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 준다는데 뭐, 폭력이라고?
좋은 것 준다는데 뭐, 폭력이라고?
  • 김종희
  • 승인 2007.10.29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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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하는 예수' 못지않게 '예수 전하는 나'도 중요

여름에 한국 다녀온 2개월을 빼면 작년 12월말부터 올해 10월말까지 8개월 정도 미국 생활을 했습니다. 직업이 그래서 그렇겠지만,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대개 목사 아니면 신학 교수, 일반 평신도라 해도 기독교 사역을 하는 이들입니다. 한국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도할 기회도 별로 없고, 누가 나에게 전도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생각을 거의 안 했는데, 한 달 전부터 가족이 함께 살게 된 다음 새삼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혼자 지낸 지난 7개월 동안 그 누구도 저에게 자기 교회 다니자고 권유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워낙 믿음이 좋아 보이니까 알아서 교회 정해서 다닐 거라고 착각했을까요, 아니면 저런 사람 우리 교회 다니면 피곤한 일이 많이 생길 거라고 지레짐작했을까요.

혼자서 교회를 못 정하고 저자 구경하듯이 이곳저곳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맨해튼 할렘에 있는 작은 미국 교회를 정해서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말도 거의 안 통하고 거리도 제법 멀지만,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처럼 편안함을 주는 곳이어서 그런지 그럭저럭 잘 다니고 있습니다.

가족이 합류하면서 맞은 변화 중 하나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한국인 학부모들을 만나게 되고, 세탁소를 가거나 심지어 우체국을 가도 한국인 직원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래도 아내가 동네 아주머니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길게는 십 수 년 이곳에서 산 터주들에게 아내는 한눈에 보아도 '초짜'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초짜가 터주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얘기는 "교회 다니세요? 교회 정했어요? 우리 교회 와 보세요" 하면서, 전도라기보다는 교회 인도를 하는 것입니다. 눈치 없이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라요. 지금 알아보는 중이예요" 하고 대답하면, 제대로 걸린 것입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호구조사에 들어갑니다. "여기는 언제 왔냐" "일자리를 구하고 있냐" "남편은 뭐 하냐" "애들은 몇 명이고 몇 살이냐". 꽤 자세히 묻는 것 같지만 기실 자세히 듣지는 않습니다. 이 얘기들을 마음을 담아서 정성껏 듣기에는, 우리 교회에 대해서, 우리 목사님에 대해서, 우리 교회 행사에 대해서, 초짜에게 알려줘야 할 고급 정보들이 머릿속에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아주머니들에게 소개받은 교회들은 하나같이 뉴욕에서 꽤 알려진 큰 교회들입니다. 공교롭게도 작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부터 교회 소개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교회가 커지는 데는 갖은 이유가 있습니다만, 이처럼 자기 교회를 열심히 알리는 교인들의 기여가 결코 작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교회에 대한 자부심, 한편으로는 교회에서 받은 전도 훈련이나 은혜가 이런 열심을 내게 만드는 요인일 것입니다.

이런 열심 자체를 탓할 까닭은 없습니다. 하지만 뭔가 순서가 바뀐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서 난다 긴다 해봐야 이곳에 오는 순간 모든 것이 산 설고 물 설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 짐바리를 싸들고 왔다 해도 모든 것이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희망과 불안의 교차로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 교회 인도 내지 전도가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이것이 바람직한 우선순위는 아닐 것입니다.

   
 
  ▲ 내 교회, 내 예수를 먼저 소개하기 전에 상대방을 알아가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신상 정보 취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기'를 뜻합니다.  
 
이민자가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그를 마중 나간 사람의 직업이 고스란히 이민자의 직업이 되어버린다는 우스갯소리가 근거 없지는 않아 보입니다. 낯선 곳에서는 조금이라도 연줄이 닿을 만한 것을 찾으면 그걸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본능이 작동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그런 본능을 훨씬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종교 인구 비율이 더 높은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이민 교회는 이민자들에게 종교적 울타리가 되어주는 동시에 연줄 역할을 해주게 됩니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렵고 힘들 때 서로 돕고 의지하는 것은 어디서나 필요한 일이지만, 특히 이민자들에게는 더욱 절실합니다. 그로 인해 영주권 비리, 기득권 싸움, 끼리끼리 문화가 일상화되는 것이 큰 문제이지요.

아무튼 한국에서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는 장면, 특히 지하철 안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큰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승객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장면을 여기서는 목격할 수 없습니다. 간혹 맨해튼에 있는 관광 명소에서 백인들이나 흑인들이 큰소리로 전도하거나 전도지를 나눠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만, 한인들에게 일상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이단 집단의 교주들이 맨해튼의 대형 극장에서 집회를 열 때 추종자들이 열심히 안내지를 돌리는 정도는 더러 있기도 합니다.

작게 보면, 한국 교회의 전도 방식이 노방전도에서 관계전도로 질적인 변화의 과정에 있다고 넉넉하게 보아줄 수 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교회 인도나 전도도 그 중간 어디쯤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교회, 내 예수를 먼저 소개하기 전에 그 사람을 알아가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신상 정보 취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기'를 뜻합니다.

요즘 전도가 안 되는 것은 '내가 전하는 예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전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면, 상대방 또는 전도 대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과 열심보다 자기 성찰이 우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 개인의 전도 방식만이 문제이겠습니까. 크게 보면, 한국 교회의 선교, 더 크게 보면 한국 교회의 신학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봉사를 앞세워 선교하다가 납치되었던 사건은 한국 교회 선교가 질적으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교회들은 여전히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기독교가 싫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선교하는 것은 '종교적 강간'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강간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폭력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내 입장에서야 '좋은 것'을 상대방에게 주고 싶겠지만, 상대방이 그걸 받아들일 맘이 아직 없을 수 있고, '그것'은 좋은데 '그걸 주는 사람'이 싫어서 거부할 수도 있는데, 그걸 강요한다면 그 순간 폭력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폭력적인 전도, 폭력적인 선교를 하는 배후에는 '유일' '절대' '오직' 등의 단어로 표현되는 한국 기독교 특유의 신학적 코드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코드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에게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걸 양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싫다는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강요하지 말라'고 하면 마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가치를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그런 오해는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신념이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저 놈이 나를 무시한다"면서 역정을 내는 겁니다. 그러면서 폭력이 재현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곧바로 내뱉는 말이 바로 "너 종교다원주의자구나" "너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는구나" 하는 말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자존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엉뚱한 오해를 하지 않을뿐더러 무례하지도 않습니다. 겸손과 교양으로 상대방을 대합니다. <무례한 기독교>(IVP)의 저자 리처드 마우 교수는 "이런 무례한 태도가 잘못된 하나님 이해와 인간 이해에서 비롯한 것임을 지적하고, 신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겸손하고 교양 있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한국 교회, 기독교인 개인들에게 꼭 필요한 가치를 하나 꼽으라면,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모습을 들고 싶습니다. 상대방을 내 수준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수준으로 아예 내려가버리는 것. 선교할 때, 전도할 때, 교회를 소개할 때 그 마음을 품고 있으면 태도와 방법이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지금 우리에게 '시민적 교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큰딸이 어디선가 들은 얘기라면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참된 우정은 비가 올 때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함께 맞는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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