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그르치는 우리의 '열심'
하나님의 뜻 그르치는 우리의 '열심'
  • 김형원
  • 승인 2007.07.07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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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0~45

1. 한국 교회의 열심

세계 교회가 경탄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은 ‘열심’이다. 새벽기도의 열심, 철야기도의 열심, 전도의 열심, 선교의 열심, 모임에 대한 열심, 예배에 대한 열심, 헌금에 대한 열심 등등. 열심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한국 교회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역사도 오래되지 않은 교회가 보여주는 열심은 서구의 형제들을 경탄시키기에 충분하다.

한국을 찾아오는 외국 신자들마다 열심의 원인을 탐구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국 교회는 분명한 답을 줄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러면서 속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마음을 품는다. “이런 열심도 없이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한국을 찾아왔던 많은 외국 신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한국 교회에 대해 우려 섞인 평가를 내놓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한국 교회가 열심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그 열심으로 엄청난 교회를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무언가 심각하게 결여된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2.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들은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로 달려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40절).” 그 사람은 이미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병이 낫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의지에 달린 문제라고 확신했다.

이 믿음의 요청을 듣고 예수님은 측은히 여겨 바로 고쳐주셨다.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이미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기 때문에(25, 31, 34, 39절),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무감각해질 법도 하지만, 예수님은 기계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이시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고쳐주셨다. 우리 주님은 선행을 베푸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종종 빠지는 위험에 빠지지 않으신 것이다.

3. 주님께서 주신 당부의 말씀

주님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시고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시면서 보내셨다(44절).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서 그 증거를 삼아라.”

이 명령은 엄한 것이었다고 마가는 말한다(43절).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쳐주면서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사소하게 보이는 몇 가지만을 지키기를 요구하셨고,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령을 주신 이유를 잘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고침 받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4. 주님의 말씀을 무시한 나병환자

그러나 우리는 고침 받은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무시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예수님께서 엄하게 명령하신 것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너무 감격했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그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시면서 당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고침 받은 사실을 알렸다(45절). 즉 간증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간증’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주님의 생각과 계획, 주님의 명령보다 앞세웠다는 것이다. 감격과 기쁨으로 인해 갑자기 지나친 열심이 생겼고, 그 결과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주님의 분명한 명령을 어긴 것이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셔야 했다(45절). 자신의 방식으로 주님을 선전한 것이 오히려 주님의 발을 묶어 놓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즉 예수님의 사역과 계획을 가로막은 것이다.

치유 받은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널리 알려야지 절대로 숨길 일이 못된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는 열심이 대단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최대의 문제는, 자기 열심에 도취되어서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명백한 말씀을 어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체험과 열심에 몰입되어서 주님께서 정말로 무엇을 원하시는지, 주님의 일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 자기가 해야 하고 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고려치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그는 자신의 불순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돕는 일이라면 좋은 것이 아니냐고 항변했을지도 모른다.

5. 자기도취적 열심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는 그릇된 자기도취의 열심에 빠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만 내세운다고 능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대의명분을 걸고 떠들어 댄다고 해서 반드시 주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것도 아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시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 교회에 속한 우리들의 큰 문제는 자기 열심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너무 활동적이다. 그래서 성찰을 하지 않는다.
* 우리는 열심에 모든 가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무엇에 열심을 내야 할지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하고 있다.
* 우리는 지나치게 목표지향적이다. 그래서 과정과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을 듣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주인의 명령을 다 듣기도 전에 달려나가 버리는 종과 같다. 주인이 종에게 말한다. “이 서찰을 산 너머 김 첨지에게 전해주고 오너라. 너무 급하게 가지 말고 가면서 논 일도 좀 도와주고, 나무하는 일도 좀 도와주고, 그리고 산세가 어떤지도 살펴보면서 다녀와라.” 그러나 주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종은 서찰을 낚아채서 열심히 달려서 김 첨지에게 전해주고 헐레벌떡 달려온다. 종은 주인의 말의 앞부분만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서찰만 빨리 전해주면 칭찬을 받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서찰이 전해지기에 좋은 시간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고, 또한 다음에 할 일을 위해서 종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어서 심부름 과정에 이런 저런 일들을 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종은 자기 방식의 열심으로 주인의 세심한 명령을 무시한 것이다. 결국 종은 주인의 뜻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계획도 틀어지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종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경과 신학이 사라지고 있다. 깊이 있는 신학과 성경 연구를 등한시한다. David Wells가 지적한 것처럼, 교회에서 심리학과 경영학만 판치고 있을 뿐 성경과 신학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결과 순종적 성경 연구가 빠진 천박한 행동주의와 깊이 있는 신학적 성찰이 결여된 악바리 열심만 남는다.

* 경제적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성경적 윤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비현실적이라고 매도하는 맘몬주의자의 열심.
* 단기적인 효과를 위해서 타종교인들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대규모의 선교단을 이끌고 선교지로 나가는 선교지상주의자의 열심.
* 번 돈으로 선교 사업을 한다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면서 그 과정에서 온갖 세속적인 방법을 앞장서서 동원하고 있는 ‘기독교 기업들’의 열심.

6. 말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우리의 귀를 막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하나님의 생각보다 내 열심을 앞세우게 해서는 안 된다. 열정이 모든 것을 합리화해주는 비법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방향을 잘못 잡은 열정은 주님의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런 위험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바울은 로마서(10:2~3)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씀으로써,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다. 그 말씀대로 하면 먼 길을 고생스럽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대로 따르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보다 철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엉덩이에 못이 박히도록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깊이 성찰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는 목표보다는 과정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이루는 것보다 어떻게 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는 훨씬 더 귀하기 때문이다.

내 열심이 막 솟아오를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 어떤 과업이 눈앞에 있을 때, 더욱이 그 과업이 내 눈에는 하나님의 일처럼 분명하게 보일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 일에 눈이 팔려서 정작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일의 성취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김형원 목사 / 하.나.의. 교회, <복음과상황> 편집위원장
*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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