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통령 선거를 통해 본 정치와 종교의 관계'
'미 대통령 선거를 통해 본 정치와 종교의 관계'
  • 정태식
  • 승인 2008.11.17 1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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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특집1] 맥 못 춘 미국 복음주의···정치·종교 관계 재정립 예고

세계의 관심을 불러 모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 후보가 당선되었습니다. 냉전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미국 국내 정치와 경제는 물론 세계 정치와 경제의 여러 쟁점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현재 한국이 직면한 북핵 문제, 경기 침제, 국내 양극화 등 여러 쟁점에서 미국 대선은 적지 않은 변화를 초래하리라 예상됩니다. 이 변화는 국내 세력과 정파 간 역학 관계까지 바꿀 수 있습니다.

한반도평화연구원은 미국 대선과 관련하여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정태식 교수는 미국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인 양당 대선 후보들이 기독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확인한 후, 정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기독교의 정치 참여가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 효과를 방지하였다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유성진 박사는 미국 대선에서 여러 쟁점을 검토한 후 금융 위기가 판세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합니다. 손병권 교수는 미국 대선이 한반도 정세 특히 북핵 위기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합니다. 세 글이 미국 대선과 관련된 여러 쟁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한반도평화연구원 편집자 주)

마침내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끝났고 바락 오바마가 제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번 선거에서 각 후보의 신앙 문제나 낙태, 동성애 등 종교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한 후보들의 태도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번 선거에서 종교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금융 위기와 미국의 불경기 등 좋지 않은 경제 상황이 더 중요하고 급박한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종교적 이슈보다 경제 이슈가 더 중요했다는 사실이 선거 때마다 후보에 대한 종교 검증을 통해 영향력을 확인했던 미국의 보수적인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선거 초반에는 공개 토론회가 종교인들에 의해, 그것도 보수적인 교회를 중심으로 개최되었을 정도로 두 후보의 종교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졌었기 때문이다.

금년 8월에 캘리포니아의 한 대형 교회에서 보수적 복음주의교단인 남침례교 목사가 두 후보에게 질문을 던지며 대담을 이끌었다. 대학 강당에서 열린 것도, 유명아나운서가 사회자(moderator)로 나서 토론을 이끈 것도 아니었다. 이는 '미국인들이 종교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면서, '이번 선거에서도 종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상을 낳기에 충분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 종교사를 연구하는 미국 학자들 대부분은 선거에서의 종교의 역할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해왔기에 오히려 이번 선거를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본래 속성이 다르고 생리가 다른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고인이 된 필리핀의 신 추기경(Jaime Cardinal Sin)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종교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되지만 정치적일 필요는 있다.” 종교가 정치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정치 행위(politics)가 추구하는 것이 특수 이익이지 종교처럼 보편 이익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가 '정치적(political)'이라는 것은 총체적 삶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 정치이기에 이 문제에 대하여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신의 뜻에 비추어(in the light of God's will) 정치적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는 경제 행위와 함께 독점적인 속성을 지니기에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역할을 종교가 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버마스가 말하는 ‘삶의 세계(life-world)’에 대한 ‘시스템’(국가 체제와 시장 경제 체제)의 식민지화를 견제하고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하는 정도로 종교가 정치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지금까지 전개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견제와 균형의 관계를 넘어서 동맹의 관계로 치달은 때가 적지 않았다. 때로 정치 세력은 종교를 선거에 이용하기도 하였고, 종교 세력 또한 선거를 통해 사회 권력의 강화에 힘쓴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신 추기경이 함축하는 정치와 종교의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가 위협당한 적이 자주 있었다는 것이다.

▲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종교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치와 종교의 위험한 동거의 역사

미국에서 대통령 후보의 신앙이 선거에서의 중요한 척도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다. 물론 과거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이 시민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에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동질성으로 인해 대통령 후보의 신앙에 대한 특별한 검증이 필요 없었다.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세례를 통한 교회 멤버십의 획득에 사회적 신뢰성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의 미국은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였다. 케네디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저격,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뉴 레프트 운동의 확산, 도시 폭동, 워터게이트 사건, 베트남 전쟁 등으로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소설가 John Updike가 “신이 미국으로부터 축복을 거두어들였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또한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시작된 유럽 비개신교국가로부터의 이민 급증과 인도·중국·일본 등지로부터의 비기독교적인 신앙 체계의 유입으로 새로운 종교 의식(New Religious Consciousness)의 확산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인종과 문화는 물론 종교 다원화 시대를 맞이한 미국의 WASP과 보수적인 개신교 지도자들은 문화적·종교적 정체성의 위기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거에서 종교 검증의 필요성이 제기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1960년 12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케네디는 한 호텔에서 행한 선거 연설에서 투표장에 들어갈 때는 후보의 신앙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말아달라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2000년의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부시는 예수를 그가 가장 사랑하는 철학자라고 소개하면서 복음주의자인 자신의 거듭난(born-again) 경험을 강조하였다. 케네디의 요구는 가톨릭 신자인 자신의 정치적 필요에 의한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후보의 종교가 투표 결정의 정당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그의 요구가 적어도 14년간은 지켜졌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1974년 카터가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서 이 사회적 약속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물러나자 카터는 손상된 대통령의 권위와 미국의 명예 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복음주의자인 자신은 속죄를 위한 대통령(redeemer president)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닉슨의 경우 부정직함이 문제였기에 대통령의 정직성에 대한 강한 사회적 요구가 있었고 정직함의 근거를 신앙에서 찾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들의 종교적 성향과 신앙의 정도에 대한 검증이 시작되었다. 또한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이 깨어지면서 종교가 공적 영역으로 재등장하는 경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고, 결과 또한 신통치 않았다. 미리 결론을 내리면 정치와 종교 모두 상처만을 입게 되었다.

상처만 남긴 정치와 종교의 부적절한 동거

미국은 종교 실천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와 함께 행동의 자유가 허용되는 나라이다. 이러한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 그리고 행동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종교의 헌법적 '탈제도화'(constitutional dis-establishment of religion)와 함께 단계적으로 발전된다. 19세기 초 토마스 제퍼슨이 주도한 헌법 제1수정안은 ‘종교 실천의 자유’와 함께 ‘정부의 세속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국가로부터의 교회의 분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정신세계의 세속화’ 즉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 결과 모더니즘과 함께 진화론 등 창조론과 대립되는 새로운 형태의 ‘삶의 의미 체계(meaning system of life)’가 등장하였다. 2차 세계대전 후의 경제적 풍요와 함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개신교 중심의 생활 방식까지도 탈신성화(de-sacralize) 된다. 미국이 행동 양식의 자유가 주어지는 사회가 되었던 것이다. 민주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진 미국의 헌법적 정교분리가 사회적 차원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역사 속에서 정치와 종교는 여전히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왔다.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위에서 말하는 종교의 탈제도화를 거부하고 초기의 청교도처럼 시민 공동체와 종교 공동체의 제도적 일치는 물론, 시민의 정신세계와 행위 규범까지도 종교적으로 규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미국 사회는 세속화되었고 다원화되었기에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근대사회의 사회 계약 원칙에 입각하여 형성된 공적 담론의 장인 시민사회에의 참여를 근본주의자들은 거부하였다. 자신들의 의미 체계가 전부이기를 원했기에 타협과 경쟁을 요구하는 시민사회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정치권력과의 동맹을 통한 사회·정치적 영향력 행사였다. 이러한 방식 중의 하나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의 적극적인 개입이었다.

복음주의자 카터가 대통령에 출마하자 미국의 보수적 개신교, 특히 복음주의자들은 그를 적극 지지하였다. 단지 그가 복음주의자라는 이유에서였다. 위에서 언급한 닉슨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복음주의의 사회·정치적 영향력 확보를 위한 종교 지도자들의 계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카터는 재선에서 복음주의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된다.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인 그가 복음주의자들의 보수적인 정책 집행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이미 종교우익 세력의 정치적 동원 가능성을 저울질해온 정치 우익들은 레이건을 내세우는 한편, 남부의 복음주의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인 남 침례교의 제리 폴웰(Jerry Falwell)을 설득하여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를 결성하게 한다. 도덕적 다수는 '크리스천 보이스(Christian Voice)'나 '종교 원탁 테이블(Religious Roundtable)’ 등과 힘을 합하여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정치적 계산에 무게를 두는 쪽도 많지만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소개한 레이건 이후 공화당 출신의 모든 대통령 후보들은 선거에서 종교 우익 지도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백악관에 입성할 수 있었다. 물론 클린턴의 당선에서 볼 수 있듯이 선거에서 종교가 반드시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상황 등 또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 미국의 시민들 대부분은 대통령 후보들이 자신들의 종교관은 물론 개인적인 신앙 체험을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프랑스혁명이 말하는 사상의 자유, 신앙의 자유는 물론 미국 헌법이 명시한 정교분리 원칙은 종교가 사적인 문제이기에 다른 세속 영역과의 분리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을 종교사회학자들은 '사유화'(privatization)와 '분화'(differentiation)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특히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의 신앙을 검증하려고 하는 것은 신앙의 정도가 정치인의 정직성의 기준이 되며 정책 능력의 기준이 된다는 소박한 믿음을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2008 대선에서 투표하는 한 미국 시민.
대통령 만들어온 미국 보수 복음주의 우파

정치 논리와 종교 논리가 다르고 정직성과 정책이 정치 영역에서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정치와 종교의 목표에 있어서는 물론 목표 달성을 위한 내적 운영 법칙에 있어서도 상당한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단지 신앙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특정 정치인과 자신을 동일시 여기는 것은 정치 행위에 대한 추상적 동의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는 이해관계에 얽힌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을 지향할 뿐이고 정치인은 추상적인 가치를 정치 행위의 명분으로만 주로 제시한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이 종교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미국의 선거에서 적지 않았다. 예컨대 종교 우익 지도자들이 레이건의 복음주의 신앙고백이 카터보다 신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그를 지지한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카터의 우유부단과 무능력 때문이었다고 말하기도하지만 실제로는 카터가 신앙과 정책의 분리를 고집했기 때문이었었고, 이미 시작된 종교 우익과 정치 우익과의 동맹관계 때문이었다. 카터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은 카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자주 종교 우익과 근본주의의 견해에 동조하는 입장을 드러내고는 하였다.

그러나 배우 출신의 특유한 연기력을 지닌 그는 종교 우익이 요구한 학교에서의 기도 재개나 낙태 금지를 위한 헌법 수정안 등에 호의적인 태도만을 보였을 뿐 실제 아무것도 이루어낸 것이 없었다. 그는 또한 근본주의 지도자들이 요구한 보수적 복음주의자의 백악관 고위 공직에의 인선에도 거의 응하지 않았다. 종교 우익은 레이건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강한 미국을 지향하는 레이건의 경제와 외교 정책에 동조하면서 단지 대통령이 그들의 편에 서 있다는 것에 만족하였다.

그러나 레이건을 지지한 대표적 종교우익 단체인 ‘도덕적 다수’는 레이건의 임기 만료 1년 전인 1989년에 종교 우익이 미국 정치 영역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자평과 함께 해체를 선언한다. 선거에서 승리하는 법을 배웠지만 자신들이 내세우는 종교적 도덕률에 기초한 사회 정책안을 법률로 제정하지 못한 것이 ‘도덕적 다수’ 운동이 실패한 원인의 하나였다.

대 사회적 목소리만 크게 높였을 뿐 주장하는 바의 제도적 실현을 위한 정책 수립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함께 TV복음주의자들(televangelists)의 불명예스러운 몰락 또한 근본주의 운동의 실패에 일조하였다. 정치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호명하던 ‘근본주의’가 불명예스러운(notorious) 용어로 탈바꿈하여 훗날 과격한 이슬람 전사들의 호칭으로 사용되어지는 결과만을 낳았다. 무엇보다도 이는 다원화된 미국 사회에서 개신교 근본주의는 ‘도덕적 다수’가 아니라 ‘도덕적 소수’로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an element)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였다.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종교 세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치 생리상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들은 선거 과정에서 복음주의적 어법을 자주 사용한다. 이번 선거에서도 미들 네임[Hussein]이 주는 인상과 달리 자신이 이슬람교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던 오바마는 적극적으로 복음주의자들에게 접근하여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또한 초반의 선거 행보에서는 자신의 종교에 대하여 별로 말이 없었고, 다만 전쟁 포로 당시 기도만 많이 했다는 식의 모호한 신앙 태도를 보였던 매케인도 공화당의 전통적인 텃밭인 복음주의자들을 공략하기 위해 교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적극 참석하여 선과 악의 잣대를 분명히 하는 등 복음주의적인 신념을 강하게 보여주려 노력하였다.

특히 그는 2000년의 공화당 예비선거 과정에서 생겨난 복음주의자들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 당시 부시와 격전을 벌였던 매케인은 부시를 지지하는 제리 폴웰 목사와 팻 로벗슨 목사 등을 ‘불관용의 대리인(agents of intolerance)’으로 비난하면서 이 두 설교자가 공화당을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한편 이미 클린턴은 복음주의 언어를 캠페인에 사용함으로서 복음주의자들의 표를 상당 부분 얻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 대통령 부시 또한 자신을 “온정적 보수(compassionate conservative)"라고 소개함으로서 한 때 정치 우익과 종교 우익들의 염려를 사기도 하였다. 그가 빈자들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확대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애매한 표현으로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인 농부가 다수인 남부의 복음주의자들의 표를 얻는 데 성공하였을 뿐이다.

▲ 지난 8월, 릭 워렌 목사가 두 후보에게 질문을 던지며 대담을 이끌었다. 대학 강당에서 열린 것도, 유명아나운서가 사회자(moderator)로 나서 토론을 이끈 것도 아니었다. 이는 '미국인들이 종교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면서, '이번 선거에서도 종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상을 낳기에 충분했었던 일이었다.
정치와 종교의 결합이 가져오는 '오염'

미국인의 85% 이상이 종교가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70%의 미국인들이 대통령은 신앙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또한 미국인 대부분은 정치 영역과 종교 영역을 분리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와 경제의 논리가 종교의 논리와 다르다는 데 있다. 정치 행위의 궁극적인 목표는 정권 장악에 있고 경제 행위의 목표는 물질적 차원에서 최소 비용을 들여 최대 효과를 보는 데 있다. 또한 종교는 세속적 영역이 추구하는 상대적이고 개별주의적인(relative and particularistic) 가치보다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더 나아가 정치와 경제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정책(policy)이나 전략(strategy)이라 할 수 있지만, 종교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사회적 행위의 바탕은 정직(probity)과 도덕성(morality)에 바탕을 둔다. 정책과 전략은 정직함과 도덕성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정치와 경제 행위의 일반적 속성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의 속성으로서의 권모술수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인 것이다. 정치와 경제의 논리는 ‘강자가 정의다'(Might is right)라는 약육강식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정치와 결합하게 될 때 종교는 신앙의 타협이라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한편 종교와 결합하게 될 때 정치는 오히려 정치의 생명인 타협의 미덕을 상실하게 된다. 절대적인 종교는 상대화되고 상대적인 정치는 절대화된다. 거의 4세기 전 로드아일랜드에 식민지를 건설한 신학자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는 교회와 국가 사이에 벽이 없다면 '교회의 정원'(garden of church)은 '세상의 황무지'(wilderness)에 의해 오염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바마 당선의 의미와 남겨진 과제

오바마의 당선이 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의미가 미국이 강조하는 자유의 새로운 장이 연출되어졌음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정서적인 측면의 자유이다.

미국이 강조하는 자유는 3단계를 걸쳐 발전하였다. 첫째 단계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19세기 초의 종교의 ‘헌법적 탈제도화’의 결과로 얻어진 정교분리 원칙과 종교 실천의 자유이고, 둘째 단계는 ‘정신세계의 탈제도화’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들 수 있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등장하였다. 셋째 단계는 1960년대에 일어난 ‘개신교의 탈제도화’로 행동 방식에 있어서의 자유를 의미한다. 종교의 자유가 사상의 자유를 낳았고, 그 다음 단계로 행동의 자유를 낳았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이 이러한 자유의 단계적 발전의 결과로 해석될 수도 있는데 문제는 그가 취임 후 1,000일 만에 저격당했다는 데 있다. 역사의 후퇴라 할까. 흑인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넷째 단계인 ‘WASP의 탈제도화’일 수도 있다. 앵글로 색슨 인종 중심의 미국 사회 지배가 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정서적 차원의 자유라고 할 수도 있다.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인종 편견은 감성적이고 정서적 차원의 장애물로 제도적 차원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적 차별로 존재하고 있다.

문제는 사회·정치적 엘리트인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 아직도 미국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다수의 흑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단지 희석시키는 표면적 효과에 그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인종 편견과 차별을 사회 에토스적인 차원은 물론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걷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오바마의 당선을 시점으로 정서적 차원의 자유를 미국이 실질적으로 이루어내는가가 앞으로의 과제라 할 수 있다.

정태식 / 경북대학교 지역개발연구소 연구초빙 교수, 정치종교사회학 전공 Ph. D.

* 이 기사는 한반도평화연구원의 허락을 받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한반도평화연구원 홈페이지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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