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정치
설교와 정치
  • 정용섭
  • 승인 2007.09.08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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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언급은 소극적이어야…정치적 판단 강요하는 건 신학적 월권

한국 교회 강단의 특징은 비정치적이라는 사실에 있다고 해서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의 설교는 하나님의 축복·전도·은혜·사랑에 집중된다. 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에도 설교자들은 믿고 죽어서 천당에 가기 위해서 믿음 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에 치우쳤다. 더러는 군사독재를 비판하고 민주주의 문제를 언급하는 설교자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기독교회관이 있는 종로 5가를 중심으로 정의와 평화를 위해 모였던 목사님들을 가리켜 소위 운동권 목사라고 불렀다. 이들은 하나님나라의 정치적인 차원을 강조했다. 유신헌법을 비롯한 긴급조치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이들의 설교는 자연스럽게 정치와 경제를 중심으로 사회 문제에 깊숙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소수였다.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에만 매진했다. 군사독재 시절에 한국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우리의 슬픈 역사적 사실이다. 정치적 지평을 완전히 무시하는 설교자들이나 주로 정치적 지평에 기울어져 있는 설교자들 이외에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던 목사들도 제법 많았다. 이들은 복음의 정치적 차원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과격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요청을 일반적인 차원에서 외쳤다.

한국 교회와 정치의 관계는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로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더 이상 민주화 투쟁이 필요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런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1990년대 초의 동구권의 몰락이 한몫 했다.

이런 상황이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10년 동안 계속되다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부 대형 교회 목사들이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무현 정부를 친북좌파 정부도 매도하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정치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오늘 정치적 설교를 하는 이들과 70~80년대 정치적 설교를 하던 이들이 전혀 궤를 달리한다는 사실이다. 70~80년의 정치 설교는 민주화와 경제정의가 이슈였다고 한다면 지금의 정치 설교는 주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이슈다. 21세기에 반공주의 설교를 하는 교회는 대한민국 이외에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몇몇 대형 교회만이 아니라 총회 차원에서 이렇게 정치적으로 대처하는 경우도 있다. 장로교 통합은 지난 몇 년 동안 사학법에 매달려왔다. 그것에 한국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듯이 사학법 재개정을 위해서 대대적인 집회를 개최했고, 순교의 자세로 투쟁하겠다고 공언하고, 심지어 총회장을 비롯한 대표자들이 삭발까지 했다.

한국 정치의 민주화나 경제 정의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투쟁이나 교회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투쟁에 의해서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얼마나 수모를 당하는지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하나님나라와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주일공동예배 설교에서 이기적이고 편향적인 정치 문제가 아무런 여과 없이 대량으로 생산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학적인 미숙성일 뿐만 아니라 모종의 종교정략이 가미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들과 다른 정치 설교도 한국 교회 안에 여전하다. 이들은 70~80년 식의 투쟁을 고수하는 이들이다. 구체적으로 거론한다면 평택 대추리 미군부대 확장 저지 운동이나 한미FTA 반대 투쟁에 나서는 이들이 그들이다.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서 극단적인 방식으로 투쟁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오늘 레드컴플렉스나 종교 권력에 치우친 이들과 분명히 구분되기는 하지만 설교와 정치의 관계에서 유연하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고 있는 자신들을 수구 보수적인 입장에서 정치 설교를 하는 이들과 한 통속으로 보는 것을 그들은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 심정을 이해는 한다. 그들은 분명히 역사를 과거의 냉정 시대로 되돌리려는 설교자들과 다르다. 오히려 이들에 의해서 역사는 조금이라도 앞으로 진보할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도 목사는 개인적으로, 또는 연대의 방식으로 정치적인 행위를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 한다. 필자도 이런 일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설교와 정치의 관계에 놓여 있다. 설교는 정치적 지평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행위이다. 물론 하나님나라는 정치적 지평을 포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정치 행위가 곧 하나님나라는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정치적으로 다가오지만 정치가 하나님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곧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사랑이 곧 하나님이라고 직결시킬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서 한미FTA를 구체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바로 복음에 충실하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도대체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걸까? 이런 문제는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미묘한 사안이기 때문에 그것에 문외한인 목사가 왈가왈부하기는 적합하지 않다. 목사가 개인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겠지만, 청중들의 영혼과 구원론적 영성의 차원에서 소통해야 할 설교의 자리에서 이것의 가치론적 판단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는 것은 설교의 케리그마적 성격을 정치 안으로 축소시키는 행위이다.

필자의 생각에 가능한대로 설교에서 정치적 언급은 소극적이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를 향한 방향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까지 시시콜콜하게 언급하지 않는 게 좋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근거해서 인간과 세계와 우주의 생명과 그것의 구원을 들어야 할 청중들에게 설교자 개인의 정치적 판단을 강요하는 건 신학적 월권이 아닐는지.

정용섭/ 샘터교회·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 이 글은 한국 <뉴스앤조이>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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