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이 [절차탁마 대기만성]에서 드러낸 세 가지 쟁점
도올이 [절차탁마 대기만성]에서 드러낸 세 가지 쟁점
  • 김회권
  • 승인 2007.05.10 10: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올 김용옥의 기독교 및 성서 이해 담론 자세히 읽기 2

도올의 <절차탁마 대기만성> 중 “讀書法과 판본학의 입장에서 새롭게 본 기독교”(65-153쪽)

이 글은 도올이 기독교와 성서에 대해 처음으로 발표한 글이다. 그는 자신의 고전 해석학이 재래적 권위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한다(73쪽). 여기서 도올은 맨 처음 주자(朱子)를 인증하여 이해가 무엇인가를 논한다(67-68쪽). 주자에 따르면 이해란 독자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지 외면적으로 굴러들어온 것이 아니며 독자에게 구유(具有)되어 있는 전(前)이해(pre-understanding)를 통하여 타(他)의 이해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도올은 주자의 '이해' 규정을 하이데거, 가다머, 불트만 등의 "전이해의 자기점검으로서의 이해"와 연결시킨다. 도올은 기독교를 아시아 샤머니즘이라는 과감한 가설을 내세우며 한국 교회는 우리 민족 문화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성황당의 근대적 변용으로 보려고 한다. 한국 기독교의 비상한 발전은 기독교 자체의 샤머니즘적 특성과 한국 전통적 종교 의식 사이에 있는 특수한 친화성이라는 내재적 이유 안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44-145쪽). 한국 기독교의 샤머니즘화 현상은 기독교 자체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도올은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이 글의 목적을 진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따르면, 경전 해석학의 제1목표는 모든 경전 앞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텍스트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그 텍스트에 인간이 부당하게 부과시켜 온 권위를 상대화하자는 것이다. 탈경전주의적 사고를 위한 예비 작업이 경전 해석학인 것이다.

둘째 목표는 모든 경전의 신화적 성격은 철저히 신화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132쪽). 도올은 기독교를 이해함에 있어서 4세기 초 로마제국의 정치적 질서와 타협 후에 라틴 서방을 중심으로 발전한 기독교사의 경험 속에서만 기독교를 바라보아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한다(137쪽).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혼합종교다(138쪽). 조로아스터교(혹은 오르페우스종교)가 영지주의의 할아버지라면, 기독교는 주전 1-2세기 헬레니즘 세계 전체를 지배한 혼합주의적이고 절충주의적인 정신 풍토를 총칭하는 영지주의의 서자 정도라는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에 의거하여 도올은 기독교는 기독교에서 서구 문명의 액세서리들을 탈색시켜버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을 경전에서 해방시키는 해석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52쪽).

이런 '경전 해석학'에 대한 정의를 바탕으로 도올은 신구약 성경의 정경화 역사를 추적해간다(81-96쪽). 그는 여기서 성서 사본학의 발전에 대한 좋은 개관을 제시하고 있다. 아울러 예수가 등장하기 전의 유대교의 네 분파(바리새인, 사두개인, 엣세네파, 열심당)의 특징을 논하며 쿰란 공동체의 지적 영적 분위기에 대한 개관을 제시한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도올이 예수를 넓게 보아 바리새인파에 속한다고 규정하며 마태복음 5:17-18(율법 성취자로서 예수의 자기의식 피력 구절)이 예수 자신의 소박한 자기 이해를 드러낸 것이라고 본다는 점이다(94쪽). 그러나 2007년에 나온 저서들에서 도올은 마태복음 5장의 율법 성취 발언은 예수의 발언이 아니라 마태의 궁색한 변명이라고 단정해버린다.

이 글이 제기하는 최대 쟁점들은 2007년 두 저서에 등장하게 될 쟁점이기도 한데 그것들은 '신구약의 통일성과 신약과의 단절 혹은 연결 문제와 요한복음에 대한 영지주의적 해석'이 그것이다. 도올은 구약성경 해석학 일반에 있어서 가장 큰 핵심적 문제는 통일성과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구약은 통일적인 책이라고 보는 것은 야훼를 주인공으로 해서 일관된 이념성을 부여하면서 구약의 각 책을 해석하는 입장이며(97쪽), 구약은 다양한 책들의 묶음이라고 보는 견해는 시공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저작한 전승들의 집합물로 보는 입장이다(98쪽). 후자는 구약을 다원주의적 유대 민족사의 신앙의 다양한 표현으로 본다.

도올은 구약의 통일성에 대한 강조의 극단이 성서축자영감설이나 절대무오류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구약 해석의 근본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내가 말하는 해석학이 지향하는 태도는 이러한 역사적 다양성을 밝히는 것이다. 이 작업은 문헌 비평을 토대로 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것이 내가 예시하는 판본학 일반의 최대 의미가 될 것이다"(98쪽).

그는 또한 구약성서신학에서 문제가 되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신약과 구약의 관계'라고 주장한다(101쪽). 구약성서가 자신의 말을 하도록 도와주는 비교종교학 방법으로 구약을 연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면서, 도올은 구약은 어디까지나 유대인의 경전으로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한다(101쪽). "구약성서는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는 유대인의 테두리에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일본 민족의 신도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과 같다. 신사참배에 굴욕을 느꼈던 사람들이 왜 야훼 참배에는 그렇게 일고의 반성도 없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102쪽). 이런 극단적인 발언을 통해 도올은 야훼는 분명히 기독교의 신과는 동일시될 수 없다고 말한다(103쪽).

마지막으로 도올은 '신구약 정경화를 촉진시킨 역사적 격변들과 상황 맥락들(재림 지연, 예루살렘 멸망, 이단 발호 등)을 주목하며 기독교 성경의 정경화 과정'을 추적한다(106-153쪽). 그는 근본적으로 초대 기독교 문헌의 정경화는 교회론의 발전과 유관한 우발적 사건이었다고 본다. 보수적인 역사학자들(가톨릭교회가 으뜸)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정경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경을 성립시켰으며 그것은 기독교 이해와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절대적인 제약 조건이나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고 본다. 그 증거는 여러 가지인데, 도올은 두 가지 증거를 들어 초기 기독교의 정경화 결정은 상대적인 결정이었다고 본다.

첫째, 도올은 불트만의 문헌학적 연구가 밝혀낸 영지주의는 요한복음의 결정적인 신화적 구조를 제공했다는 점을 들어, 초대 기독교가 매우 개방적이고 혼합적인 종교라는 주장을 편다. 불트만 요한복음 연구의 핵은 요한복음을 지배하고 있는 로고스 기독론이다(120쪽)(불트만, <요한복음서 연구>, 허혁 역, [성광문화사, 1979]). 도올은 불트만이 요한복음의 신화적 구조 안에서 영지주의 신화의 원형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120쪽). 불트만에 따르면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희랍철학과의 관련성보다는 유대 전통 속의 지혜신화나 이란 인도계의 근동설화들과 더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음이 드러난다(121쪽).

불트만의 영지주의적 관점으로 읽는 경우 요한복음의 빛은 인간에 내재하면서도 원래 인간이라는 비본래적 육체적 자아(soma)에 속해 있지 않으며 그 혈연성이 저 하늘의 신의 나라에서 온 것으로 간주된다. 이 빛의 파편이야말로 본래적 자아이며 넓은 의미에서 감각, 충동, 의지 등의 세상 생활력으로 이해된 혼과 연관된 인간의 특수한 영적 능력이다.

다음 인용구들이 영지주의적 요한복음 이해의 진수를 보여준다. "하늘에 혈연을 둔 자아에 대한 지식, 다시 말하면 자아의 세계에 대한 생소성과 하늘의 혈연성에 관한, 그리고 이 세계에서 구제되는 길에 관한 지식, 이러한 결정적인 인식이 바로 곧 영지 그노시스다"(122쪽). "즉 구원은 하늘에 이르는 길을 인식한 영지자에게 선사되며 죽음에서 자아가 몸과 혼으로 갈라져서 해방되고 하늘의 빛의 세계에 올라갈 때 구원이 제공된다."

이때 영지자의 의식은 두 가지 금욕 혹은 방종을 유발할 수 있다. 육체는 가상적 존재이기에 아무런 도덕적 책임이 없고 육체는 철저한 향락을 통해 학대해도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올도 이 부분이 초기 교부들의 영지주의 비판의 요체였다는 점을 인정한다(희랍 바카스 축제가 방종적 영지주의). 그러나 도올은 실상 문제가 된 영지주의자는 반대의 길, 금욕의 길을 따라갔다고 주장한다. 강력한 종말론적 의식(쿰란처럼)에 젖어, 금욕적 생활을 추구한 것이 영지주의자의 길이었다는 것이다(123쪽).

도올이 소개하는 불트만의 영지주의 대속자 신화는 요한복음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바로 이 점이 정통 형벌대속론적인 그리스도 이해와 충돌을 빚는 부분이기도 하다. 불트만이나 도올 모두에게는 로마서적인 죄 이해(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반역과 저항, 자기주장 의지)가 현저하게 약화되어 있다. 영지주의 대속자 신화에 따르면 구원은 하늘에서 온다. 지고자의 아들이며 그의 모상인 저 빛의 모습은 신에 의하여 다시 파송되어 영지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온다. 그는 잠과 취함에 빠져있는 파편들을 깨우고, 그들에게 그들의 하늘 고향을 회상시킨다(플라톤의 회상이론 상기).

하늘에서 온 빛(중보자적 구원자)은 꺼진 불을 다시 지펴 어둠에 사로잡힌 영들을 다시 출생하도록 돕는다(123쪽). 지고자의 아들은 그들에게 죽은 후에 시작되는 하늘 여행에 관하여 가르치고 비밀의 문구들을 제공하며, 그들은 이 문구들에 힘입어 이 여행의 여러 단계들, 성역들을 지키는 악마의 파수병들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앞서가면서 그 자신, 즉 속죄자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길을 개척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곳 지상에서는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악마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지상의 옷으로 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빛, 구원자는 지상 존재의 고난과 궁핍을 스스로 지고 그가 지상을 고별하고 빛의 세계로 올라가기까지 수모와 박해를 받아야 한다(124-125쪽).

불트만이 요한복음 연구에서 말하는 영지주의적 기독교 신화의 핵심은 종말론이다(134쪽). 불트만이 말하는 종말론은 미래의 철저한 현재화이다. 이러한 초월성의 현재화라는 특수한 신화의 양식을 불트만은 요한복음 저자의 그노스티시즘의 기독교적 변용 과정에서 찾아 그것을 예수의 케리그마의 본질로 파악한 것이다. 즉 요한복음 저자는 기본적으로 영지주의 신화의 우주 드라마의 구조 속에서 예수의 삶을 파악하면서도 영지주의 선악 영육의 철저한 이원론을 종말론적 현재성 속에서 극복하려는 치밀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136쪽).

도올은 영지주의적 요한복음 해석이 정통주의와 다른 점을 인정하면서 정통주의파와 영지주의의 쟁점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영지주의에서는 지고의 신은 이 세계의 창조자가 아니다. 정통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이 유일하시고 참된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모든 창조와 속죄가 같은 신에게서 발생한다.

둘째, 둘은 서로 다른 인간론을 설파한다. 정통 기독교 신앙은 영과 혼이 똑같이 같은 신의 피조물이며 본래적 선재적 빛의 파편이 인간 안에 내재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에 비하여 영지주의는 인간에게 신과 소통할 수 있는 내적 소질인 빛의 파편이 구유되어 있다고 본다.

셋째, 영지주의 그리스도론은 가현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영지주의에서는 육체는 악하고 열등하며, 신의 본질과 거리가 먼 소질이기 때문에 참 신인 예수는 진정한 의미의 육체를 입을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여기서는 예수의 실재적 인간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예수의 인간성은 선재적 하늘 존재를 위한 위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지주의에서는 정통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과 다른 의미의 부활을 말한다. 영지주의에서는 "죽음이 곧 부활이며 빛으로의 환원이다." 예수는 죽은 자들에게(나그 함마디 문서)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고 빛으로 나타난다(124쪽).

영지주의는 일종의 영혼불멸사상인데 비하여 정통 기독교는 영혼 불멸이 아니라 육체 부활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125쪽). 영지주의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의 죽음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낄낄 웃는다(125, 146쪽). 위장된 예수의 가사(假死)를 보고 슬퍼하는 인간의 무지를 개탄한다. 이런 막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도올은 "그렇지만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신과 인간 사이에서의 중보자로서의 자기이해는 기본적으로 영지주의의 대속자 신화의 틀을 빌려온 것임에는 틀림없다"(125쪽)고 주장한다. 경직되고 교조적인 주장처럼 들린다. 도올의 글은 학자적 엄밀성과 교조적 단순화가 어지럽게 결합되어 보일 때가 많다.

이어 도올은 불트만의 문헌학적 영지주의 연구를 결정적으로 확증해준 1945년의 고고학적 발견물인, 나그 함마디 영지주의 문서의 가치를 논한다. 나그 함마디 자료들은 기독교 성서들이 경전화되기 이전의 유동적인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경전화가 성서 및 기독교 이해의 절대적인 제약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특별히 114개의 어록으로 구성된 도마복음서가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모습 재구성에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도마복음서의 예수는 메시아 혹은 신의 아들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지 않고 재림을 강조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와 세리들에 대하여 동정적인 예수는 신국의 임박한 도래만 강조한다(130-131쪽).

1987년에 나온 <절차탁마 대기만성>은 2007년의 두 저서에 등장하는 기본 쟁점들을 이미 다 프롤레고메나 형식으로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신구약의 단절과 연결 문제, 신구약 단절의 표본인 요한복음과 영지주의 문제, 그리고 경전절대주의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기독교 정경화 문제에 대한 쟁변, 이 세 가지 논점이야말로 2007년의 두 저서의 핵심 과제들이 아닌가?

김회권 / 숭실대 인문대 기독교학과 교수
* 이 글은 제1회 인문과학연구소 포럼, '회권, 도올을 깨다'(2007년 4월 24일)에서 저자가 발제한 논문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몇 차례 연재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