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확 뒤집으려는 바퀴벌레들의 출현
세상을 확 뒤집으려는 바퀴벌레들의 출현
  • 김종희
  • 승인 2007.06.02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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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인 클레어본의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심플웨이' 공동체 이야기

위험한 제목

   
 
  ▲ 규장에서 발간한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의 원서 제목은 (Zondervan)이다. (사진 제공 규장)  
 
출판사는 이 책의 제목을 정할 때 한국 기독교인들의 반응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일까.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규장)는 제목부터 위험해 보인다. 믿음은 마음과 머리로 동의하고 입으로 시인하면 되는 것이지 무얼 행동으로 증명한다는 것인가. 혹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거부하고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행위구원론’을 설파하는 책은 아닐까 오해받기 십상이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의 친형제 야고보가 아니다. 누군가가 그의 권위를 빌려서 쓴 것이다”고 하거나 “야고보서는 정경으로서 보기에는 근거가 약하다”고 하는 말에는 득돌같이 달려들 것이 틀림없지만, 정작 야고보서 안에 담긴 “너는 말로 네 믿음을 주장하고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드러낸다. 어느 것이 죽은 믿음이고 어느 것이 산 믿음이냐”는 일갈에는 애써 눈을 막고 귀를 덮고 입을 다무는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 차고 넘치는 것이 현실이다.

하긴 원서 제목도 위험하긴 매일반이다. <Irresistible Revolution>(Zondervan), ‘거역할 수 없는 혁명’이다. 쿠데타를 일으켜 로마 체제를 전복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려 했던 정치 혁명가로 예수를 묘사하고 추종하는 급진 좌파 세력들의 논리를 담고 있는 책은 아닐까 의심받을 만하다.

교회가 창녀라니

본문으로 들어가면 위험해 보이는 표현들이 지뢰밭처럼 깔려 있다.

우선 기존의 교회들을 비양하는 듯한 표현들이 많다. “교회는 창녀다”, “교회는 악취가 풍긴다고 해서 밖으로 뛰쳐나갈 수도 없는 노아의 방주와 같다”, “무거운 죽음의 기운이 교회와 예배를 휘감고 있다”. 비록 다른 사람의 표현을 인용했지만 쉐인 자신의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어린 시절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교회 생활을 했던 그는 성장하면서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의 현실 사이의 간격이 한없이 깊고 넓은 계곡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고민한다. 하지만 그는 교회가 아무리 창녀같이 더럽혀져 있더라도 변함없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어머니라는 어거스틴의 말을 지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러므로’ 더 사랑해야 할 존재가 교회이다. 교회에 대한 그의 애증은 책 곳곳에 스며 있다.

교회에서 예수의 생명력은 온데간데없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에서 1년간 경험을 쌓기로 했다. 이 교회의 ‘구도자를 위한 예배’를 한국 교회가 무분별하게 복사하면서 선풍적 인기를 구가했던 곳이다. 불신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도록 예배당에 십자가도 세우지 않았다. 예배당에 십자가 없는 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쉐인의 눈에는 십자가의 정신마저 어디론가 내버린 것만 같다.

세련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만남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안한 자를 편안(평안)하게 하시고 편안한 자를 불안하게’ 하시는 분인데, 이곳의 편안한 사람들은 별로 불안한 것 같지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부유한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들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구도자를 찾아나선 교회의 한계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태도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부유한 신자들이 보기에는 구도자에게도 등급이 있었던 것이다.

1971년 김지하는 희곡 ‘금관의 예수’를 통해 예수에게 황금 왕관을 씌우고 박제로 만들어버리고 말을 빼앗아버린 당시 교회의 현실을 통렬히 비판했다. 미국도 사정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쉐인은 시장에 멋진 상품으로 내놓은 예수를 거부한다. 예배당을 장식하는 유리그림 속에 갇힌 예수가 유리를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오기를 고대한다. 살아서 펄펄 뛰는 예수를 몸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철딱서니 없는 반미주의자

   
 
  ▲ 개구장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쉐인. 그는 지금도 곳곳을 다니면서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는 '바퀴벌레'들을 만나느라 바쁘다. (사진 제공 심플웨이 공동체)  
 
철딱서니 없는 반미주의자는 대한민국 캠퍼스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미국에도 있었다. 그는 분명히 반미주의자다.

쉐인의 눈에 미국은 모순덩어리다. 낙태에 대한 보수 기독교와 정치권의 태도를 보라. 뱃속에 있는 생명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존엄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미국이 세계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을 보라.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생명은 무참하게 짓밟는 데 손톱만큼의 주저함도 없다. 미국이 경제적으로 부자가 된 것은 한국의 윤똑똑이들이 곧잘 하는 말처럼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을 대량으로 죽이는 무기 장사를 무척 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림의 문화가 만개한 곳이 아니라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내리누르고 있는 곳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미국에서 작은 피자 가게를 운영하는 아프가니스탄 주인은 공포에 떨면서 “저희는 하찮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바퀴벌레와 같아요. 그들(미국)이 큰 발로 짓밟을 겁니다” 하고 말하자 쉐인은 “그렇지만 우리가 많잖아요. 바퀴벌레가 많으면 주인이 밖으로 안 나가고는 못 배길 거예요” 하고 대꾸한다. 옆에 있던 친구들도 깔깔 웃으며 맞장구를 친다.

이 고약한 바퀴벌레들 때문에 도망쳐야 할 집 주인은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저지른 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 낡은 사고방식과 곰팡내 풍기는 편견을 고수하려는 고집 센 사람 들이다. “하하, 우린 바퀴벌레 같은 존재들이랍니다. 하지만 우리 때문에 쫓겨나는 저 인간들은 바퀴벌레만도 못 하지요.” 이렇게 약을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교회를 창녀라 하더니 예수를 노숙자라 하네

현실 교회를 비판하고 미국의 외교 정책을 비난하는 것은 어느 정도 너그럽게 이해해준다 해도, 신학적으로 수상한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쉐인은 용납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 같다.

“예수께서 켄싱턴의 교회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위험한 동네 중에 하나로 꼽히는 켄싱턴에서 오갈 데 없는 일단의 노숙자들이 한 성당에 자리를 잡았고, 성당 관리인들이 이들을 쫓아내려 하자 쉐인과 그 악동들은 ‘노숙자=예수’라는 식으로 학생들을 선동했다. 한국의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예수’라고 하는 걸 보고 경악했던 사람들은 한국에서 다 죽은 줄 알았던 민중신학이, 남미에서 씨가 말라버린 것으로 알았던 해방신학이 미국 한복판에서 부활하는 것으로 알고 또 한 번 경악할지 모른다.

그는 입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사람들 말고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디트리히 본 회퍼, 마틴 루터 킹, 오스카 로메로, 심지어는 도로시 데이와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들을 찾아나섰고, 급기야는 인도 캘커타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다 해도 이들의 머릿속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어디나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이 보기에 위에 언급한 이들은 성직을 빙자해 인권운동을 하고 사회주의운동을 하고 종교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의 행함이 어떠하든지 그들 머릿속에 있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쉐인 같은 친구는 종교로 위장한 행동주의자에 불과할지 모른다.

기존의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때려부수자는 얘기가 전부인 책을 한국의 유력한 기독교 출판사가 발간했을 리가 만무다. 비판은 나름대로 분명한 기준을 갖고 있다. 그건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 말씀이다.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도 아니다.

   
 
  ▲ 쉐인 클레어본의 미소 띤 모습. (사진 제공 심플웨이 공동체)  
 
믿음, 말로 증명할래? 행함으로 증명할래?


이 책은 번역된 제목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행함을 얘기한다. 그것도 그냥 행함이 아니다. ‘끝장토론’이라는 말처럼 ‘끝장실천’이다. 그것도 거의 ‘문자근본주의’에 가까운 실천이다. 마치 성경의 글자는 일점일획의 틀림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남들처럼 입씨름질을 하기보다 몸으로 증명해보이겠다는 태세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천사를 대접한다’는 말 때문에 학교 기숙사에서 자는 것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노숙자들을 찾아서 어둡고 위험한 필라델피아의 밤거리를 쏘다닌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는 말 때문에 노숙자 가족들을 보호하는 일에 나서서 그들과 같이 먹고 같이 잔다. 인도 캘커타로 가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가운데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씀과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의 뜻을 깨닫는다.

성경에서 예수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병자를 고치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셨다. 그것은 예수의 능력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 반쪽짜리 능력이다. 나사로는 다시 죽었을 것이고, 병자도 언젠가 또 다른 병에 걸렸을 것이고, 굶주린 이들은 다시 굶주렸을 것이다. 그건 능력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었다. 지금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원하는 것은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세요”이다. 쉐인은 그렇게 살고 싶었다. 사랑이 넘치는 곳에 죽음의 권세는 기를 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캘커타가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바로 캘커타임을 깨닫는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캘커타가 어디서나 쉽게 보인다. 감각을 잃어버려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나병을 캘커타에서 경험했듯이, 지금의 미국이 바로 나환자와 똑같이 탐욕의 깊은 늪에 빠져 있으면서도 무감각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로’ 다짐했다.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길 좁은 문을 택하기로’ 했다. 꼭 10년 전 1997년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인 켄싱턴으로 6명이 이사했다. 그들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를 꿈꾸면서 심플웨이(Simple Way)를 만들었다. 아수라판과 같은 동네를 가꾸기 시작했다. 공동체 멤버들은 재정을 공유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곳을 방문했다. 마사지 치료사는 노숙자들의 지친 발을 씻겨주었다. 미용사들은 혼자 사는 노인들의 거친 손톱을 손질해주었다. 의사 간호사들은 무료 진료소를 개설했다. 변호사들은 법률 지원을 해주었다. 이 책에 쓰인 내용, 심플웨이 홈페이지에 나온 내용, 수많은 언론에 소개된 쉐인을 여기에 다 담을 도리가 없다. 그럴 맘도 없다.

왜냐하면 일일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사역을 말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능력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대로 사랑을 고백하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몸으로 실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04년 쓰나미가 휩쓴 동남아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입양하고, 2005년 카트리나가 미국 남동부를 강타했을 때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누가 내 모친이고 동생이냐.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고 자매고 모친이다’는 말 때문이었다. 하루도 끊임없이 폭탄이 터지는 이라크로 간 것도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성경에 써 있는 말씀대로 단순 무식하게 실천하고 있다.

성경은 정말 위험한 책인가

   
 
  ▲ 쉐인과 친구들이 10년 전 세운 공동체 심플웨이(Simple Way) 홈페이지에 나오는 그림.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곳으로 유명한 켄싱턴 거리에서 아이들이 평화롭게 놀고 있다. (사진 제공 심플웨이 공동체)  
 
쉐인의 말대로 성경은 위험한 책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 때문에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죽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성경은 위험한 책인가. 성경에 쓰인 말씀을 따라 살려다가 매 맞는 사람이 있나, 욕먹는 사람이 있나, 옥에 갇힌 사람이 있나, 죽은 사람이 있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 예수를 몸으로 따르는 사람은 ‘대장간에 칼이 논다’는 말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세상은 우리에게 성경이 진리임을, 하나님 말씀임을 말로 말고 행함으로 보여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기독교가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말의 상찬만 잔뜩 늘어놓기 때문에 성경은 ‘그저 괜찮은 고전 중에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대로 실천하려고 몸부림쳤던 살아 있는 기록인 이 책 역시 위험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읽는 이들로 하여금 무척 부담스럽고 곤혹스럽게 만드는 아주 고약한 책이다.

번역서에는 없지만 원서에는 심플웨이처럼 대안을 만들어가는 수많은 공동체와 단체 목록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쉐인이 말한 것처럼 바퀴벌레들이 여기저기에 기어나오고 있다. 미국의 기성 기독교가 서서히 화석처럼 굳어가고 있지만, 이 바퀴벌레들이 미국의 기독교를, 미국 사회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혁명’(Irresistible Revolu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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