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이 직접 구호품 갖고 북한에 갔으면
한인들이 직접 구호품 갖고 북한에 갔으면
  • 강희정
  • 승인 2007.09.09 1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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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북한 돕기 선구자' 유진벨재단 스티브 린튼 이사장

   
 
  ▲ 1995년 당시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평양 봉수교회를 방문했을 때 스트브 린튼 박사가 자문 역으로 활동하던 모습.  
 
북한은 올 8월에 내린 집중 호우로 평양시를 비롯하여 평안남도와 황해북도, 강원도 지역 일대에 심각한 홍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북한중앙기상연구소는 이번 수해가 1967년 8월 평양에 발생했던 홍수 이후 40년 만에 최대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북한 당국은 8월 말로 예정되었던 2차 남북정상회담을 10월 초로 연기하기까지 하였다.

1995년 북한이 큰 수해를 입었을 당시에 식량 지원에 나서 이후로 대북 의료 지원 사업을 계속하고 있는 유진벨재단 이사장 스티븐 린튼 박사 인터뷰를 통하여 대북 지원 사업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알아 보았다. (이 인터뷰 기사는 이메일을 통해 질문을 보낸 것에 대하여 유진벨재단의 홍보 담당 김은영 간사가 스티브 린튼 박사께 답변을 받아 보내온 것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 1996년 당시 유진벨 재단이 지원한 식량을 운반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1995년 유진벨재단이 북한 지원 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유진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미국 '유진벨 100주년 기념 재단'이 설립되었고, 해외에서 북한을 인도적으로 돕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호응 속에서 대북 지원 통로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월드비전, 빌리 그레이엄 목사 등의 북한 방문 자문 역으로 북한을 오고 가며 북한의 실정을 알게 되고, 한인 교민들이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확실한 통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 교민들의 정체성을 살리면서 지원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 당시 북한 홍수 사태는 어느 정도였으며, 후원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가?

당시 홍수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 이상으로 말하기가 힘들다. 1995년 첫 해 대북 지원액은 10억여 원이었고  곡물 57콘테이너 분량이었다. 1996년에는 2억 원의 지원액에  옥수수 4,630톤 등이었다.

- 95년 북한 홍수 당시는 유진벨재단 설립 초기여서 많은 사람들의 후원을 받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떻게 지원이 가능했는가?

당시 큰물(홍수) 피해로 식량난을 겪고 있던 북한 동포들을 위해, 북한에 식량 보내기 운동을 전개해 많은 해외 동포들의 도움을 얻었다. 유진벨 설립 초기에는 오히려 지원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 많았고, 대신 지원을 처리할 수 있는 기관들의 수는 훨씬 적었다. 우리가 식량 지원을 시작하며, 가장 효율적이고 합법적이며 투명하게 설계된 프로그램을 홍보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지원하길 원했다. 그리고 이스트게이트 인터내셔널 기구 및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유진벨을 통해 대북 지원 활동을 펼쳤다.

   
 
  ▲ 북한의 한 배급소에서 식량 날짜를 공고한 모습. (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90년대 중반 이후로 계속된 지원으로 북한의 식량 사정 및 경제 상황은 많이 좋아지지는 않았나?

물론 식량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 95년도에는 북한 사람들이 큰물이 닥쳤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으나, 시간이 갈수록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를 알아가는 듯했다. 많은 단체와 국가의 지원, 자신들의 노력,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 호전, 이 세 가지가 식량 사정이 좋아진 큰 원인인 듯하다.

- 북한에 지원하면 군부나 특수 계층으로 들어갈 뿐 북한 주민들 생활 개선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다른 단체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유진벨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우리 사업은 투명성이 높아서 거의 100%가 우리가 지정된 자리에 들어가고 있다. 필요한 물품 및 의약품을 지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가서 지원품이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또 쓰여지고 있는지까지 확인한다. 그리고 후속 지원 필요 여부를 판단하여, 필요에 따라 후속 지원까지 수년을 걸쳐 계속한다.

- 유진벨재단의 대북 지원 사업의 형태는 후원금들을 모아서 의료 물품이나 장비 등을 사서 보내는 것으로 '소모성 사업'(생산 설비나 시설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진벨재단의 대북 지원 사업의 효과는 어떻다고 보는가?

우리는 북한 의료진과 한 배를 타고 있다. (우리의 심볼마크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한에서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하며, 우리가 하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도와줄 뿐이다. 예를 들어, 북한 의료진이 기술과 열정은 있으되, 의약품과 의료 장비들이 부족해서 환자를 치료하기에 어려움을 겪기에 우리가 그 의약품 등을 보내주는 것이다. 이 방식이 더욱 전략적으로 지원금당 더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가 있다.

   
 
  ▲ 1996년 당시 식량 분배를 기다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 (사진 제공:유진벨재단)  
 
   
 
  ▲ 1996년 당시 유진벨에서 지원한 식량을 분배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 (사진 제공:유진벨재단)  
 
- 올해의 홍수 피해가 1967년 이래 최악이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심각한가? 1995년 당시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이야기인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에서 유진벨재단에 긴급 복구 지원 요청을 한 것으로 보아 심각한 수준이라 추측하고 있다.

- 뉴욕의 북한 대표부로부터 홍수 피해에 따른 복구 지원 요청을 받았다고 하는데, 지원 현황은?

지원 요청 메일은 지난  8월 중순 경에 받았다. 이에 따라 8월 30일에 의료 지원 물품을 선적할 때 무너진 집과 병원을 복구하고 임시 거처를 마련할 수 있는 수해 복구용 비닐을 포함시켰다. 현재는 집중 호우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북한 수재민과 환자들에게 생필품과 이불 및 옷가지 등을 대체할 방한복을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

   
 
  ▲ 유진벨재단 이사장 스티브 린튼 박사.(사진 제공: 유진벨재단)  
 
- 대북 지원 사업이 계속되면서 후원자들의 관심과 후원이 줄어들고 있지는 않는가?

물론 줄어드는 것도 있다. 시간이 갈수록 필연적으로 장기간 후원한 사람들이 피곤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다양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후원 방법을 제시할 경우에 새 후원자를 발굴할 수 있고, 계속 후원하시는 분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식량 배급에서 그치지 않고, 결핵환자 돕기에 나섰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의료 체계를 구성하고, 전문가에 의해 설계된 의료 체계를 북한에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스티브 린튼 박사께서 특별히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95년 북한에 지원이 필요했을 때 911이 미국 제네바에서 울렸는데,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후에야 북한으로 지원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행히 북한이 911뿐 아니라 119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119를 돌렸을 때는 한국 서울에 울려지게 되고 상황이 급하면 금방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큰 발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에는 남북 관계의 호전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더 좋아져서 저희 유진벨이 가듯이 한인들이 직접 구호품을 가지고 북한에 갈 수 있는 날을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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