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정치 참여 변절사
한국 교회 정치 참여 변절사
  • 김권정
  • 승인 2007.06.27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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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한국 교회의 변태적인 정치 참여 행태 끊어야

   
 
  ▲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공연하게 '정교분리'를 선언하고, 성경 구절까지 인용하며 교회의 정치 참여를 비난하고 나섰던 기독교계 인물들이 앞 다투어 정치 참여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복음과상황  
 
2007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다. 교회 안팎에선 ‘교회가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과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쪽이 맞물려 논쟁이 뜨겁다. 물론 교회가 정치에 개입하는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형성된 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한 주장과 활동이 활발하다. 이는 한국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큰 우려와 함께 심각한 당혹감을 안겨주고 있다. ‘민주적 시민사회’와 ‘인권’을 내세우며 파시즘적 독재 정권을 비판하던 기독교인들을 향해 철저히 외면하며 등 돌렸던 사람들이 이제는 한국 교회를 향해 정치 영역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공연하게 ‘정교분리’를 선언하고, 성경 구절까지 인용하며 교회의 정치참여를 반대하고 비난하였던 기독교계 인물들이 앞 다투어 정치 참여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치 참여의 목적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 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도 문제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공식적으로 정교분리를 내세우면서도 비공식적으로는 정치권력과 깊은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던 사람들이 여기에 대거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부적절했던 정치 관계에 대한 평가나 반성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눈을 비벼 뜨고 보면 정치 참여의 진정성이 누구에게 있는지, 무엇이 올바른 판단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사실들은 오늘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며, 미래를 내다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 이후 한국 교회 정치 참여의 ‘변형’된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 한국 교회의 정치 참여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 교회와 정치권력과의 밀착 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냉전적 분단 구조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미국과 소련이란 외세를 등에 업은 국내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분단국가가 수립된다. 그리고 전쟁과 같은 끝없는 생존 게임이 이어진다. 이런 경험들은 한국 교회의 정치 참여를 이해하는데 구조적인 중요한 배경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으나, 우리가 원했던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하지 못했다. 한민족을 둘렀던 국제 질서는 냉혹한 것이었고, 그 결과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냉전(Cold War) 구도 속에서 38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군정이 들어섰다. 이후 남과 북에서는 미·소군정의 지원을 받은 정치 세력이 한반도의 헤게모니 장악을 시도하게 되었다. 결국 남쪽과 북쪽에는 다른 체제의 분단국가가 들어섰다. 남쪽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내세우며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북쪽은 공산주의체제의 김일성을 대표하는 조선인민민주공화국이 출발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분단의 구조 속에서 한국 교회는 이승만 정권의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친일 세력과 밀착했다. 특히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에 대한 확신이 강했으며, 이승만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 등은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가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경이 잘 마련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이승만이 오랫동안 기독교적 가치를 지향하는 국가의 건설을 추구했다는 이념적 동의도 깔려 있었다.

이와 함께 해방 정국에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자 가운데 좌파 인사들이 많았는데, 미국이 주둔한 남쪽에는 이승만을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득세하고 친 기독교적 사회분위기로 되면서 기독교 안의 좌경 세력은 약화되었다. 특히 김일성 세력에 의해 탄압받던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대거 남하하자 한국 교회는 ‘반공의 종교 공동체’로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즉 해방 직후부터 형성된 ‘친일파-미군정-이승만 정권’의 연대에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정치 참여는 자의든 타의든 냉전적인 반공과 친미 분단체제의 형성에 한국 교회들이 기여하게 되었다. 이후 한국 교회와 정치권력의 유착 관계는 ‘반공’과 ‘친미’라는 강력한 매개 요소가 ‘생존적’ 차원에서 작동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과 한국 교회의 긴밀한 관계를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은 1948년 5월 31일 거행된 제1회 제헌의회의 개회식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제1회 국회 의장에 선출된 이승만이 국회 개회 때에 이윤영 목사에게 개회 기도를 하게 했으며, 이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점이다. 또 그 해 8월 15일 대통령 취임선서식에서 이승만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한국 사회 뿐만 한국 교회에 대단히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이미지는 이승만 정권이 친 기독교적이라는 성격을 드러낸 사건인 동시에 한국 교회에도 친 정부적 이미지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 뉴라이트전국연합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인사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맨 왼쪽),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왼쪽에서 세번 째), 김진홍 상임의장(맨 오른쪽). ⓒ 복음과상황  
 
이는 해방 이후 일제 식민 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적 열망 속에서 출발한 ‘반민특위’의 해산에 기독교 인사들이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더욱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일제 말기 친일에 앞장섰던 기독교 인사들 가운데 일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방문하여 일제 말기의 친일 활동이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였음을 주장하며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빨갱이’를 잡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임을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친밀한 관계를 넘어 둘의 관계를 일체화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은 ‘6·25전쟁’이었다. 북한의 전면전에 의해 일방적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한국 교회는 말로만 듣던 ‘공산주의’ ‘빨갱이’를 이론이 아닌 역사적 체험을 통해 알게 된다. 6·25전쟁의 승리 정당성을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며 대중 집회를 열어 미국 대통령, 유엔사무총장 등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 빈번히 부흥회를 열어 전쟁의 승리를 위해 열렬히 기도했다. 전쟁 중에는 북쪽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남으로 피난했는데, 이들이 반공의 맨 앞줄에 서게 되고 깃발을 높이 쳐든 이승만 정권과 이념적·정치적으로 일체화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교회에는 “공산주의=반기독교”, “기독교=반공”이란 등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6.25전쟁 초반에는 전세가 절대적으로 불리했으나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의 지원으로 전세를 뒤집고 휴전에 들어가자, 한국 사회에는 한국을 구한 ‘구세주’로 미국을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한국 교회에도 더욱 크게 작용했다. 전쟁 전의 친미적 분위기에서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에 대한 ‘숭미적’ 태도가 한국 교회에 팽배하기 시작했다. 특히 전쟁 전후로 미국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던 구호금과 구호물자가 주로 한국 교회를 통해 배포되었고, 미국에 대한 숭미적 태도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와 문화적으로까지 한국 교회에 확고하게 내면화되었다.

따라서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교회와 이승만 정권은 반공과 친미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단순한 유착 관계를 넘어 결합하게 된다. ‘6·25전쟁’을 악마와 천사의 대결로 인식하며 공산당 퇴치를 십자군 전쟁으로 비유했던 한국 교회는 이를 수행하는 국가 권력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보루라는 인식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되었다. 

이 같은 일체화된 관계는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과 반민주성에 자연스럽게 눈을 감아 버렸고, 오히려 정권을 적극 지지하고 나서게 만들었다. 정치 차원에서 국정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정략적 명분 아래 1952년 6월 국회의원 신우회가 조직되었는데, 그 주도층은 여당인 자유당 의원들이었다. 한국 교회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이승만, 함태영 등의 기독교인 후보를 위해 한국 교회 내에는 ‘한국 기독교 선거대책위’가 조직되었고, 도·군 단위까지 선거운동위를 결성하였다.

또 1954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기독교인 국회의원 입후보자의 경력을 기독교계 신문에 버젓이 소개하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한국 교회와 정치권력과의 밀착 관계는 그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통하는 3·15부정선거에서도 기독교의 역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둘 다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전국교회 150만 신도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공개적으로 호소하기도 했다. 3·15부정선거로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나자,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보다 폭력적인 진압을 독려했다. 끝없는 한국 교회의 변태적인 정치 참여는 순수한 정치 참여의 정신을 왜곡한 채 각종 부정부패와 연루되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국 교회 전체가 이승만 정권의 포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4·19혁명 이후 한국 교회의 정교 밀착관계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김재준은 “국가를 절대화하려는 독재 경향이 익어감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교회로서의 경고를 제대로 발언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반성할 것을 주장하고 한국 교회의 새로운 정치권력과의 위상 설정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한국 교회는 새로운 정치적 국면에 대응해야 했다. 그것은 박정희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과 군사적 폭력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는 비합법성에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 교회와 박정희 군사정권의 관계는 이승만 정권에 비해 그 친밀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냉전적 반공주의는 1961년 5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조차 5·16군사쿠데타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드러내는 원인이 되었다. 한국기독교협의회는 “5·16군사혁명은 조국을 공산 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과 부패로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사”라는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에큐메니칼 입장을 대표하는 NCC조차 민주적 절차와 법체계를 유린한 군부세력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용인해주었던 것이다.

이 같은 입장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거의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물론 1960년대 중반 이후 분명히 군사 정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일관되게 가졌더라도 5·16군사쿠데타 당시 만해도 수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국가 재건을 위한 대대적인 재건국민운동을 펼치는데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대거 본부중앙위원에 참여하며 적극 활동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 잡은 김재준·장준하·함석헌 등도 한때나마 여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6·25전쟁을 통해 고착화된 적대적 반공주의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정교 유착과 교권 다툼의 한 방편으로 적극 이용되었다. 먼저 예수교장로회가 통합과 합동으로 갈라질 때에도 에큐메니칼운동을 ‘용공 신 신학’으로 비판하고, NCC를 ‘용공 단체’로 매도하는 등 반공주의가 작동했다. 또한 1965년 한국·일본·대만 등지의 보수 기독교인들이 모여 결성한 아시아 반공연맹은 ‘호교=반공’의 논리 아래 ‘십자군’의 논리로 미국의 베트남 군사행동을 적극 지지하고 중국의 UN가입을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한국 지부로 1966년 3월 한국기독교반공연맹이 설립되었는데, 이 단체는 군사정권 아래서 베트남 전쟁 지지와 세계교회협의회(WCC)반대를 결의하는 등 한국 교회의 반공적 활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한국 교회의 적대적 반공 태도는 베트남 전쟁이 세계 여론에서 비도덕적인 전쟁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적극 지원하고 공산 침략에 맞서 싸우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 그리고 세계평화를 지키는 행위임을 주장했다. 또 6·25전쟁 때 미국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길임을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광주민주화항쟁’과 ‘미문화원방화사건’을 통해 큰 충격을 받고 많은 변화가 온 것도 사실이나 여전히 오늘 한국 교회의 주류적 시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장병의 승리와 무운장구를 기도하는 거교회적 행사를 대대적으로 진행하며,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이 단순한 미국의 대리인이 아닌 평화의 십자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데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냉전적 반공의식과 숭미적 태도를 일관하던 한국 교회도 1974년 7월 4일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 원칙에 주장된 남북공동성명에 충격을 받았다. 민주화 운동을 추진하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수호한다는 전제 아래 7·4남북공동성명을 환영한 것에 반해 보수적인 대다수의 교회는 성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반공사상의 약화나 성급한 포기는 무책임한 행위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는 유신 체제의 등장 이후 반공을 둘러싼 한국 교회 내의 보수·진보 간의 갈등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75년 4월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공산화로 안보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또 이를 빌미로 박정희 정권이 초법적인 긴급조치를 선포되는 등 기독교계의 보수 세력은 적대적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며 박정희 군사정권을 지지하고 민주화운동 세력을 용공으로 비난하였다.

기독교계 보수 세력 가운데 가장 활발히 활동한 한국대학생선교회(CCC)는 1975년 5월 ‘반공 구국 기독학생운동 특별기도회’를 개최하여 “나라를 위해 순국을, 주님을 위해서 순교를, 공산주의자들의 무력도발엔 육탄으로 맞서는 의지를 가지고 반공의 면역체가 되자”라고 주장하였다. 6월에는 18개 교단 공동주관으로 ‘5·16광장’에서 100만 신도가 운집한 가운데 전국 기독교인의 총화안보와 반공궐기를 개최하였다. 당시 CCC 대표인 김준곤 목사는 유신 체제가 김일성 공산 독재 체제를 대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대응임을 주장하고 해방신학·민중신학과 같은 진보적 노선은 공산주의 운동 노선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고 매도했다.

   
 
  ▲ 제39회 국가조찬기도회가 2007년 4월 26일 오전 서울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열렸다. ⓒ복음과상황  
 
한편 박정희 군사정권의 반민주성과 폭압적 탄압에 대항하여 신앙의 양심에 따라 저항하고 고통당하고 있는 동안 기독교계 보수 세력의 정치 참여는 대통령 조찬기도회(1976년 제8회부터 국가조찬기도회로 개칭)라는 모습을 통해 더욱 노골화되었다.

대통령 조찬기도회는 1966년 2월 3일 공화당 기독교 국회의원들의 주도로 조직되었고, 여기에 CCC 대표인 김준곤 목사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해 3월 8일 대통령의 불참 하에 약 300여 명이 모여 첫 모임이 시작되었고, 1968년 ‘제1회 대통령 조찬기도회’가 공식적으로 개최되어 정기적 행사로 매년 계속되었다. 이 조찬기도회는 평신도 공화당 국회의원과 김준곤 목사 등 한국 교회 보수적인 목사 및 재계의 평신도 장로들이 중심이 되어 500명 내지 600명의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1974년 11월 9일에는 한국 기독교 실업인회에서 주최한 ‘국무총리를 위한 기도회’에서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로마서 13장을 인용하며 “교회는 정부에 순종해야 하며 정부는 하나님이 인정한 것”이라는 발언을 함으로 한국교회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뒤틀린 정교 유착의 산물인 조찬기도회는 유신 체제가 붕괴되고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5·17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수많은 광주의 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축복하기 위해 1980년 8월 6일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가 개최되었다. 보안사 군목이었던 문만필의 연락을 받고 한경직·조향록·김지길·정진경·김인득·강신명·김용도·김윤식·김준곤·김장인·김해득·김영완·민영완·박정근·박치순·신현균·유흥묵·이경재·이봉성·장성칠·조덕현·지원상·최태섭 등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KBS와 MBC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무고한 희생 위에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다. 또 1981년 5월 14일에는 각계 인사 1,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13회 조찬기도회에서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이 교회의 적극적 협조를 당부하였고, 참석한 목사들은 이에 화답했다.

조찬기도회의 성격 문제는 한국 교회에 큰 논쟁을 일으켰다. 기독교계 보수 세력은 조찬기도회가 사회의 깊은 관심과 동정에 관련된 것으로 정치 행위가 아님을 강변했다. 반면에 그것은 사회 정의와 윤리적 책임의식이 결여되어 있었고, 참회는커녕 호화로운 쇼를 방불케 하는 모임의 성격이 강하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전통적인 정교분리에 입각해서 각자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겉으로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속으로 국가권력과 결탁하려는 움직임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찬기도회가 순수한 종교적 관심과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계획과 출발부터 정치적이며 또 모임의 방법이 정치적이라는 점, 당시에 정당성 없는 권력에 대해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조찬기도회는 정치·사회적 정의를 바라던 많은 이 땅의 기독교인들에게 실망감과 함께 한국 사회에 많은 이들에게 신뢰감을 상실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 기독교계 보수 세력의 정치 참여가 두드러지게 눈에 띤 것은 3당 합당의 야합을 통해 정권 창출에 성공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과정에서였다. 1992년 12월 3일 1,000명의 교역자들이 모여 ‘신앙인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며 김영삼 장로를 공개 지지하며,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것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한 나라를 이끌고 갈 비전이나 철학, 능력이 어떠냐가 아니라 단순히 같은 신앙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지했던 사건은 어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복잡한 정치적 현실에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교회의 강대상에서 공공연하게 신앙인을 뽑아야 한다는 발언은 신앙의 이름으로 아무리 선포된다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정치적 발언일 수밖에 없고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는 편법에 불과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 한국 교회가 범했던 잘못을 또다시 반복하는 어리석은 일을 오늘 누가 하고 있는가?

해방 이후 한국 교회와 정치권력은 남북 분단, 6·25전쟁, 독재정권과 군부정권, 1960~70년대 급격한 경제 성장,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1980년~90년대 통일운동, 민주적 정권 수립 등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유착과 긴장의 복잡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의 정치 참여는 단순하지 않은 ‘상황’이 존재한다. 복잡한 국내외 상황이 얽혀있고, 남북 간의 ‘제로섬게임’이라는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남쪽에서는 반공이, 북쪽에서는 미 제국주의 타도가 국민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반공주의와 숭미주의가 결합된 한국 교회의 현실 인식은 정치 참여의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였고, 오랜 시간동안 한국 교회의 논리로 자리 잡았다. 

전통적 정교분리를 공공연하게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반공과 숭미라는 강력한 기제를 통해 정치권력과의 ‘비판적’ 거리두기에 실패한 한국 교회의 역사를 잘했다고 칭찬할 수는 없다. 더욱이 과거의 부적절한 정치권력과의 정리가 결여된 채 기독교계 보수 세력이 말하는 정치 참여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과거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정치 문제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참여를 말하기 전에 기독교계 보수 세력은 스스로 ‘고백’하고 ‘정리’해야 한다. 남북 화해와 협력의 시대에 한국 교회가 어떤 위상을 가져야 할지 심각하면서도 심도 있는 논의와 정리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한국 교회의 정치 참여의 일그러진 모습은 오늘 우리가 배제하고 부정할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의 정치 참여 모습을 점검하고, 앞으로 다가오는 정치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모색하는데 단초로 적용해야 한다. 혼란스러운 정치적 현실에서 역사로부터 지혜를 얻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이다. 

김권정 /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사학과 강사 
* 이 글은 <복음과상황> 에 실려 있는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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