을 썼는데, 400쪽짜리 책 한 권에 이들의 노력과 열정이 다 담길 수 있겠는가. 작품은 '더하기'보다는 '빼기'를 통해서 창조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 과정에서 저작자와 작가는 끝없이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 5년 만에 결국 완성됐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속에 가득 찬 간절함과 뜨거움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일까.

선조들의 신앙을 이어받고 잘 물려주려는 배 장로의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큰아버지(배대위)와 아버지(배유위)의 생애, 미국으로 이민 와서 지금까지 이룬 자신의 신앙과 삶을 두 번째 책에 담을 작정이다. 천신만고 끝에 첫 작품을 완성하고 탈진한 작가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기에, 지금 배 장로는 작가를 찾는 일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 자료를 제공해준 배기호 장로와 소설가 박경숙 씨는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함께 작업했다. 중간에 갈등도 빚어서 작업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작품이 완성되고 나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하신 것 같다"고 작가는 말했다. (김종희)  
 
여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미국에서 태어난 두 아들은 우리말로 된 이 책을 읽는 데 작지 않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담긴 그 정서를 똑같이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한국에 있는 번역가를 통해 영어로 옮겼다. 지금은 미국 정서를 담은 표현으로 한 번 더 다듬기 위해 미국인 작가를 찾고 있다. 배 장로의 열정으로 봐서는 영어로 번역된 <약방집 예배당>을 볼 날이 그리 멀지는 않을 것 같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본향을 떠났던 아브라함 가문의 믿음이 예수에게까지 이어진 것처럼, 배씨 일가의 믿음의 혈통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배기호 장로의 소망이 이 소설에 담겨 있다.

   
 
  ▲ 배동석의 독립운동은 1980년이 되어서야 그 공로가 세상에 드러났다. 그해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고, 2004년에 독립유공자로 추대되어 유해가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사진 제공 배기호)  
 
   
 
  ▲ 배동석의 누이동생 배천례는 어린 나이에 신랑이 될 사람의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하와이로 가는 배를 탔다. 사탕수수밭에서 갖은 고생을 하지만, 멀리 떠난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면서 독립자금을 모아서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일에 참여했다. (사진 제공 배기호)  
 
   
 
  ▲ 세브란스의전에 다닐 때부터 옥에 갇혔을 때까지 배동석을 찬자식처럼 돌보아주었던 애비슨 선교사. 그러나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 애비슨 선교사의 실명을 확인하지 못해 이 책에는 레이몬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사진 제공 배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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