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메아리’
‘영원한 메아리’
  • Daniel Ki Lee
  • 승인 2007.08.2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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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흘림의 징검다리로 이어진 선교의 역사

2차 세계대전을 상기하면 항상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600만 명의 유대인 처형된 비극이  저절로 떠오른다. 아무 죄도 없는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하나님께 절규하며 죽어갔다. 무더기로 처형된 후에는 시체 일부가 단백질의 원료가 필요한 비누 공장으로 보내졌고, 일부는 과수원의 나무 밑에 묻혀 거름이 되었다. 생각할수록 인간의 잔악함과 포악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차 대전의 숫한 비화 중에 막시멜리언 꼴베 신부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수용소에서 일부 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어 처형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한 포로가 "나는 기다리는 아내와 자식이 있어서 꼭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으나 이 자연스러운 요구가 나치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이때 꼴베 신부가 내가 대신 처형될 것이니 저 사람을 석방해 달라고 청원했고,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약 10여 년 전, 꼴베 신부를 추모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 꼴베 신부의 희생으로 생명을 건졌던 사람이 참석하여 과거의 아픔을 떠올렸다. 독일 정부는 이 악명 높은 수용소를 철거하지 않고 역사적 교훈의 장소로 개방하고 있다. 무척 아쉬운 것은 한국 정부가 과거 일제 시대의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 청사를 너무 쉽게 철거했다는 것이다. 한 거대한 건물이 사라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은 현장이 사라졌다는 것이 문제다. 건물 하나 철거했다고 식민지 역사가 은폐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6.25 전쟁 중에 손양원 목사가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당시 공산당원을 양자로 삼았던 사실은  세계 교회사를 조명해 보아도 그리 흔한 사건은 아니다. 같은 시기에 이런 사건도 있었다. 강원도 북쪽(이북)의 한 마을에서 대한 성공회 이 디모데 신부와 여러 사람들이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다. 한 포로가 망연자실하며 가정으로v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이 신부가 인민군에게 제의하기를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하여 죽겠으니 나를 처형하고 저 사람을 풀어달라고  했다. 이 신부는 요구대로 총살을 당했고, 그는 풀려나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로 목사 한 분과 한 청년 신사가 처형을 당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 앞에서 우리는 슬픔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무엇보다 선교의 방법론을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모습들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방법론에서 좀 견해가 다르더라도 원칙적 목적론에서 일치를 보여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순교한 두 분에 대한 정중한 예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선교의 원칙과 본질은 오라고 부르는 자 없어도 성신의 감동이 있으면 행동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부름이나 허락을 받고 선교사로 갔던 것은 절대로 아니다. 선교의 역사는 피 흘림의 징검다리를 통하여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인위적인 측면의 조명만으로는 그 핵심을 다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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