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에 남겨진 벨과 린튼 가문의 발자취
한국 근현대사에 남겨진 벨과 린튼 가문의 발자취
  • 강희정
  • 승인 2007.05.10 11:2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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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유진벨 재단의 뿌리(2)

유진 벨과 린튼 가문의 사람들은 대를 이어오면서, 일제의 억압 그리고 해방과 함께 맞은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 등으로 말미암은 아픔과 고통을 한국 사람들과 함께 겪어왔다. 이들은 주로 농촌과 벽지 등 소외된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증거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가장 절실한 필요가 있는 곳에 도움의 손길을 펴왔다. 유진 벨과 린튼 가문의 선대에는 한국의 복음화와 근대화 그리고 인재 양성을 도왔고, 이제 유진벨재단은 북한을 도우며 통일한국의 문을 여는 일을 하고 있다. (기자 주) 

   
 
  ▲ 유진벨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선교사로, 1895년에 한국에 들어와 당시 가난과 일제의 억압으로 고통당하던 조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다. 위 사진은 그가 목회 사역하던 중에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 말 위에 탄 사람이 유진 벨 선교사이다. (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유진 벨 선교사는 나주, 목포, 광주 지역 선교에 힘을 쏟아 당시 호남 지역에 여러 교회가 세워지고 기독교 신자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는 '호남 신학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한다. 유진벨 선교사는 마차를 타고 먼 지역에까지 전도 여행을 다녔다. (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1898년 유진 벨과 그의 일가가 함께 찍은 사진으로,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이 유진 벨 선교사이다.(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유진벨은 선교 사역을 하는 도중에 부인과 아들을 잃기도 하였으나 한국을 떠나지 않고 평생 한국의 복음화에 힘썼다. 위 사진은 첫 부인 로티 위더스픈(1867-1901)과 자녀 헨리와 샬롯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로티 위더스픈은 심장병에 걸렸으나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남편이 전도 여행하는 중에 홀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유진 벨은 1904년 마가렛 벨(Margarlet W. Bell)과 재혼했으나, 마가렛 벨은 1919년 3월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광주로 돌아오다가 병점역에서 열차와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위 사진은 두 번째 부인인 마가렛 벨 및 자녀들과 함께 찍은 장면이다. (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내정 간섭이나 문화 충돌을 피하면서 교육과 의료 사역에 주력했다. 유진 벨은 호남 지역에 여러 학교와 광주기독병원을 세웠다. 그는 호남 지방 선교에 헌신하다가 격무로 건강이 악화되어 1925년 9월 28일 57세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묘역에 안장되었다. (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유진 벨이 세웠던 수피아여고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전교생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교사 2명과 학생 21명이 옥고를 치렀으며,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37년 9월에 폐교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복교되었다.  위 사진은 수피아여고에 있는 배유지 기념관의 모습으로, 배유지는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식 이름이다. (출처 수피아여고 홈페이지)  
 

   
 
 

▲ 윌리엄 린튼은 미국 조지아 주 출신의 선교사로 캔자스 출신이었던 유진 벨과 마찬가지로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되어 한국에 들어와 군산과 전주를 중심으로 선교 사역을 펼쳤다. 위 사진은 윌리엄 린튼과 그의 아버지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윌리엄 린튼의 부친은 농장 경영으로 큰 부를 쌓았지만 남북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한다. (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샬롯 벨과 결혼한 윌리엄 린튼은 교육 사업에 주력하여 전주 기전여고와 전주 신흥고에서 교장으로 재직했다. 신흥고에 재직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미국으로 추방당하기도 하였다. 샬롯 벨과 윌리엄 린튼의 결혼으로 두 가문의 연합 사역이 이루어진다. (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윌리엄 린튼 부부는 해방 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왔으며, 대전에 한남대학교(HNU)를 세워 해방 후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젊은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위 사진은 윌리엄 린튼이 세운 한남대학교(당시 대전대학, 1956년에 설립)의 초창기의 모습이다.(출처 한남대학교(HNU) 홈페이지)

 
 

   
 
 

▲ 윌리엄 린튼의 아들인 휴 린튼은 자신의 부모와 외조부처럼 선교사가 되어 로이스 린튼과 결혼한 후 전라남도 섬 지방과 벽지에 많은 교회를 세웠다. 검정 고무신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정도로 검소하고 소박한 자세로 전라도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위 사진은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의 결혼식 사진이다. (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휴 린튼의 부인 로이스 린튼은 1960년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나면서 결핵이 만연해지자,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우는 등 결핵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하였다. 이 공로로 1996년에 호암상을 수상하였으며, 이때 받은 상금 5,000만 원으로 북한에 앰뷸런스를 기증하였다. 위 사진은 로이스 린튼이 세운 순천기독결핵요양원의 모습이다. (출처 순천기독결핵요양원 홈페이지)

 
 

   
 
  ▲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의 둘째 아들 스티브 린튼은 1995년에 자신의 외증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시작 100주년을 기념하여 유진벨재단을 설립하고 북한 식량 지원 및 의료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위 사진은 큰물 피해를 입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할 때의 모습으로 1996년에 찍은 것이다. (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유진벨재단 이사장 스티브 린튼은 자신의 어머니가 남녘 땅에서 평생을 봉사해왔던 결핵 퇴치 사업을 밑거름으로 하여 현재까지 10여년 동안 북녘의 동포들을 위해 결핵 퇴치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위 사진은 스티브 린튼 유진벨재단 이사장이 문덕군 결핵요양소의 환자들을 방문하고 있는  장면으로 2004년에 찍은 것이다.(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재단법인 유진벨(한국)
서울 마포구 서교동 395-166 서교빌딩 605호 (122-740)
전화: 02-336-8461  팩스: 02-3141-2465

Eugenebell Foundation (미국)
P.O. Box 5099 Hasienda Heights, CA 91745-0099
Tel: 626-824-8211, Fax: 951-769-5879
홈페이지 : www.eugenebel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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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 2011-08-15 22:00:11
린튼 가문은 아마 예수님이 한국땅에 오신다면 '내가 이방인중에 이만한 '한국사랑'을 보지 못하였으니라'는 뭐 그런 칭찬을 하셨을지도 모르는 가문입니다. 린튼(인씨) 가문의 사람들... 한국사람이나 진배없는 사람들이지요. 소리없이 북한 전역에서 결핵퇴치 사업을 하는 일로 생을 바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리나 개나 안티운동 하는 분들의 야그에 너무 신경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jestme2300 2011-08-15 20:02:43
맨위말타고 선교사님들이 계시는 사진은 안티들이 문제를 줄곧 삼아온 사진인데 올려놓으신것 보니 이상한 느낌이 드네요....뉴스앤조이?..1895년 그때의 시대적인 배경정도는 우리 국민들이 되돌아볼수 있는 역사의식 수준이 되있을 싯점에나 필요하느 사진이니까요. 요즘 아프리카 셀파처럼 정당한 수고의 댓가를 지불했음을 표기하시밍 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