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죽인 범인 용서한 한국인 부모, 미국인들에게 감동
아들 죽인 범인 용서한 한국인 부모, 미국인들에게 감동
  • 박지호
  • 승인 2007.05.23 23: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인호 기념 장학 사업 지속…이스턴대학 해마다 추모 행사

   
 
  ▲ "To Turn Sorrow into Christian Purpose"(슬픔을 기독교적 소망으로) 오인호 씨의 묘비명이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들을 위해 선처를 호소한 오 씨의 부모님이 보낸 편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박지호)  
 
지금부터 꼭 49년 전인 1958년 4월 25일 금요일 밤 9시경 펜실베이니아대학 주변 해밀턴 거리 36가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인 유학생 오인호 씨(당시 26세)가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기 위해 집 앞에 있는 우체통으로 다가가는 순간 근처에 숨어 있던 흑인 불량배들이 달려들었다.

11명의 불량배들은 오 씨를 에워싸고 주먹과 발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철사가 달린 블랙잭이란 흉기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자 살점이 뜯겨져 나갔다. 콜라 병을 깨뜨려 몸을 찔렀다. 정신없이 맞은 오 씨는 비명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창밖을 내다본 이웃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오 씨는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 씨가 머물던 작은아버지 오기항 목사의 집을 나선지 5분 만에 벌어진 일이다. 범인들은 근처 교회에서 열리는 청소년 댄싱 파티 입장료 35센트를 마련하기 위해 이런 짓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 사건 발생 이틀만에 범인들이 붙잡혔다. 이들은 근처 교회에서 열리는 청소년 댄싱 파티 입장료 35센트를 구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 (사진 제공 오인호기념코리아센터)  
 
다음 날 아침 이 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언론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일제히 머리기사로 다뤘다. 시민들은 35센트 때문에 사람을 죽인 범인들의 비인간성에 경악했고, 폭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이들의 잔혹함에 분노했다. 신문마다 “cold-blooded”(냉혈한), “brutal”(잔혹한), “heartless”(무자비한) 등의 수식어를 써가며 범인들을 비판했다. 여론도 들끓었다. 범인들이 비록 청소년들이지만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만 갔다. 검찰도 중벌을 내리기로 유명한 검사를 배정했다. 당시 재판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배심원들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11명 중 3명이 살인 혐의로 유죄를 선고 받았다.

   
 
  ▲ 사건 발생 3일 후에 열린 오인호 씨의 장례식.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조문객이 방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가장 오른편에 서 있는 사람이 필라델피아 시장이다. (사진 제공 오인호기념코리아센터)  
 
시민들은 오 씨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안타까움과 분노를 표했다. 오 씨의 장례식에 참석한 필라델피아 시장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필라델피아 시장에게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오 씨의 아버지인 오기병 장로가 한국에서 보낸 편지다. 아들을 죽인 범인들에게 최대한 관대한 판결을 내려줄 것과, 이들을 위해 가족들이 모금한 돈 500불을 보내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승화시켜 기독교적 소망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 인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고, 큰 충격과 비탄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살인자들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과 인간성 마비에 대해서도 슬프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인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족은 가족회의를 열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관대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청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희생자 본인과 그의 가족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습니다."

"… 교육적 빈곤이 살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은 이들이 석방된 뒤에 직업 교육 및 사회 적응의 목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기금을 적립하기로 했습니다. … 이것은 죽임을 당한 이와 죽인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며 우리를 기독교적 사랑과 친교 안에 연결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다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성령으로 우리의 소망을 밝혔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미국 국민들과 특히 우리의 피붙이인 아들을 죽게 한 이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기병(오인호 씨 아버지) 올림.

오 장로의 편지로 미국 사회는 다시 한 번 들썩였다. 당시 언론들은 아들을 죽인 원수를 향해 용서와 자비의 손을 내미는 오 씨의 부모를 주목했다. 5월 2일자 <The Evening Bulletin> 신문에는 “To Return Good for Evil”(악을 선으로 갚다), “In Ho Oh's Parents to Give $500 to Help His Slayers”(아들을 죽인 살인자들을 위해 500불 기부한 오 씨의 부모님)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실렸다. 뉴욕 <가이드포스트>도 4면에 걸쳐 오 씨와 그의 가족에 대한 기사를 담았다. 당시 언론들은 “미국에서 500불은 큰돈이 아니지만, 한국에서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2센트~35센트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오 씨 가족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라며 오 씨의 가족이 보여준 용서에 대한 진정성을 높이 샀다.

   
 
  ▲ 오인호 씨의 아버지 오기병 장로(왼쪽)와 어머니 한신현 권사(오른쪽). (사진 제공 오인호기념코리아센터)  
 
필라델피아 시에서는 유가족을 위해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 오 씨의 시신을 한국으로 송환키로 했다. 그러나 오 장로는 오히려 아들을 미국 땅에 묻기 원했다. 아들의 무덤을 통해 미국 국민들이 교육적 빈곤이 청소년 범죄의 일차적인 원인임을 자각하고, 청소년 교육의 책임성을 절감토록 하기 위해서다.

오 씨의 죽음 이후 필라델피아 시에서는 ‘오인호 기념 장학금’을 마련해 장학금을 모금했다. 그 장학금으로 두 명의 한국 학생이 펜실베이니아대학에 입학해서 박사 학위 과정까지 마쳤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들도 160만 불이 넘는 기금을 모금해 숭실대학교에 전달하고, 일부는 적십자사에 사회복지기금으로 기부했다. 1962년에는 미국 장로교회가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An Epistle from Koreans’(한국에서 온 편지)라는 영화를 만들어 5,000곳이 넘는 미국 교회들에서 상영했다. 범인 중 한 명은 훗날 오 씨의 부모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오 씨와 함께 살았던 작은아버지 오기항 목사는 사건 이후 이 비극을 어떻게 기독교적 소망으로 승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도 상의했다. 한국에 있는 오 씨의 가족들은 범인들을 돕고자 했으나 흑인 커뮤니티에서 이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거론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결국 가족들이 사재를 들여 ‘오인호 기념 코리아 센터’를 건립하고 어떤 형태로든 오 씨의 가족들이 보여준 사랑의 정신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오 목사 부부는 월세가 100불 정도 하던 낡은 집을 구입해서 개조했다. 그곳에서 미국인들과 문화 교류를 가졌다. 한국인들과 미국인들이 함께 어울리며 교제하는 친선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의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이 모임은 기도 모임으로 발전해 80년대 후반까지 30여 년간 이어졌다.

센터는 또 당시 극소수에 불과했던 재미 한국인들을 섬기는 일에도 뛰어들었다. 한국이 가난하던 시절이었기에 유학생들이나 교포들의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몸이 아프거나, 당장 생활비가 없거나, 급한 일을 앞두고 교통편이 없어 발을 굴러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자동차가 없는 유학생들을 위해 교통편을 제공하는 봉사활동을 벌였고, 머무를 곳도 없이 미국으로 건너온 유학생들을 재우고 먹이는 일도 했다. 학비가 떨어져 무작정 찾아온 학생에게 학비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실수로 임신한 사실을 알고 한국에서 모든 지원을 끊어버려 오갈 데 없었던 여학생을 맡아서 태어난 아기와 여학생을 돌보기도 했다.

   
 
  ▲ 센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던 오 목사가 작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오인호 기념 센터’는 멈춰있다. 건물은 잠겨 있고, 센터 앞 공터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박지호)  
 
70년대에는 한인 1·5세와 2세들을 위해 한글학교를 열어 한글을 비롯해 한국 문화와 전통을 가르쳤다. 90년대에 들어서는 이민자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법률 서비스와 의료 서비스를 펼쳤다. 아시아법률센터를 설치해 한국인뿐 아니라 아시아계 이민자들에게 무료 법률 상담 서비스를 제공했다. 밀입국하다 적발되어 유치장에 갇힌 중국인들을 위해 영주권 취득을 도와주기도 했다. 2년 이상 걸린 프로젝트를 무료로 진행했다. 또 치과 진료 봉사도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과 선교사들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센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던 오 목사가 작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오인호 기념 센터’는 멈춰 있다. 건물은 잠겨 있고, 센터 앞 공터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건물에는 30개가 넘는 방이 있지만 나서서 센터를 이끌 사람이 없어 그냥 두고 있다. 얼마 전엔 도둑까지 들어 센터에 있던 물건들을 훔쳐갔다. 남편을 여의고 홀로 남은 김자영 사모가 가끔 둘러보긴 하지만 몸이 불편해 거동마저 힘들기에 관리조차 버겁다.

   
 
  ▲ '오인호 씨 추모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이스턴대학교 도서관에 전시된 오인호 씨에 대한 자료를 읽고 있다. (박지호)  
 
오 씨가 펜실베이니아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다녔던 이스턴대학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 씨의 희생과 그의 가족들의 기독교적 정신을 기리고 있다. 사건 발생 후 이스턴대학은 ‘오인호 장학금’을 만들었다. 또 도서관에 오인호 기념 컨퍼런스 룸을 만들어 매년 오 씨가 사고를 당한 4월을 전후해 추모 행사를 가져왔다. 지난 5월 12일에도 도서관에서 추모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오 씨의 유족들을 비롯해 30여 명의 미국인들이 참석했다.

한인 사회와 교회에서 오인호 씨는 아직도 낮선 이름이다. 그의 가족이 보였던 사랑과 용서의 정신도 낯설다. 오인호 씨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서울대학교 재학 당시 기독학생협동관 <협조의 벗>에 기고한 글을 소개한다. 50년 전 한국 교회를 향한 그의 일갈이 아직도 유효한 까닭이다.

   
 
  ▲ 오인호 씨. (사진 제공 오인호기념코리아센터)  
 
“변하는 사회와 시대 속에서 교회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탓함은 그 변함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 변함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까닭에서다. 교회는 믿음과 사랑의 집단이 되고, 사회의 등불과 양심이 되고, 죄악과 불의에 대한 총탄과 방패가 되며, 사회의 복음화와 질서를 위한 남모른 제물이 되며, 빛과 생명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임을 몰각하고 교파와 세력 다툼과 자기기만에 빠져들고 있다. 교회의 존재의의는 내로는 교회 자체의 순결을 꾀하고 외로는 복음 전파에 있다. 어느 교회나 이런 일들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 자체의 이익과 확장만을 위한다.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서만 노력한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는 믿지 않는 중생하지 못한 인간 그대로의 확대임에 불과하며, 이는 그 변해야 할 심장부의 변화가 없는 교회가 된다."

"그러나 외적인 것보다 먼저 내적인 변화야말로 교회의 성화와 사회의 복음화와 및 교회의 세속화와 사회의 반신화를 막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이 일은 어느 그룹이나 신학자와 교역자의 독점사는 결코 아니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지워진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신학자나 목사가 되라고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자 사랑으로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했으니 우리들은 먼저 참된 그리스도의 종이 되며 사랑의 화신이 되어 기도와 연구와 실천에 온 힘을 다하는 벗이 되고 그릇된 꿈과 환상을 버리고 실천과 위기에서 살며, 자체가 요나의 이적 십자가의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