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의 고려인
아프간의 고려인
  • 양국주
  • 승인 2007.10.0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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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주의 아프간 이야기 ③

남한보다 7배 정도 큰 면적을 가진 아프간의 인구는 3,000만 명 정도다. 기원전 327년 무렵 인도까지 세력을 펼쳤던 알렉산더 대제는 간다라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아프간과 파키스탄 접경 지역에 그리스-마케도니아 병사들을 남겨 놓았다. 2300년 전의 일이다. 아직도 누리스탄으로 불리는 20만 명의 그리스 후손들이 2,000미터가 넘는 고지 판슈르 지역에 살고 있다. 코발트색의 투명한 눈을 가진 이들은 한눈에 보아도 유럽계임을 알아 볼 수 있다

누리스탄 이외에도 아프간에는 200만 명에 가까운 하자라족이 있다. 이들은 지난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유럽 정벌에 나서면서 아프간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남겨 놓았던 몽골 후손들이다. 모국 몽골이 가난하다보니 귀환할 수도 없고 정든 터전을 떠날 수도 없어 900년 가까이 남의 땅에서 천대 받으며 산다. 이들은 시아파인 관계로 수니 무슬림들인 탈레반으로부터 혹독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인구 250만 명 정도인 몽골 정부 입장에서 보면 아프간에 남아 있는 하자라 족은 결코 적은 수효가 아니다. 나라가 가난하다보니 이들을 데려 올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일자리 찾아 아프간에 넘어온 고려인…차별 심해빵

이란과 아프간을 점령했던 알렉산더와 몽골의 칭기즈칸, 이들은 제국 건설의 야망에 사로잡혀 간다라 지역과 페르시아 제국의 거친 광야에서 피곤한 육신을 혹사했다. 오히려 천하를 경영하려던 원대한 야망 때문에 영웅의 후손들이 객지에서 오갈 데 없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이번 아프간 인질 사태를 즈음하여 열흘간에 걸쳐 아프간의 여러 곳을 돌아보며 영웅이 영토 확장을 위해 벌린 싸움 뒤에 애꿎은 백성만 고통당하는 애환을 눈여겨보았다.

피랍되었던 샘물교회 팀들이 아프간에 도착하자마자 일주일간을 봉사하며 지냈던 마자리샤리프는 아프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칸다하르가 파슈툰족의 근거지로 탈레반의 거점이 되다보니 경제 활동이 여의치 않은 탓에 도시 규모가 마자리샤리프 다음으로 밀려나 있었다.

찾아 중앙아시아 헤매는 우리의 자식들

나는 마자리샤리프를 두 번째 방문했다. 3년 전 아프간으로 건너오기 전 우즈베크의 떼르미즈 유엔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났던 운전수는 고려인 2세였다. 그의 아버지는 테르미즈 항의 세관장이었는데 그를 마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아프간에 전후 복구 사업이 활발하게 진척이 되다보니 일자리를 찾아 우즈베크이나 키리키즈스탄 등지에서 아프간으로 넘어 오는 고려인이 많다는 것이다.

공산 치하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연해주의 한인들. 30만 명에 다다르는 고려인들 가운데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아프간의 쿤두즈와 마자리샤리프로 대거 이주해 오고 있다. 이들은 세계 정복을 꿈꾸던 영웅의 후예도 아니다. 지금은 구소련의 해체로 가난을 면하고자 빵을 찾아 구천을 헤매듯 중앙아시아를 헤매는 우리의 자식이다.
 
필자를 안내했던 바리롤라는 자신이 탈레반 치하에서 자동차 사업을 하면서 하자라족들이 받았던 혹독한 차별을 증언해주었다. 마자리샤리프 인근에는 8,000명에 가까운 하자라족을 집단 생매장한 곳이 있지만 드러내 놓고 항변조차 못한다는 것이다. 변변한 직업조차 갖기 어려웠던 하자라족은 탈레반의 노역을 하거나 총알받이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들이 모여 사는 북부 바미얀 지역에는 하자라 부족의 목을 잘라 탑처럼 쌓은 곳마저 있다.

이산가족 문제만큼이나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을 돌보는 일은 통일 한국의 무거운 과제로 남는다. 해외 동포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대한 관심과 배려가 남다른 때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이들이 하자라 부족과 누리스탄처럼 천민으로 살게 된다면 그 죄는 우리 민족 모두가 뒤집어 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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