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굴종과 압제의 땅 1
미국, 굴종과 압제의 땅 1
  • 이태후
  • 승인 2007.06.28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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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버지니아 주에서는 제임스타운 4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귀빈으로 참석한 이 행사에서 영국 이주민들이 최초로 정착한 제임스타운은 대의제, 법치주의, 자유기업 등의 제도를 처음 도입해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기도 했다.

준비하는 데에만 몇 년이 걸린 성대한 행사였지만,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의 영광스러운(?)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진 희생자들의 소리 없는 함성은 들리지 않은, 승자들만을 위한 행사였다. 영국과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에게 400년은 자유와 기회의 역사이지만, 신대륙의 원주민들이나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그 400년의 같은 기간이 굴종과 압제의 역사일 뿐이다.

엘리자베스 1세에서 제임스 1세로 이어지는 17세기 초, 영국은 인구 과잉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넘쳐나는 인구를 분산시키고, 모자라는 농산물과 원자재를 공급할 새로운 식민지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남미는 이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장악했기에, 영국은 신대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 대륙에 투자할 계획이 있었던 런던상회(London Co.)는 신대륙을 순금이 넘치는 풍요로운 곳으로 선전했고, 이에 모험심이 발동한 144명의 승객과 선원은 1606년 12월 20일, 런던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향했다.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항해 일정을 거쳐서 1607년 5월 체사피크 만을 거슬러 올라온 이들은 제임스 강을 통해 지금의 제임스타운에 이르렀다. 멀리 바다에서 본 육지는 “아름다운 목초지와 크게 자란 멋진 나무들이 우거지고, 신선한 물이 숲속에 흐르는, 첫눈에 황홀해지는” 곳이었지만, 막상 상륙해서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 했던 104명의 이주민들은 장티푸스, 이질, 소금 독(salt poisoning) 등에 시달려야 했다. 일확천금 대신 생존에 위협을 받았던 이주민들은 신대륙의 원주민들(소위 ’인디언’)에게서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아사를 면할 수 있었다.

   
 
  ▲ 스미스 선장과 원주민 부족장의 딸 포카혼타스의 사랑을 그린 디즈니의 만화영화 '포카혼타스'는 디즈니답게 아름다운 사랑 얘기로 그려졌지만, 실제 이야기는 그와 정반대이다. (사진 제공 wikipedia)  
 
이주민들은 원주민들이 신기해하는 물건을 주고 곡식을 얻기도 했고, 배고픈 이주민들 중에는 정착지를 버리고 원주민 마을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사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의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윤색한 것이 스미스 선장과 원주민 부족장의 딸 포카혼타스의 사랑을 그린 디즈니의 만화영화 ‘포카혼타스’이다. 디즈니답게 만화영화는 아름다운 사랑 얘기로 그려졌지만, 실제 이야기는 그와 정반대이다.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긴 이주민들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거짓말과 우세한 화력을 사용해서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학살했다.

이주민들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조상 대대로 그 땅에서 농사짓고 사냥하던 원주민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 개념이 없었다. 땅은 자연에 속한 것이고, 사람은 그 땅을 빌어서 농사짓고 사냥할 뿐이다. 그들에게 권리가 있다면 자연권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농산물 생산 기지 확보가 목적이었던 유럽계 이주민들에게 자연권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원주민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경작하지 않았다는 이유-대부분의 토지는 사냥과 채취를 위해 경작되지 않았음-로 그들의 법적 권리를 부정하면서, 영국 이주민들은 토지에 대한 자신의 법적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청교도마저도 성경을 인용하며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원주민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King James Version에는 nations(열방) 대신 heathen(미개인, 이교도) 을 사용함-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 2:8) 성경은 원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 13:2)

내가 어렸을 때 즐겨 보았던 서부영화의 장면들-백인 기병대가 인디언을 습격하는 장면-은, 이제 생각해 보면 더 넓은 땅을 소유하기 위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하던 백인들의 탐욕을 드러낸 추악한 정복의 기록일 뿐이다.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멋진 백인 기병대는 탐욕에 눈이 먼 인간 사냥꾼이었고, 총에 맞아 쓰러져간 ‘인디언’들은 하루아침에 평화로운 삶을 송두리 채 빼앗긴 불쌍한 희생자들이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평화롭게 살며 농사짓고 사냥하던 원주민들을 쫓아내기만 하면, 울타리를 치는 만큼의 땅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던 백인 이주민들은 우수한 화력을 앞세워, 때로는 원주민들에게는 면역성이 없는 질병을 퍼뜨려-백인들은 인디언들을 멸종시키기 위해 세균에 감염된 담요를 건네주기도 했다-그들의 촌락을 파괴했고, 그 결과 원주민들은 인류 역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량학살의 희생이 되었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당시(1492년) 북미 대륙에는 1,000만 명 정도의 원주민이 있었는데, 17세기가 채 끝나기 전에 원주민 인구는 100만으로 줄었다.

신대륙 원주민들의 희생을 통해 이주민들의 개척지가 확장되면서 바다 건너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또 다른 인류 역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처음 신대륙 경작지에 노동력을 제공한 것은 유럽에서 건너온 계약제 노예들이었다. 그런데 이주민들과 이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유럽 이주민들은 새로운 노동력 시장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영국 본국의 국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돈이 되는 작물-담배, 면화, 사탕수수, 쌀, 인디고(청바지 물을 들이는 푸른 안료의 원료)-을 대량 재배해야 하는데, 노동 인건비를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고 힘든 농장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였다.

   
 
  ▲ 신대륙에 흑인 노예가 들어온 것은 거의 제임스타운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세계의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인디언들과 흑인들의 엄청난 희생이 뒤따른 것이다. (사진 제공 wikipedia)  
 
신대륙에 흑인 노예가 들어온 것은 거의 제임스타운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1619년, 네덜란드 선적의 상선이 20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제임스타운에 하역했다. 그 이후 1865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할 때까지, 24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신대륙의 농장들은 흑인 노예의 땀과 피, 눈물과 한숨을 희생 제물로 삼아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를 일구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세계의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인디언들과 흑인들의 엄청난 희생이 뒤따른 것이다.

노예 노동은 농장주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었다. 독립전쟁이 끝난 직후 미국을 방문한 영국인에게 미국의 농장주는 흑인 노예 한 명당 일 년에 $257의 소득을 올리고, 자기는 그들을 유지하는 데 일 년에 $12-13 정도를 지출한다고 자랑스럽게 전했다. 비율로 따지면 투자(?) 가치의 스무 배가량의 이익을 올리는 셈이니 노예제야말로 노다지만큼이나 수지가 맞는 산업이었다.

백인 정착지가 확대되는 만큼 노예에 대한 수요는 급증했다. 1700년에 버지니아에는 6,000명의 흑인 노예가 있었는데, 1763년에는 17,000명으로 늘었다. 1800년이 되어서는 1,000만에서 1,500만 정도의 노예가 신대륙에 존재했고, 같은 기간에 아프리카 대륙은 5,000만 명을 노예제도와 그에 관련된 사망으로 잃게 되었다.

이래도 신대륙이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답게 살 권리’를 지녔거나, ‘더 나은 삶을 찾아’ 유럽을 떠나온 백인 이주민들에게는 그랬겠지만, 백인 기병대의 집요한 추적에 대량학살당한 인디언들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에게 신대륙은 굴종과 압제, 고문과 죽음만이 기다리는 지옥 같은 땅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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