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가 허무주의 (Ghetto Nihilism)
빈민가 허무주의 (Ghetto Nihilism)
  • 이태후
  • 승인 2007.06.09 2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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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교민들에게 우리 동네 얘기를 하면 가끔 이웃들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듣는다. "그렇게 위험한 곳에 사세요? 흑인들은 일은 안 하고 왜 그렇게 게으른지 몰라요. 지저분하기는 어떻고. 무섭지는 않은가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조심하시지요." 딴에는 나를 위해서 하는 말들이지만, 듣는 내게는 상당히 귀에 거슬리는 내용들이다. 그런 분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나라의 흑인들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함부로 평가를 합니까?"

그런 부정적인 평가 뒤에는 소위 '모범적인 소수민족 이민 집단'이라는 미국 정부의 인정에 으쓱한 자아도취적 오만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70년대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민의 물살을 타고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이민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포대기에서 양은 냄비까지 챙겨넣은 이민가방을 끌고, 주머니에 겨우 정도 지니고 미국에 도착한 이민 1세들. 영어도 안 되고 가진 것도 없지만, 새벽시장부터 시작해서 야채를 다듬고, 평생 적도 없는 프레스 기계를 만져가며 바닥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부럽지 않게 사는 성공한(?) 이민자들이 되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나라에 사는 흑인들이 빈민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없이 말도 통하는 이민자들이 해냈으면, 흑인들은 쉽게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 상당수의 교민이 갖는 단순한 생각이다.

그런데 우리 교민들이 쉽사리 간과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이나 개인의 능력보다 노력하면 나은 삶을 있다는 희망, 그리고 희망을쳐줄 있는 사회 안전망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좀 더 쉽게 풀어보자 한국에서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아서였건 혹은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었던,  이민을 결정한 후,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태평양을 건너 모두들 나름대로 비장한 각오로 비행기를 탔다. 대개의 경우 미국에 오기로 결정한 것은 누구에게선가 전해 들었던 이민 성공 신화 때문이다. 고생을 만큼 누릴 있다는 공평한 사회에 대한 . 하나 감고 고생하면 아이들만큼은 좋은 교육을 받고 주류 사회에 진출할 있다는 황홀한 . 하나에 의지해 많은 이들이 몸으로 미국에 왔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이민 생활을 혼자 시작한 사람은 거의 없다. 김포공항을 떠날 때는 달랑 일가족만 비행기를 탔지만, 미국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민자들은 남의 도움으로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입국심사대를 지나자마자 이미 한국에서부터 지연, 학연의 연줄을 통해 연락이 지인이 맞아주어, 낯선 땅에 내동댕이쳐진 신세는 면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들은 공항에서 전화번호부를 찾아 한인 교회에 전화를 했고, 전화를 받은 목사님들에게는 공항에 나가 한국에서 이민 가족을 환영하는 것이 이민 목회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집을 구할 때까지 아는 분의 집에 기거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당연한 절차로 여겨졌고, 오자마자 아는 친지의 사업장에 나가 생활비도 벌고 일도 익혔다. 그래서 이민 사회에서는 처음 이민 와서 만난 사람의 직업이 직업이라는 농담 아닌 말이 생기기도 했다. 전혀 친지나 연고가 없으면, 교회를 통해 장로님이나 집사님의 도움으로 일을 익히며 이민 생활에 적응했다. 지금도 다를 바가 없긴 하지만, 특히 초창기 이민 교회는 이민 가정이 미국 생활에 정착할 때까지 교통·직업 알선·주택 마련·자녀 교육 생활의 모든 면에 도움을 주었다.

그래도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빈주먹으로 시작했다고 내세울 있을까? 비록 수중에 지닌 돈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초창기 이민자들은 미국 대도시 어디에서나 찾을 있었던 교민 사회를 통해, 화폐가치로 환산할 없는 사회 안전망의 혜택을 누렸다. 먼저 온 성공한 이민자들의 격려를 통해 "나도 할 수 있다"는 꿈을 잃지 않고 힘든 이민 생활을 견뎌낸 셈이다.

   
 
  ▲ 우리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 콘크리트 바닥에 시설도 낡은 열악한 환경이다. (이태후)  
 
그런데, 도시 빈민가에 사는 흑인들에게는 우리 교민 사회가 당연히 여기는 사회 안전망이 거의 없다.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은 거의 떠나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들만 남은 빈민가. 우리 동네 통계를 보면 25 이상 성인 가운데 고졸 학력을 지닌 사람이 32%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일자리들이 고등학교 학력을 요구하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취업의 가능성이 아주 제한된다. 가능한 일자리는 일용직이나 저임금의 노동직. 그러니 쉽게 돈을 있는(?) 마약 거래나 조직이 청소년들에게 현실적인 대안처럼 보일 밖에.

우리 동네에는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 많은 아버지들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거나, 관련 사고로 죽었거나, 어디에선가 마약 거래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하루 하루 고달픈 삶을 연명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감옥 사역을 하는 분들에 의하면, 감옥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만나는 경우는 흔하고, 가끔 삼대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 빈민가. 그 흔한 연줄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땅. 남자 아이들에게 꿈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미식축구 선수나 농구 선수가 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여자 아이들은 모델이나 가수. 그럴 밖에. 빈민가에서 성공한 경우는 거의 운동 선수 아니면 연예인으로 나선 경우이니.

아이들이 바라볼 역할 모델이 없으니, 한인 이민 사회 같은 교육열이 있을 수 없다. 국민학교를 졸업해도 절반 이상이 제대로 글을 읽고 쓰지 못하고, 50% 이상이 고등학교를 중퇴하는 교육 체계는 학생들을 성공적인 삶이 아니라, 패자의 삶으로 몰아넣는 실패한 제도가 되었다. 가끔 아이들이 공부라도 할라치면, "공부는 해서 뭐하게? 니가 백인인지 착각하니? 너는 흑인이야 (N-word)!" 라는 비냥거리는 소리를 친구들에게서, 심한 경우는 가족들에게서 들어야 한다.

"나는 대학을 못 갔지만, 너만은 대학을 가야 한다" 이세 교육에 헌신한 이민 1세들의 노력으로 한인 2세들은 이미 미국 주류 사회에 친출했지만, 아무런 격려와 도움을 받지 못하는 빈민가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낙오자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다. 만일 빈민가에 사는 흑인 고등학생이 대학에 진학하면 장학금은 거의 보장되어 있다. 그런데 빈민가에 사는 청소년들에게 대학 진학은 남의 얘기처럼 들릴 뿐이다. 고등학교 졸업하는 것이 평생 가장 학력인 빈민가.

   
 
  ▲ 필라델피아 시에 위치한 다른 동네 초등학교 (공립) 놀이터. (이태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사라진 곳에는 '빈민가 허무주의'(Ghetto Nihilism)만이 만연하. 아직도 미국 사회 전체에 만연한 인종차별,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 빈민가, 아무런 변화의 조짐도 없이 더 악화되어가는 상황, 낡은 집은 허물어져가고 사람들은 더 황폐해가고 폭력과 마약 그리고 음주만 기승을 부리는 곳, 상대적인 박탈감이 더더욱 자신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하는 냉혹한 사회. 이런 사회에서 패배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빈민가 문화는 빈민가의 현실과 반대되는 모든 가치를 부인함으로 자기 정체성을 정립했다. 힙합 문화(Hip-Hop Culture)에 잘 반영된 빈민가 허무주의는 기존 사회 가치와 질서를 부정하고 비웃는 반면, 폭력과 마약, 여성 비하로 얼룩진 갱 문화를 조장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미국 흑인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태후 / 템플대학 IVF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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