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살아야 세상이 산다
교회가 살아야 세상이 산다
  • 김영봉
  • 승인 2007.08.23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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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덕꾸러기가 된 교회…예수가 뒷전으로 밀려났기 때문

오래 전 어느 방송 기자가 교회의 각종 비리에 대해 파헤쳐 폭로한, 일종의 고발성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는 책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개 기독교 관련 서적들은 비기독교인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아니지만, 이 책은 기독교인들보다 비기독교인들에게 더 많이 팔렸습니다.

이후부터 교회 혹은 기독교 비판 서적들이 간간히 출판되면서 많은 판매 실적을 올렸습니다. 대표적인 책이 오강남 박사의 <예수는 없다>라는 책입니다. 물론 이 책은 좌충우돌 폭로성 위주의 글을 담아 놓은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와 달리, 해박한 종교학자의 근거 있는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원래 저자가 원했던 책의 제목은 <그런 예수는 없다>였다고 합니다. 교회가 잘못 가르치는 그런 예수, 사람들이 잘못  믿고 있는 '그런' 예수는 없다는 뜻으로 이런 제목을 제안했는데, 출판사가 바람을 일으킬 요량으로 <예수는 없다>라고 정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예수'라는 이름을 단 책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일 것입니다.

기독교 비판에 귀 쫑긋 세우는 대중들

그 어간에 특유한 독설과 학문성을 가지고 대중 앞에서 기독교와 교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주목을 받은 사람이 또 있었으니, 김용옥 박사가 그 사람입니다. 그분이 처음 방송에 나와 <도덕경>을 강의하고 <논어>를 강의할 때마다 중간 중간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요한복음 강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정면으로 기독교 신앙을 다루었습니다. 그분 자신은 '나는 예수의 제자다'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비판의 논조가 강하다 보니 주류 기독교로부터 아주 불편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반면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교주처럼 추앙을 받습니다.

이 현상이 보여주듯 기독교 혹은 교회를 비판하는 서적이나 강의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일반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수를 소개하는 책이나 강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일반 대중이 기독교나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에 대해서는 귀를 쫑긋 세웁니다. 기독교 혹은 교회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일반 대중이 그토록 많다는 뜻이며,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적대감이 그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정반대로 뒤집혀진 교회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교회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습니까? 미국 이민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제 추측에는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민 교회가 한국 교회보다 더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얼마나 많은 이민 교회들이 분란과 싸움에 휘말려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와중에 생각 있고 양식 있는 사람들은 유리방황하며 참된 교회를 찾아다니거나, 혹은 완전히 교회를 떠나 버립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심화되다 보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가 뭐 하러 존재하는가? 교회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으니, 차라리 교회가 없는 게 낫지 않을까? 교회 문제로 골치를 썩느니, 차라리 홀로 조용히 예수님의 말씀을 배워가며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교회가 없어지면 세상이 더 평화스러워지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여러분도 한 번쯤 그렇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글을 읽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과거에 다른 교회로부터 너무도 깊은 상처를 받은 까닭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저는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받은 상처가 너무 큽니다. 만일 제가 이 교회에서도 상처를 받게 되면, 하나님을 영영 떠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그냥 놓아두십시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라도 지키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왜 교회가 이 지경에 빠졌는가'라는 장탄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원래의 뜻과 정반대로 뒤집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래 의도에 따른다면, 교회는 문제의 해결이 되고, 상처의 치유가 되며, 외로운 사람의 위로가 되고, 곤고한 사람의 안식처가 되고, 떠돌이들의 길잡이가 되며,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안내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 반대로 작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닌 교인들의 모임

마태복음 18:18~20 말씀은 교회가 원래 어떤 존재로 의도된 것인지를 암시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문을 트실 때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제 곧 말하려는 내용을 강조하려는 어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8절)

여기서 ‘너희’는 제자들 전체를 가리키는데, 이것이 곧 교회의 모형입니다.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연합하여 모인 공동체를 말합니다. 여기서 ‘매는 것’과 ‘푸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대개는 ‘푸는 것’을 ‘용서’의 뜻으로 보고, ‘매는 것’을 ‘징계"(discipline)의 뜻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교회가 어떤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해 주실 것이며, 교회가 어떤 사람을 징계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징계를 인정하겠다는 뜻이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교회에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교회는 마치 이 땅에 파견된 하나님의 전권대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결정하고 실행하는 일들을 모두 승인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이후에 나오는 말씀에서는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19절 서두에 보면 예수님은 뒤이어 나오는 말씀을 또 한 번 강조하기 위해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신 다음,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땅에서 너희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19~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여기, 우리가 예배를 위해 모인 자리, 우리가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바로 여기를 말합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개 교회 건물이 아니라, 아무개 교회 교우들이 함께 모인 모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임 안에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능력을 부여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 사귐이 교회의 본질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에는 많은 비판자가 있을 수 있으나 경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The church has many critics but no rivals). 교회가 때때로 잘못되어 비판 받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대치할 만한 다른 단체가 존재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토록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신 대상은 이 세상에 달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위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셔서 당신을 대신해 일하도록 하셨습니다. 일을 맡길 뿐 아니라,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충분한 권위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자격과 권위와 능력을 받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여 있다’라는 말에는 ‘지속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함께 모여 영적 사귐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의 믿음 안에서 서로 모여 사귐을 나누는 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며, 그런 교회에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서로 사귀는 것’이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의 자격과 권위와 능력을 보존하는 조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사귀는 것, 그 사귐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만나 사귀는 것, 그 사귐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지어져 가는 것, 그 변화를 통해 이웃을 새롭게 만나고 사귀는 것, 그리고 그 인격적 사귐을 모든 피조물에게로 확장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독일이 낳은 위대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신도의 공동생활>라는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이 얼마나 심오한 것인지를 잘 설명해 준 바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되어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말씀을, 형제자매들의 입을 통해 전해 주십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필요하고, 나에게는 다른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동일한 소망을 가진 다른 자매와 형제를 지속적으로 만나 사귀어야 합니다.

둘째, 진정한 만남과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본 회퍼는 지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사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형제자매들을 제대로 만날 수 있고, 참된 만남과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어 주셨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이 담을 넘어설 방법이 없습니다.

셋째, 본 회퍼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사귐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에 택함을 받았고, 시간 안에서 선택되었으며, 영원 무궁히 하나로 결합되었다"고 말합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귀한 생명을 값으로 치르심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귐은 잠시 동안 즐기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인간은 한시적인 존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합니다.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한 연합으로 묶어 주셨습니다.

이 영원한 사귐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 교회이며, 이 사귐을 지속하며 심화시키는 곳이 교회이며, 이 사귐의 능력으로 세상을 향해 봉사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 사귐이 살아 있으면, 교회는 교회로서의 자격과 권위와 능력을 유지하고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교회를 조롱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경외심으로 대합니다. 하지만, 그 사귐이 살아 있지 못하면, 자격도, 권위도, 능력도 잃어버리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분과의 진지한 사귐이 없으면, 그리고 그 사귐을 통해 형제자매들을 새롭게 보고 대하는 변화가 없으면, 그 교회는 교회의 자격을 잃어버립니다. 놀랍게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조롱합니다.

교회가 천덕꾸러기가 된 이유

오늘날 교회가 왜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까? 왜 교회가 희망의 원인이 아니라 절망의 원인이 되었습니까? 오늘의 말씀에 의하면, 참된 사귐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과 사귀는 영적 생활에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한 사귐을 통해 형제자매들을 새롭게 만나는 이적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성도들의 만남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성도들의 만남마다에 예수 그리스도가 인정되고 존중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뒷전으로 밀려나, 죄인들끼리 직접 부딪히다 보니, 이런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진정한 사귐을 증발시키고, 세상의 다른 집단과 다름없게 변한다면, 교회는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나을지 모릅니다. 그런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심화시킬 뿐입니다. 그런 교회는 교인들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희망은 바로 ‘나’에게 ‘우리 교회’에 달려 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현재 교회의 상태를 두고 안타까이 생각한다는 말은 곧 우리 자신에 대해 안타까이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누구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다른 누구에게 책임을 탓하지 말기 바랍니다. 나부터 좋은 신앙인이 되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안타까움과 소망을 가지고 먼저 ‘우리 자신’을 보십시다. 세상의 희망은 ‘교회’에 달려 있고, 교회의 희망은 바로 ‘우리’ 교회에 달려 있고, 우리 교회의 희망은 바로 ‘나’에게 달려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토록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희망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어깨에 지워져 있습니다.

교회가 살아야 세상이 삽니다. 교회가 살아나기를 바란다면, 우리 교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살아 있으려면, 내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나는 아니고, 우리 교회는 아니고, 다른 누군가가, 다른 어느 교회인가가 이 일을 해주리라고 생각하면, 영원히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에서, 나부터 시작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 되게 만나 사귀며, 그 사귐에 의해 내가 치유되고 회복되며 변화하도록 힘쓰십시다. 나의 믿음이 살아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만나 참된 사귐을 위해 힘쓰십시다. 그렇게 하여 우리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참되고 거룩한 사귐이 머물러 있도록 하십시다. 그 거룩한 사귐으로써 우리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히 운행하도록 하십시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그 영예로운 자격,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의 자격에 걸맞은 교회로 회복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과 같은 높은 권위와 크나큰 능력을 우리 교회가 부여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의 사명을 우리 교회가 이루어 이 사회의 희망, 이 세상의 희망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술꾼들이 입에 올리기에 두려울 정도의 위엄과 권위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만만하게 보던 사람들이 경외심으로 교회를 바라볼 것입니다. 신성이 충만한 교회를 보고 감히 누가 경솔하게 대하겠습니까?

이 거룩한 회복의 역사가 우리 교회에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이 거룩한 회복의 역사가 우리 각자의 삶에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거룩한 신성을 지닌 공동체로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한 회복의 역사가 세상 끝까지 퍼져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의 회복을 열망하며 기도하는 모든 성도들과 교회들이 서로 울려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환하게 발산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이 거룩한 운동에 있어서 우리 교회가 한 줄기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거룩한 흐름에 성도 여러분이 모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이 글은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7월 1일 설교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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