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끈' 때문에
'그 끈' 때문에
  • 정양오
  • 승인 2007.09.20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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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앞두고 영원한 생명의 끈을 기억하며

   
 
  ▲ 우리의 발걸음과 마음이 가족들을 향하는 것은 막연히 혈육으로 맺어진 '어떤 끈' 때문이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보혈로 휘날리는 그 붉은 구원의 끈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사진 제공 박철)  
 
지난해 추석이 지나고 동생으로부터 "어떤 끈"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받았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산다. 그래서 명절 때면 차례대로 순회하며 모이는데 작년에는 전라도 외각에 살고 있는 둘째 형님 댁에서 모이게 되었단다. 머리를 굴릴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굴려가며 온통 주차장이 되어버린 샛길·국도·고속도로를 번갈아 오갔지만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거의 10시간 이상을 헤맸단다.

명절이고 뭐고 기분은 이미 엉망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큰 형님네와 다른 형제들도 무슨 사고나 나지 않았는지 걱정하며 기다리다 지쳐버렸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대화도 프로그램도 신통치 않았던지 재미가 별로였던 모양이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면서도 ‘어떤 끈’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였다. 나도 ‘어떤 끈’ 때문인지 구름 낀 메일을 받고 나서 가슴이 답답해왔다.

순간 여호수아서의 서두에 아름답게 나부끼는 붉은 줄(the scarlet rope)이 떠올랐다. 즉시 “그 끈”(The Rope)이라고 제목을 바꾸고 답신을 하였다. 라합은 그의 이름 앞에 기생(prostitute)이라는 신분의 별명이 붙어 있었다. 게다가 여리고 당국 입장에서 보면 라합은 공무방해, 간첩 은닉, 국가 기밀 누설 등을 저지른 추호도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요, 매국노(賣國奴)임이 분명하다. 어떤 분은 라합이 거짓말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기도 하지만 히브리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믿음으로 라합은···"이라고 깔끔하게 정리한다.

당시 이스라엘의 광야 교회는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범람하는 요단강을 도하(渡河)하고, 견고한 여리고 성 정복이라는 난제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 적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 정찰병들은, 그만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여리고 성의 안전기획부 대공수사대에 거동이 수상한 자로 신고되어 수사망이 좁혀졌고 도망하다 기생 라합의 집에 몸을 숨겼던 것이다. 수사대가 기생 라합의 집에까지 들이닥쳤을 무렵 라합은 재빨리 "그들이 우리 집에 온 것은 사실이나 어디서 왔는지 몰랐고, 저녁 때 성문으로 탈출하려고 나갔으니 급히 추적하면 한 건 올릴 수 있을 거라"며 둘러댔다.

라합은 이스라엘 스파이들을 자기 집 옥상 삼대 더미 속에 숨겨 놓았다. 그 후 라합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털어놓았고 구원의 신호를 보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 안다. 이 땅 백성은 이스라엘 말만 들어도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는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홍해에서,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신 것을 안다.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다. 나의 부모·형제·그들의 가족을 죽는 데서 건져달라"(수 2:1-21)고 했다.

생명의 은혜를 입은 정탐군들은 기꺼이 구원 서약을 하고 약속의 표시로 그들을 성에서 탈출시킬 때 사용했던 그 붉은 밧줄(the scarlet rope)을 창가에 매달아 표시하기로 했다. 마치 옛날 애굽의 고센 땅에서 하나님의 선민들이 출애굽 하던 날 문설주에 빛나던 유월절 어린양의 붉은 피와, 십자가에서 흘리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붉은 피를 떠올리게 한다.

라합이 이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 때의 심정이 어떠했었을까. 언제 수사대가 또 들어 닥쳐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 이 간 큰 여인의 눈빛은 어떠하였을까. 그 줄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 때마다 말없이 큰 소리로 말하는 이 끈의 비밀을 간직하며 아직 농담으로 여기고 믿지 아니하는 사랑하는 친지, 가족들을 보며 얼마나 안타까워 가슴 조였을까.

한국의 추석 귀향길은 온통 주차장이요, 그마저도 해외에 있으면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우리의 발걸음과 마음이 가족들을 향하는 것은 막연히 혈육으로 맺어진 ‘어떤 끈’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끈, 십자가의 보혈로 휘날리는 그 붉은 구원의 끈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정양오 / 남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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