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나와 있는 북한의 공관장과 통화를 했다. 자연스레 북한과 미국의 외교 관계를 중심으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의 최근 발언에 관한 입장을 묻게 되었다. 왜냐하면 미국이 북한과 체결했던 휴전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용의가 있다는 발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남한에서의 미군 철수와 맞물려 북한이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물어 보나마나 뻔한 일 아닙네까?”
“핵을 폐기하게 했으면 조선에 대한 응분의 성의가 있어야 하갔지요"
미군 철수가 현실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북한 당사자가 더 잘 알고 있다. 한국과의 방위조약보다 중요한 것이 미국의 국가 이익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코끝을 겨눈 몽골의 지정학적 필요를 위해 몽골인들에게 미국 이민의 기회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현실이 어디 인도주의적인 목적뿐이겠는가?
휴전 이후 취약했던 남한의 군사적 균형을 지원하기 위해 미군이 머물렀지만, 지금은 반드시 그런 이유만도 아니다. 오히려 미국의 필요에 의해 한국 주둔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미국과 외교 관계가 체결된다면 북한은 미군 철수라는 카드를 버릴 것이다. 미군 철수 주장이 결코 관철될 리 없는 현실적 이유를 저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경제적 지원이라는 조커를 요구할 것이다.
북경 외교 사절이 모여 있는 조양구로부터 15분가량 떨어진 리탄북로(日坦北路)에 위치한 북한대사관에 나타난 힐 차관보는 이번 회담에서 성과를 도출하려면 어차피 미국과 북한이 주요 현안에 대해 입장을 좁혀야 한다"면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다. 지연된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서둘러야 할 것도 많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북한이 요구하는 ‘대북적대정책 철폐’의 마지막 목표는 ‘북미 외교 관계 수립’이다. 부시 정부는 교착 상태에 빠진 이라크에서의 실패와 이란 압박에서 드러난 국론 분열을 극복하고,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승리를 모색하기 위해 외교적 성과를 가시적으로 내놓아야 하는 부시 정부가 취할 히든카드가 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일본의 ‘청구권 자금 지원’과 한국을 우회하는 ‘중유 보급’ 등으로 힘들이지 않고 북한을 무마할 수 있는 당근책을 선택한 셈이다. 8년 간 쌓은 클린턴 정부의 북한 길들이기 노하우를 이어가지 못하고, 뒤집었던 북미 관계의 이정표를 부시가 결자해지하는 모양새다.
일본과 한국을 중심축으로 하는 동북아 발전과 균형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북한과 미국, 이제 윈윈게임을 향해 패를 던지고 있다. 힐 차관보가 북한 대사관을 방문하고 김계관 부상이 미국 대사관을 방문하는 상호 교차 방문하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단계에 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북미 외교 관계 수립은 마치 천적과도 같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념 대립이 극복되고, 전쟁을 통해 적대적 감정이 남아 있던 당사자 간의 화해라는 측면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매도했던 과거사를 유감 표명으로 일단락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의 형편이다. 지금은 북한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측면에서 굴욕스러울 수 있겠지만 미국에 의한, 미국의 힘을 만천하에 드러내려는 의지와 힘의 논리가 보다 성숙한 미래를 위해, 보다 긍정적으로 작용할 틈이 보인다는 점에서 지극히 다행스러울 뿐이다. 북한에 문을 열어 미국이 패착을 거둘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북미 관계,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이 도발한 핵개발 강공이 가져다준 기대 밖의 수확이다.
"핵 문제로 눈총을 받더니만 조미 관계가 지금처럼 좋을 수는 없습네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전화에서 그의 목소리가 오랜만에 맑아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