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냐 불청객이냐
영웅이냐 불청객이냐
  • 김형원
  • 승인 2007.08.17 0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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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익계산에 맞지 않으면 예수도 떠나라?

   
 
  ▲ 우리에게 예수님은 영웅입니까 불청객입니까?  
 
역사적인 위인들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반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열사로 추앙할 때 일본인들에게 그는 전쟁 영웅을 암살한 테러범입니다. 서구인들이 콜럼버스를 신대륙의 발견자로 기념할 때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그를 잔악한 정복과 압제의 선구자로 여기며 치를 떱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칠을 전쟁 영웅으로 그릴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를 자신들의 땅을 빼앗아 대적에게 준 교활한 기만자로 여깁니다.

역사적 위인들…갈리는 평가

이처럼 한 민족에게 영웅이 다른 민족에게는 압제의 화신이 되기도 하고,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존귀함 받는 사람이 다른 그룹 사람들에게는 치를 떨게 만드는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요,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 매우 활동적이고 적극적이며 무언가를 이루어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일 경우에는 그에 대한 반응과 평가가 훨씬 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려고 오셨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기존 질서와 충돌을 유발하고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과의 대립을 촉발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극단적인 두 가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역에 들어가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포악한 귀신에 사로잡힌 그를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과의 접촉도 끊어졌고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보자마자 귀신에게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올 테니 대신 주변에 있던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자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주변에 있던 돼지 떼에게 들어갑니다. 그 결과 2,000마리의 돼지 떼가 비탈을 내달아 바다에 빠져 죽게 됩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 예수는 영웅

귀신들렸던 사람은 제 정신으로 돌아와 옷을 챙겨 입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를 간청합니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귀신에 사로잡혀 세상에 해를 끼치던 자가 이제 예수님의 종이 되어 세상에 복된 소식을 전해주는 자가 된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임에 분명합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말 그대로 구세주입니다. 전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셔서 기적을 베풀어주신 분입니다. 은인이요 영웅입니다.

그러나 더욱 감사한 것은 아무 가치가 없어 보이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돼지 2,000마리를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자신을 위해서 돼지 한 마리도 내놓을 사람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전혀 인간답지 않은 자신을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존중해주는 자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더욱이 자신을 위해서 지불한 대가가 크다고 여길수록 감사의 마음은 비례해서 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릴 수도 있었고,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기꺼이 따라갈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허락하지 않아서 따라 나설 수는 없었지만, 그 대신 만나는 사람들에게 간증을 나누며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는 불청객

귀신들렸던 사람이 고침 받았다는 소식이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입기도 했고 위협을 느끼기도 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귀신들린 자는 골칫거리였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을 하기도 했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를 고쳐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매우 기쁜 일입니다. 동네가 잔치를 벌여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 달려와 감사하고 고마움을 표시하기에 마땅한 일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그들에게 군대귀신을 쫓아내시는 능력을 보이시면서 찾아오셨고,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능력을 보이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평생 한 번 볼까말까한 능력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로 영광된 경험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장에 도착하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한 후 예수님께 동네를 떠나기를 간청합니다. 능력의 예수님도,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도,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님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려고 오셨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기존 질서와 충돌을 유발하고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과의 대립을 촉발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 제공 : 뒤레판화집)  
 
첫째, 그들은 예수님의 임재조차도 세상적인 손익계산으로 저울질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원하고 그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주고 삶을 풍족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들어온 예수님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라치면 예수님을 배격하거나 그 앞에서 떠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삶을 급격하게 흔드는 것이라면 거부하고 성경을 덮어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거나 삶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것 같은 정책은 거부하는 기득권층 사람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가져올 새로운 질서를 거부하고 결국 예수님을 잡아 죽인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지만 나의 삶에 도움이 되어야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히려 손해될 것 같은 일을 요구하거나 행하시면, 스스로 예수님을 떠나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떠나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재물이 귀하기 때문

둘째, 동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명보다 자신의 재물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의 방문을 반가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돼지 떼를 그 사람의 생명보다 훨씬 귀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더라도 최소한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내 것만 움켜쥐려는 습성이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희생하고 싶지 않은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예수님을 밀쳐낸 것입니다. 마치 집값 떨어질까 염려되어 장애인 학교를 혐오 시설이라고 비하하면서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같고, 회사 수익을 더 높이기 위해 종업원들을 과도하게 부려먹거나,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수많은 종업원들을 해고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의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가난한 자로 나타나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배척한 결과, 재물보다 훨씬 더 귀한 예수님과 만나고 삶을 나누는 은총의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이기심으로 하나님을 밀쳐내는 사람들

우리에게도 이런 이기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푸는 과정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조금 사용하겠다고 하면 가진 것을 움켜쥐면서 거부합니다. 내 것 말고 다른 소스를 가져다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기득권에는 절대 손을 못 댄다고 항변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변화를 창조하는 예수님은 불청객일 뿐입니다. 나의 삶의 구조를 흔들지 않는 한에서만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나에게 손해가 나고 내가 누리고 있는 질서를 재편하려는 요구가 들어오면 예수님이 떠나기를 간구합니다. 아니면 스스로 떠날 것입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내 것을 희생할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불쌍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이권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 사회는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나눔을 실천할 마음이 있습니까?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저자인 스토우 부인이 영국에서 강연하던 중 그들을 향해 외식주의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영국인들은 자기 나라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하지만, 미국 남부에서 노예들의 강제 노동으로 재배된 면화의 80%가 영국으로 수출되고 있는 현실은 묵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국이 이렇게 재배된 면화에 대한 수입을 거부하면 미국에서 노예제도는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서 당신의 이익 1페니를 희생할 수는 없는가”하고 도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중들은 야유를 보낼 뿐이었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권을 포기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는 영웅인가, 불청객인가

희생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나눔이 없는 공생은 불가능합니다.
포기 없는 은혜 누림은 거짓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요구는 기꺼이 감사함으로 따르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면 내 삶을 흔들기 때문에 매우 불편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동일한 긍휼로, 동일한 능력으로, 동일한 요구로 찾아오십니다. 기쁨으로 맞아들일지, 아니면 불편한 마음으로 거부할지는 우리가 무엇을 더 귀하게 여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긍휼, 사랑, 생명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희생입니까?

김형원 목사 / <복음과상황> 편집위원장, 하.나.의.교회 목회

*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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