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의 슬픔과 함께 통곡한다
아프간의 슬픔과 함께 통곡한다
  • 김명혁
  • 승인 2007.07.31 0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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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이 희생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억류되어 있는 22명의 우리 젊은이들 중 또 한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오늘 새벽 전해 듣고 침통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는 중 이른 아침 다음과 같은 메일이 나에게 전해졌다.

“목사님, 평안하신지요. 오늘 아프간에서 또 청년 한 명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글을 올립니다. 목사님, 지금이야말로 가장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때이겠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인터넷과 언론을 채우고 있는 말들은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 속에서도 깨우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시대를 향한 비전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프간 문제를 놓고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선교를 위해서 힘쓰시고 선교사를 사랑하시는 목사님께서 들으시는 말씀이 있으실 줄 압니다. 목사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잠 못 이루는 한 젊은이의 애절한 호소의 글이었다. 너무나 혼란한 지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는 한 젊은이의 간절한 호소의 글이었다.

나는 이 글을 대하고 나서 제일 먼저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죗값으로 인해 인류에게 임한 죽음의 비극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고, 동생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시고 연민의 정을 지니시고 함께 슬퍼하시면서 우셨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예수님께서는 또한 불신앙과 반역의 죗값으로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슬퍼서 우셨다.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이는 무서운 죄를 지어서 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비극적 사실을 바라보시면서 슬퍼서 우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예수님께서는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류에게 임할 저주의 잔을 당신이 대신 마시겠다고 기도하시고 그 대신 인류에게서는 저주의 잔을 거두어달라고 호소하시고 통곡하시면서 기도하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막 14:33~34)

인류의 역사는 물론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비극의 극치의 순간이었던 십자가 사건 당시 아들과 아버지는 함께 통곡하시면서 우셨다. 아들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면서 우셨고 아버지는 캄캄함으로 얼굴을 가리시고 우셨다. 결국 죄를 범한 인류가 지옥의 저주에서 건짐을 받은 것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 슬퍼서 우신 울음 때문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슬퍼서 눈물을 흘리신 주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도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이웃과 우리의 ‘원수’를 위해서 울라는 말씀이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나중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말씀하셨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20)고 분부하셨을 때 아마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에 울면서 그렇게 하라고 분부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원수를 용서할 뿐 아니라 사랑한다는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의 메시지를 군부에 전하면서 딸 동희양은 통곡하면서 울었고 사실은 아버지도 통곡하면서 울었다.

지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한 일과 가장 소중한 일은 우는 일이다. 희생적인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순수하게 펴다가 희생을 당한 고 배형규 형제와 고 심성민 형제의 유족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일이다. 억류당해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을 당하는 21명의 순수한 우리들의 젊은이들과 저들의 가족들과 함께 아픔과 슬픔을 나누면서 우는 일이다. 그리고 잘 알지 못하는 역사적인 불행 때문에 극심한 재난과 불행을 당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슬픔에 동참하면서 함께 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자신과 아프카니스탄의 슬픔에 동참하면서 함께 울어야 할 때

사실 우리는 그동안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당하는 극심한 재난과 불행과 슬픔에 깊이 참여하지 못했다. 나쁜 사람들이 당하는 불행이라고 치부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사탄 마귀가 아니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은 그 속에 아직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모든 종류의 인간은 우리의 눈물과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얼마 전에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린 일이 있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니,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2007년 1월 3일 아침에 쓴 글)

한 가지 말을 더 하고 싶다. 아니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한마디 더 하고 싶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한 말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서 죽은 일이 가족들과 고향 사람들에게는 슬프고 아픈 일이었지만 하나님나라와 조선 선교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밀알의 떨어짐이 없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일은 없었다. 나는 오늘 아침 인천에서 있었던 ‘한국선교역사기념과 기공예배’에 참석해서 격려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885년을 기념하면서 인천에 선교역사 기념관을 건립하는 여러분들에게 축하와 감사를 드리면서 여러분들이 앞으로 할 일 두 가지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1885년을 가능케 했던 1866년 대동강에서 있었던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기념하는 ‘조선선교역사기념관’을 대동 강변에 세우는 일과 배형규 목사, 심성민 형제가 뿌린 순교의 피로 시작할 아프간 복음화와 선교를 기념하는 ‘아프간 선교 역사 기념관’을 세우는 일입니다.”

너무 비판적인 말을 많이 하기 전에 그저 다윗과 예레미아처럼 눈물을 강물처럼 흘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격이 갖추어지면 하나님나라 확장과 세계 복음화를 위해 우리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세계 곳곳에 떨어지게 되기를 소원한다.

김명혁/ 강변교회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 이 글은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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