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굴종과 압제의 땅 2
미국, 굴종과 압제의 땅 2
  • 이태후
  • 승인 2007.07.12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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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리카에서 붙들려 죽음의 행진을 하는 원주민들.  
 
미국에 팔려온 흑인 노예들은 대부분 아프리카 내륙에서 붙잡혀 왔다. 그런데 조상 대대로 평화롭게 살아온 고향에서 이들을 붙잡아 노예로 판 이들은 백인이 아니라, 다른 부족의 우두머리들이었다. 노예 상인들이 제공하는 대가와 자기 부족의 세력 확장을 원한 그들은 다른 부족들을 습격해서 늘어나는 노예 수요를 충당했다.

인간 사냥꾼에게 붙잡히면, 목에 족쇄가 채워진 채 굴비처럼 사슬에 묶여 아프리카 서해안의 항구 도시로 향하는 지옥의 행군을 하게 된다. 때로는 1,000마일(1,609킬로미터)이나 되는 먼 거리를 말도 통하지 않는 다른 부족 사람들과 함께 걸어야 했다. 이렇게 먼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어려운 일인데, 노예 사냥꾼들은 뒤쳐지거나 낙오하는 이들에게 사정없이 채찍질을 가하거나 심한 경우 총으로 사살해서, 해안에 이르렀을 때는 다섯 명 중 두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동물을 가두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감옥에 수용되어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보름 혹은 한 달이 지나면 선박이 준비되어 거래가 이루어지는데, 이를 위해서는 의사의 검진이 요구되었다. 아직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런 짐작도 못한 채 공포에 떠는 이들이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발가벗겨진 채, 가축을 다루듯 신체의 은밀한 부위까지 더듬는 의사의 손길을 견뎌내면, 건강 판정을 받은 이들만 따로 남겨졌다.

   
 
  ▲ 노예선에 실린 원주민들.  
 
노예 상인들은 그들의 가슴에 불에 달군 인두로 표식을 남겼고, 그 표식에 따라 그들의 행선지가 정해졌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초원을 자유롭게 달리던 아프리카의 영혼들은 노예 상인들에게 붙들려 말 그대로 동물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오는 행군도 쉽지 않았지만, 아프리카 서안에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까지 가는 항해는 더 험난한 죽음의 여정이었다.

그 당시 문서의 기록을 살펴보자.

“갑판 사이의 거리는 때로 18인치(약 46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높이가 그들의 어깨 폭보다도 좁아서 그 불행한 이들은 돌아누울 수도, 심지어 모로 누울 수도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다리와 목은 갑판에 사슬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절망감과 질식이 너무나 심해서, 검둥이(Negroes)들은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른다.”

선창이 너무 소란해서 선원들이 열어보면, 몇 명은 질식해서 죽어 있고, 어떤 이들은 숨을 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죽였고, 그 사이 기회를 틈탄 이들은 바다로 뛰어들어 죽기도 했다. 피와 배설물로 범벅이 된 선창은 도살장과 다를 바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이런 지경으로 대서양을 건너면 세 명 중 한 명이 죽었지만, 노예 시장이 워낙 이윤이 높아서 노예 매매는 더욱 성행했다. 해로를 통한 지옥 행군을 견뎌낸 노예들이 마침내 도착한 남부의 농장은 보금자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죽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감옥이었다.

‘길들여지지’ 않는 노예를 백인 농장주들을 채찍과 구타로 길들였고, 견디지 못한 노예들은 현실과 타협하거나 도망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도주 노예를 기다리는 건 그들을 추적하는 잔인한 백인들과 집요하게 그들의 흔적을 쫓는 사냥개들뿐이었다. 도주 노예의 운명은 운 나쁘게 걸린 백인이 자기 생각에 적당하다고 자의적으로 결정한 처벌에 따라 결정되었다. 도주 노예를 죽이든 반죽음이 되도록 구타하든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 백인 농장주들은 노예들을 이런 족쇄로 구속했다.  
 
1705년의 버지니아 주 조례는 노예의 손발을 자르도록 허용했다. 메릴랜드 주는 1723년 백인을 구타한 흑인의 귀를 자르도록 허락하는 법조문을 통과시켰고, 어떤 심각한 범죄에 대해서는 교수형에 처하고 그 신체는 사지 절단해서 전시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전쟁 후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내세운 미국 정부는, 노예 노동에 의해 생산성이 증가했다는 실질적인 이유로 노예 제도를 지지했다.

1790년 미국 남부에서는 일 년에 1,000톤의 면화가 생산되었는데, 1860년이 되어서는 일 년에 백만 톤의 면화를 생산했다. 그와 같은 기간에 노예 인구는 50만에서 400만으로 증가했다. 번영의 뒤안길에 가려진 흑인 노예의 삶은 어땠을까? 한때 노예였던 존 리틀(John Little)은 자신의 노예의 삶을 이렇게 전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웃고 명랑하기 때문에 노예들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 자신을 비롯해서 서너 명의 노예들은 하루에 200회의 채찍질을 당했고, 발에 차꼬가 채워졌다. 그렇지만 밤이 되면 우리는 노래하며 춤을 추었고, 발에 묶인 사슬을 흔들어서 다른 사람들이 웃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은 시름을 풀고, 우리 마음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복음만큼이나 진실하다. 한 번 생각해 보라 - 우리가 아주 행복했음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 - 나는 쇠사슬로 장난을 쳤다.”

어떤 농장 일지에는 사망 기록이 있는데, 1850년에서 1855년 사이에 죽은 노예가 서른두 명이라고 기록한다. 그 중에 네 명만 60세까지 살았고, 다른 네 명은 50세까지 살았다. 일곱 명은 40대에 죽었고, 다른 일곱 명은 20~30대에 죽었고, 아홉 명은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네 명만 제외하고 나머지가 제명에 죽지 못했다는 것은 흑인 노예들이 얼마나 악조건 가운데서 살았는지를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함께 살던 일가족이 주인에 의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1858년 아브레암 스크리븐(Abream Scriven)이라는 노예가 주인에 의해 팔렸는데, 그가 아내에게 이렇게 전했다. “내 아버님과 어머님께 내 사랑을 전해주고, 작별 인사를 전해주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시 못 만나면, 하늘에서 다시 만나기 바라오.”

한 연구에는 루이지애나에 있는 한 농장 기록에 나온 1840년에서 1842년 사이에 200명 노예에게 가해진 태형에 대해 전한다. 그 기록에 의하면 2년 동안 160회의 태형이 가해졌는데, 일 년에 일인당 0.7회의 태형인 셈이다. 약 절반 정도가 그 기간 동안 한 번도 태형에 처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논리는 “컵이 반이나 찼다”는 것과 같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절반이나 태형에 가해졌다”고 할 수도 있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흘이나 닷새마다 한 번은 누군가가 태형에 처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정도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태형은 노예 통제를 위해 이용되었다.

   
 
  ▲ 무자비한 채찍질을 견뎌낸 노예의 등에 남은 끔찍한 흉터.  
 
남부에서는 기독교가 노예제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 아직도 일부 한국 교회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창세기 9:25에 나오는 함에 대한 저주 - “함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 가 아프리카 흑인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라는 해석이 남부 교회에 팽배했다.

그런데 흑인의 조상이 함이라는 해석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해석이다. 함은 아프리카 원주민의 조상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의 조상이다. 창세기 9:25은 가나안 정복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바울의 가르침도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 13:1)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엡 6:5)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노예를 부리며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신학을 연구했다.

기독교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오는 것이 미신과 마귀의 사슬에 매여 짐승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미개한 열등 인간을 개명한 미국에 데려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문명의 혜택을 입히는 선행이라고 생각했다. 노예에게도 뚜렷이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우월감에 도취된 백인들은 노예에게 저지르는 만행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푼 특권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흑인 노예가 자신들과 같이 예배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백인들에게 종교는 길들여지지 않는 노예를 굴종시키기 위한 당근일 뿐이었다. 한편 이집트에서 노예가 되어 종살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의 체험에서 자신들의 서러운 처지를 발견한 흑인 노예들은 복음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백인들과는 달리, 출애굽기와 예언서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성경 이해를 구축하게 된다.

매일의 삶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블루스와 가스펠이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를 만들어낸 흑인들. 백인들이 섬기는 제왕주의적 구세주가 아니라, 고난당한 종으로 오신 겸손한 나사렛 예수를 믿은 노예들. 그들의 피와 눈물, 그리고 한숨이 땅을 적시고 하늘을 울려, 240년의 긴 노예 제도에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태후 목사 / 템플대학 IVF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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