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모습 1. 십자군 전쟁과 국가의 방향
미국의 모습 1. 십자군 전쟁과 국가의 방향
  • 변완섭
  • 승인 2007.07.11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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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서막, 십자군 전쟁

   
 
  ▲ 로마 교황 우르반 2세. 출처 : blessed_gerard.org  
 
1095년의 어느 날, 비잔틴 황제인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보낸 한 장의 서찰을 앞에 둔 로마 교황 우르반 2세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 서찰은 투르크 족에 빼앗긴 소아시아의 비잔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원군을 청하는 내용으로서, 이미 몇 차례의 도움을 받았던 비잔틴 황제로서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단순한 원군 요청이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위치는 동쪽의 이슬람 세력을 막아내는 교두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므로 비잔틴 제국에 도움을 주는 것은 서유럽의 안전에도 직결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서찰을 읽는 우르반 2세의 머리에는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하나는 그리스 정교회(비잔틴 제국)를 로마 교회로 재통합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함으로 교황 군주 국가 정책을 달성하는 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독일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그는 교황 최대의 적이었다)를 견제하고 유럽의 평화를 이룸으로 교황권을 공고하게 하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교황의 생각은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던 기사들, 영주, 상인, 농민들까지 열렬히 동참(역사적으로 이토록 여러 집단의 이해가 잘 맞아 떨어졌던 사건은 흔치 않다)하는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1095년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그 후 8차례에 걸쳐 1153년 소멸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십자군’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거룩한 신의 소명을 어깨에 짊어진 용맹스러운 기사의 이미지를 생각한다. 이교도에 의해 점령된 예루살렘을 해방시키고자 영웅처럼 달려 나가는 기사들은 서구 유럽이 세계 문명의 주축이 된 이후 일관되게 추구해 온 상징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 이라크 전쟁의 잔해를 보라. 출처 : 다큐멘타리 사진작가 성남훈의 작품  
 
교회의 과거 범죄


그런데 2000년 교황청에서는 놀랄 만한 사건이 있었다. 교황 자신이 직접 과거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이 무자비한 수단과 행동으로 교회의 이름을 더럽힌 것을 신에게 속죄하였으며, 교황청에서는 교회가 인류에게 범한 각종 과오를 정리한 ‘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그리고 교황의 속죄와 문건의 시작은 ‘십자군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이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고한 피를 흘렸던 이 사건은 다시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교황청 사죄와 함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이 저지른 ‘학살과 만행’이다. 영국의 교회사학자 폴 존슨은 “이 사건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할 기회를 영영 잃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어떤 기사는 이런 편지를 고향으로 보냈다. “정복한 솔로몬궁의 회랑과 성전에서 우리 군대는 말을 타고 달렸다. 그리고 달리는 말의 무릎까지 그들의 피로 물들었다.” 첫 원정에서 십자군은 부녀자를 포함해 7만여 명의 예루살렘인을 학살했고, 어처구니없는 살육의 역사는 십자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 보스니아 사태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 보스니아 어느 마을의 공원이 희생자들의 묘지로 변해 버렸다. 출처 : time.com  
 
미국의 군사비

세계적인 군사 문제 연구소인 스웨덴의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발표한 2007년 미국의 군사비 지출은 5,287억 불이었다. 원화로 환산을 하면 대략 500조 원을 넘는 돈이다. 그런데 2위인 영국부터 10위인 인도의 국방비를 전부 합한 총액은 3,600억 달러에 그치고 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전 세계의 군사비 지출 합계가 1조 1,600억 불 가량이니, 미국은 전 세계 군사비의 절반을 차지하는 국가이다. 이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많은 액수의 군사비와 정보비 등이 별도로 지출되고 있다.

도대체 미국은 왜 이런 막대한 돈을 군사비로 사용해야 하는 걸까.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한 전쟁 억지 비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1990년대 20만 명이 죽어간 보스니아 사태, 420만의 아사자가 생긴 소말리아 내전, 2003년에 시작되어 이미 20만 명이 넘는 사람이 희생되었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수단의 다푸르 유혈 사태 등에서 미국이 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1775년 이후 현재까지 미국 역사에서 치룬 전쟁, 전투, 무력시위 등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1775년 이후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의 횟수는 대략 282번 가량 된다. 그런데 인도적인 차원의 전쟁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20여 회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260번의 전쟁과 소규모 전투 등은 미국의 영토 확장을 위해서, 그리고 미국의 국가적 이해를 위해서 치른 것이다. 
 
   
 
  ▲ 예수님을 배경으로 연설하는 부시 대통령. 출처 : stuartdelony.wordpress.com  
 
부활하는 십자군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900여 년이 지난 이후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십자군’이라는 단어를 다시 들었을 때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듣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경험했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광기를 바라보고 있다.

1991년 걸프전에서 2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의 피해는 그보다 더욱 커서 전쟁 이후 10년 간 이라크에서는 60만 명의 어린이가 사망했다. 5세 이하 어린이 여덟 명 중 한 아이가 죽어간 것이다. 그 이유는 미국의 경제 봉쇄로 간단한 의약품조차 공급이 끊겼기 때문이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 2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고, 지금 이 시간도 이라크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 200만 명의 이라크 난민들이 모국을 떠나 시리아, 요르단, 터키, 레바논 그리고 이집트 등 이웃 국가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미국과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고, 더욱 참담한 일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어떤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더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전화’하려는 시도가 과연 옳을 수 있겠는가. 
 
   
 
  ▲ 미국의 온갖 전쟁을 배후에서 지휘하는 네오콘의 모습이다. 출처 : batr.net  
 
한민족에게 미치는 미국의 영향

미국이 한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질문에는 실로 다양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우리 민족의 해방과 6·25전쟁에서 미군의 역할, 그리고 그 이후의 한반도 재건에 미친 미국의 영향은 해방 전후의 세대에게는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이 세대에게 일종의 신앙적 이상으로 굳어진 미국의 의미는 실로 절대적이다. 오죽하면 나라의 주권인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자는 정부의 의지가 엄청난 논란과 도전에 맞부딪쳐야 했을까. 심지어 정부와 이 생각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만큼 이 세대에게 미국의 존재는 아직도 절대적인 현실이다.

미국은 민족의 해방을 가져다 준 나라이고, 기독교를 전해서 복음을 심어준 국가이다. 그리고 6·25전쟁의 벼랑에서 많은 인명을 희생해가며 민주주의를 지켜준 나라이고, 막대한 원조와 인도적 손길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기억이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눈에 생생한데 그들을 비난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고, 인간으로 태어나 금수의 탈을 쓰지 않은 이상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문제는 무엇인가? 젊은 세대가 아버지의 은인을 나의 은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세대 간의 갈등과 시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내 빚진 것을 자식에게 갚으라고 강요하지 못하는 것처럼 시대가 변해가면서 새로운 시각이 생기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 87년의 민주 항쟁은 우리 사회에 민주화의 물결을 일으키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출처 : 오마이뉴스  
 
미국의 권력과 그 방향


중요한 것은 현재의 미국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모든 권력은 부패할 수 있는 것이고, 미국이라는 절대적인 국가권력이 부패하면 그것은 전 세계에 엄청난 재앙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만은 온몸으로 막아야 하는 것이고, 오히려 이 국가의 방향을 긍정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것이 현재를 사는 시대적 논리이고, 새로운 세대의 의무이다.

제국주의는 이제 세계 어느 곳에서든 더 이상 국가의 체제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소수의 제국주의자들은 대중을 선동하며 다른 모습으로 그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러시아를 보면 현재의 강한 정부와 미래의 계획에 국민들은 열광하고 있다. 하지만 이 국가의 종착점은 어느 곳일까. 미국이라는 수퍼 파워의 국가 권력을 등에 업은 방산업체, 무기상, 정유회사, 네오콘, 보수 이론가, 정치가들이 꿈꾸는 그들의 국가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절대적 소수이고 약자인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역사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가.

끝없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가슴을 죄어오지만, 현실에서 작은 씨앗을 심는 것으로 그 시작을 할 수밖에는 없다. 깨어있는 것으로 우리는 미래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하여….

아직도 이 빛바랜 구호가 귀에 새롭게 느껴지는 날들이다.

   
 
  ▲ 역사는 사회적 약자에 의해서도 바뀔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를 외치며 일어났던 촛불집회. 출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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