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수 지명선, 한국 이송 쉽지 않다
무기수 지명선, 한국 이송 쉽지 않다
  • 홍성종
  • 승인 2007.08.08 0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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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종신형 이감 사례 없어…심리적 불안 겹쳐 건강 악화

   
 
  ▲ 지명선 씨가 수용된 플로리다 잭슨교도소. 플로리다의 하늘이 아무리 맑아도 명선 씨는 어머니가 있는 한국의 하늘을 더욱 그리워하고 있다.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지명선 씨. (관련 기사 : 2월 14일자 "깨어진 아메리칸 드림 속에서 만난 하나님" 참조) 그가 최근 몹시 아프다. 협심증 증세로 5월과 7월에 두 차례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몸은 여전히 갇혀 있지만, 환경은 조금 달라졌다.

플로리다의 초록을 헤치며 서둘러 찾아간 7월의 한낮. 명선 씨는 이전보다 북서쪽으로 약 30마일 떨어진 플로리다 잭슨교도소로 이감되어 있었다. 교도소 면회 장소는 주말을 맞아 면회객들로 붐볐다. 50여 명이 넘는 면회객들이 면회실을 가득 채웠다.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지붕에 고속도로 휴게실에서나 볼 수 있는 콘크리트 탁자와 의자들이 마주 보고 있었다. 12피트 높이로 둘러진 철조망 안쪽 뜰은 어림잡아 ½에이커 정도는 되어 보였다.

면회를 신청한 지 30여 분 후 생각보다는 건강한 모습으로 지명선 씨가 나타났다. 명선 씨를 돌보는 양삼석 목사(아가페장로교회)가 투박한 말투로 “명선이가 한국도 못 가고 교도소서 초상을 치를지도 몰라”하고 답답한 심사를 토로했던 터라 내심 걱정했었다.

“명선이가 한국 못 가고 교도소서 초상을 치를지도…”

명선 씨는 한눈에 봐도 해쓱해졌다. 움푹 들어간 눈 때문에 눈빛이 날카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바쁘실 텐데 예까지 찾아와서 고맙다”는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간단한 포옹을 나누고, 밖으로 나가자며 손을 끌었다. 한여름 태양이 직선으로 내리쬐는 사이로 간간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지냈나. 많이 아프다고 들었다.”

“심장 주변 혈관에 문제가 생겨서 쓰러진 적이 있다. 구급차에 실려 갈 때,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어머니도 못보고, 어머니를 마주보고 사랑한다 말 한 번 못하고 죽는구나 생각했다. 깨어나 보니 전기 충격을 여러 차례 가할 만큼 심각했다고 했다. 지금도 그저 그렇다. 주변 사람들에게 매일 서너 번씩 좀 확인해 달라 부탁한다. 음식은 소금기 없는 걸 따로 먹는다. 먹는다기보다 그저 때운다.”

6개월 사이 수척해진 것은 몸뿐이 아니었다. 아픈 몸은 그의 마음도 수척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야기를 자꾸만 어두운 쪽으로 끌어갔다. 요즘에는 편지도 못 쓰고, 성경도 읽지 못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의욕 없이 그저 누워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한 여름의 열기가 갈수록 깊어갔다. 명선 씨의 삶을 불행과 행복으로 나누었던 그의 누나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누나를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나?”

그러자 그의 눈빛이 살아났다. 단순한 관심을 넘어서 사랑과 연민, 분노와 용서가 뒤섞인 미묘한 눈빛이었다. 그리고는 “양 목사님이 누나 만나러 가기 전에 와서 이야기했다”고 짤막하게만 대답했다. 이후 그는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양 목사와 누나와의 만남이 어렵게 성사되었다는 말과 함께 누나의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누나 역시 조카를 떠나보낸 이후 처참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생활 형편도 어렵다고 전했다. "누나가 굉장히 허약해져 있다”고 말하자 반사적으로 “밥을 통 안 먹어요, 만날 커피만 마시니까 그렇죠”라고 불쑥 내뱉었다. 잠시 침묵하다 튀어나온 그의 한마디가 무척이나 정겹게 다가왔다.

사실 명선 씨는 조카 살해 이후 누나와의 첫 만남이 가져올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의 누나가 한국 이송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누나가 자신을 쉽게 용서할 거라 생각질 않았기 때문이다. “누나는 누구도 모를 사람이다. 다른 가족들도 누나를 대하기 어려워했다”며 누나를 향한 속마음을 굴절시켜 표현했다. 누나와 동생이 엮어놓은 불행이지만, 지금은 그 불행에 너무 많은 사람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는 그 불행을 잘 풀어가도록 돕기도 하지만 때로는 더욱 얽히게 만들기도 한다. 

   
 
  ▲ 지명선 씨가 연필과 파스텔을 이용해 직접 그린 그림. 그는 교도소 내에서 한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미술 교육을 받기도 했다.  
 
피해자 누나와 어렵게 성사된 만남…한국 이송에 새로운 전환점 맞아

우선 가장 큰 상처와 불행을 겪은 쪽은 누나다. 그녀는 원수가 된 동생으로부터 1차적인 상처를 받았고, 명선 씨를 위한 구명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2차적인 상처를 받은 듯했다. 위로한답시고 찾아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건넨 어설픈 용서에 대한 권면이 누나의 삶을 더욱 무너지게 만든 것이다. 용서와 은혜의 가치가 피상적으로 남용되어 산 사람조차 죽어가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양 목사는 누나를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감출 줄 모르는 양 목사는 명선이를 용서해 달라, 다 잊어라는 식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이게 사람 사는 것이냐. 자신(누나)을 위해서라도 명선이를 한국에 보내 버려라. 명선이가 곁에 있어서 좋을 게 뭐 있냐. 가까이 있어 소식 들으면 더 괴롭지 않으냐. 나도 5년 동안 명선이 뒷바라지를 해왔다. 이제 지쳤다. 더는 못 하겠다.” 

양 목사 부부는 그의 누나를 만나기 위해 10시간이 넘게 차를 몰아 마이애미까지 내려갔다. 구명 운동을 하던 사람들에 대한 불신을 누그러뜨리려 양 목사는 그저 잘못했다고, 누나와 만날 길이 없어서 명선 씨 쪽만 신경 쓰게 되었다고 빌고 또 빌었다.

그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그곳에 달려간 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의 누나와 무려 11시간 동안 대화를 했다. 그리고 끝내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누나의 마음에 작은 움직임을 발견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낙관하지는 않았다. 열린 그 마음이 언제 닫힐지도 모를 일이라고 담담하게 생각했다.

   
 
  ▲ 지명선 씨의 한국 이송을 원하는 마음을 담아 청원서에 서명하는 사람들의 모습.  
 
상처라는 또 다른 교도소에 갇힌 누나

교도소에는 지명선 씨만 갇힌 게 아니었다. 그의 누나도 불신과 두려움, 상처와 분노로 둘러진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명선 씨를 이감하면 곧바로 피해자 측인 누나에게 연락이 간다. 그럴 때면 누나는 며칠씩 잠을 못 이룬다고 한다. 먼저 보낸 딸 생각 때문이다. 양 목사의 말에 의하면 벽에 걸린 사진 속의 딸이 그처럼 예쁠 수가 없다고 한다. 

공교롭게 지명선 씨의 건강은 이송 문제가 거론되면서부터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의 속내가 궁금했다.

“아무래도 그렇다. 한국 이송 이야기가 없을 때는 그저 하루하루에 충실하면서 살려 했다. 성경도 보고, 편지도 쓰면서 그렇게 마음을 달래며 살았다. 그런데 이송 문제가 거론되면서 조급해졌다. 7월이면 결정이 날 줄 알았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고…. 이제 모든 것에 의욕을 잃었다.”

한국 이송 늦어지자 심리적 갈등 커져

하지만 교도소를 둘러싼 철책 사이로 피어난 들꽃처럼 실낱같은 희망도 있다. 명선 씨의 한국 이송을 위해 1,046명이 청원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이다. 지명선 씨의 후견인 역할을 맡고 있는 이중희 집사(마이애미한인장로교회)는 “미 국무부를 비롯해 법무부와 대법원, 플로리다 주지사와 검찰총장에게 청원서를 전달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는 청와대를 비롯해 법무부와 외무부 등 10여 곳에 청원서를 보낼 계획이다.

플로리다 주지사 산하 국외 수용자 이송 담당자는 전화 통화에서 “미 법무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하며, “종신형 케이스가 처음이어서 쉽지 않다”고 밝혔다. 그리고는 한 달 후 다시 연락하자는 여지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한국과 미국 정부와의 가교 역할을 맡은 애틀랜타 총영사관의 김용길 영사도 “수감자 인도 협정이 맺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며 “무엇보다 지명선 씨가 교도소 생활을 모범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김용길 영사에게 청원서 서명자가 1,000명을 넘었다는 말을 전하자, “일을 진척하는데 담당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고 낙관했다. 

하지만 명선 씨의 이송 문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그리고 구심체 역할을 하는 부처가 없어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듯하다. 낯선 땅에서 한국 국적의 몸으로 종신형에 처한 그의 기구한 삶이 그가 즐겨 그리는 꽃처럼 만개할 날이 올 수 있을까. 교도소에서 제공한 폴라로이드 사진을 함께 찍으며 웃으라고 말했지만 그는 좀체 웃지 않았다. 아니 표정은 굳어 있었다. 뒤돌아서는 그의 어깨가 유난히 힘이 없어 보였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헤어지는 순간, 둔탁한 철문 소리가 가슴을 내리쳤다. 

   
 
  ▲ 지명선 씨가 한국 이송을 위한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들에게 보낸 감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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