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을 지불하라"
"값을 지불하라"
  • 김영봉
  • 승인 2007.11.0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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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설교 [영화관에 가신 예수님] 2 : 시편 51:1-17

1.
영화 <밀양>의 이야기는 한국의 몇 안 되는 구도적 소설가 이청준 씨의 단편 <벌레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 소설을 소설가 출신의 영화감독 이창동 씨가 그 나름의 새로운 이야기로 각색한 것입니다. 원래 이청준 씨는 <벌레 이야기>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값싼 용서’에 대해 비판하려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맑은 하늘을 즐기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창동 감독은 그 소설의 이야기의 틀을 많이 바꾸기는 했지만, 이 주제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애와 박도섭이 마주하는 교도소 면회 장면은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난주에는 ‘신애의 연극’이라는 관점에서 이 장면을 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참된 용서가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이 장면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박도섭의 고백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맨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저는 이 장면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수치심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마치 숨기고 싶었던 기독교의 부끄러운 부분을 들킨 것처럼 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박도섭과 신애,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고 있고, 두 사람 모두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말하고 있지만, 두 사람이 말하는 그 모든 말들이 가식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단지 그들만의 문제라면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애와 박도섭이 연출한 장면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얼굴이 화끈거렸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기독교를 비판할 의도를 전혀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기독교의 모습을 그리려 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 안에 반영된 우리의 자화상이 우리 자신을 더더욱 낯 뜨겁게 만듭니다.

2.
박도섭이 신애에게 하는 고백을 듣고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그가 고백한 것으로 보아, 그리고 그의 표정이나 행동으로 보아, 그가 뭔가 초월적인 영적 사건을 경험한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박도섭이 신애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죄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죄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십시다. 자식들이 서로 싸워 한 아이가 상처를 입었다 합시다. 그럴 경우 상처 입은 자식보다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픈 법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형제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상처 입은 그 형제에게도 사과해야 하지만, 부모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자식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었으면,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그 사람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51편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지은 회개 시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은 전성기 시절에 생애 가장 수치스럽고 악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뒤탈을 없애기 위해 우리야를 불리한 전쟁에 내보내어 죽게 한 것입니다. 다윗은 완전범죄를 꾸미려 했지만, 예언자 나단이 찾아와 그 죄를 고발합니다. 대이스라엘 왕국의 황제 다윗은 무력한 한 예언자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오늘 읽은 회개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주님의 판결은 옳으시며 주님의 심판은 정당합니다”(3-4절).

우리야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음을 깨달은 다윗은 맨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야와 밧세바,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 모든 사람들을 지극히 아끼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준 것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권력을 오용한 것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셨던 신뢰를 배반한 것에 대해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3.
이런 빛에서 보면, 박도섭이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 받았다고 고백한 대목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잘못이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행하는 잘못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받을 때도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는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알기 어렵고,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통회 자복하고 용서를 받고 나면, 자신이 상처를 준 그 사람 앞에 가서 잘못을 시인하고 처분을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므로, 당사자를 대면하고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필요한 모든 희생과 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이 생깁니다.

어느 무신론자 철학자가 죽으면서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들 기독교인들에게 부러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용서하실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용서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실로, 우리를 용서해주실 분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 같을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찾아가 기댈 언덕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기댈 언덕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품어주시고 씻어주시며 새롭게 해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 은혜 밖에는 죄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다른 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값싼 용서’라고 비판합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회개의 기도만 드리면 조건 없이 용서를 받는다니, 이것처럼 값싸고 형편없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저도 한때 이 용서의 교리에 대해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의 이해가 짧을 때 제게는 십자가가 마치 ‘용서 자판기’(Forgiveness Vending Machine)처럼 보였습니다. 십자가에 ‘회개’라는 동전을 넣으면 ‘털컥’ 하고 ‘용서’가 나오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것이 마음에서 수긍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냥 무조건 믿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믿고, ‘회개’라는 동전을 넣고 ‘용서’라는 물건을 손에 쥐곤 했습니다. 그렇게 받아든 용서는, 마치 질 나쁜 자판기 커피처럼, 값싼 위로를 제공하고는 잠시 후 잊혀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제 자신의 죄에 대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며칠 동안 금식하며 십자가 밑에서 기도로 지내며 눈물의 나날을 보낸 다음에야 비로소 회개와 용서의 진리에 대해 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은 1달러 지폐처럼 값싼, ‘입술만의 회개’가 아니라, 온 몸으로 떨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참된 회개임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는 질 나쁜 자판기 커피처럼 잠시 잠깐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회복시켜 주며,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숨겨진 상처까지도 치유하는 엄청난 능력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제야 비로소, 우리의 죄에 대해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치러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온 몸으로 떨고 마음의 찢김을 경험해보신 분이라면 누구든지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진실로 통곡하고 마음을 찢는 것이 얼마나 큰 값을 치르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거짓된 회개, 습관적인 회개, 교리적인 회개는 값싸고 쉬운 일이지만, 진정한 회개는 값비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 위에서 치르신 그 값비싼 대가에 의지하여 치르는, 아주 값비싼 대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참된’ 용서를 받는 일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은총입니다.

4.
박도섭은 진실로 회개했을까요? 그가 받았다는 용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참된 용서일까요?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신애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고백하는 박도섭의 태도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지 않습니까? 신애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뻔뻔해 보이지 않습니까? 박도섭은 신애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어야 하고, 눈물 콧물로 울며 잘못을 빌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가 받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진짜였다면 더욱더 그렇게 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가 신애를 만나기 전에 감옥 안에서 얼마나 통회하며 회개했는지 모르지만, 그토록 큰 아픔을 준 당사자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심하게 무너져야 하지 않았을까요?

앞에서 저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나면 자신의 죄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을 대면할 용기를 얻게 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이 피해를 입은 당사자 앞에서 뻔뻔하게 행동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형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저의 죄로 인한 상처가 치유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는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되는 한 편, 그들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해 더욱 여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로 인해 사람들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 더욱 예민해지고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하게 됩니다.

시편 51편 4절에서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다윗이 고백한 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마치 “나는 주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습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한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준 아픔을 더 예민하게 느끼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후,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상처를 회복시키기 위해 힘썼을 것입니다.

신애가 교도소를 찾아가기 얼마 전, 운전하다가 한눈을 파는 바람에 지나가는 행인을 칠 뻔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행인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이 말은 박도섭의 고백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이 장면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박도섭이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는 말로 때우는 것 같은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신애를 대신하여 분노를 느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치장되어 있는 그 무책임한 사과로 인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용서를 시도하는 신애는 안쓰러워 보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용서를 말하는 박도섭은 가증스럽게 느껴집니다. 파렴치해 보일 정도입니다.

기독교 복음이 잘못 표현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증스럽게 느껴질 수 있음을 우리 모두는 심각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기독교 복음의 대변자인 양 자처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소위 믿음 있다는 사람들,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들, 직분 높다는 사람들, 열심이 특심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분들은 더욱 자중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생각 없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인해 기독교가 얼마나 오해받고 지탄받고 있는지요! 차라리 ‘하나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내세우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5.
기독교가 성서에 바탕하여 가르쳐 온 용서는 그렇게 값싼 것도 아니고,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는 온전한 용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회개의 3R(Three R’s of Repentance)이라고 부르는데, 첫째가 Repentance(회개), 둘째가 Restitution(보상), 그리고 셋째가 Reformation(개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repentance이며, 자신이 끼친 잘못에 대해 어떻게든 보상하는 것이 restitution이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자신을 고치는 것이 reformation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온전한 회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박도섭이 신애를 만나기 전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그는 restitution에 대해 고민해야 했을 것입니다. 물론 박도섭으로서는 하고 싶어도 restitution을 할 방도가 없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이를 살려낼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도로라도 그는 신애의 상처의 치유를 위해 노력했어야 했습니다.

면회를 끝내고 나오면서, 종찬은, 박도섭의 얼굴이 죄인치고는 너무 좋아보였다고 감탄을 합니다. 그걸 보니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정말 하나님이 무서운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박도섭이 받았다는 하나님의 용서가 가짜였음을 증명합니다. 그가 받은 은혜가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의 얼굴이 그렇게 좋아서는 안 됩니다.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아서 마음에 평화를 얻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행한 죄로 인해 그 가족이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고 함께 아파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신애에게 할 수 있는 restitution이었습니다. 신애가 찾아왔을 때, 그는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나 비통하게 무너졌어야 했습니다. 울어서 되는 거라면 백 번, 천 번이라도 울었어야 마땅했습니다. 박도섭은 죽을 때까지 신애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고백을 했지만, 그것은 마치 신애에게 자비를 베풀겠다는 말처럼 들리지 회개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핑계로 삼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가 참되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에 더 예민하고 적극적이야 하는 법인데, 실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손실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용서를 들먹이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요!

이 대목에 다다르니, 제가 한국에서 알고 지낸 어느 장로님 생각이 납니다. 그분이 어느 날 교통사고를 내어 초등학교 어린아이를 다치게 했습니다. 그분으로서는 보험 처리를 하고, 한 가족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하나님께 진실하게 회개하고,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될 수 있는 대로 손해를 덜 보기 위해서, 법적으로 꼭 해야만 하는 일만 최소한으로 하려고 힘씁니다. 그분도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그 아이가 퇴원할 때까지 거의 매일 퇴원하는 길에 병원에 들러 위로하고,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와 그 아이와 가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restitution입니다. 저는 그 장로님이 모든 면에서 완전한 분이라고 추켜세우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한 가지 사건에서 그 장로님은 참되게 회개했고,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사람답게 행동했습니다. 그 장로님과 사고를 당한 가족은 그 과정에서 깊은 정이 들었고, 그 가족은 그 장로님의 정성에 감동하여, 한 마디 전도하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스스로 교회를 찾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6.
회개의 세 번째 요소 즉 reformation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진실로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를 받고, 그 능력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할 일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자신을 고치는 일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천벌을 받을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다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입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찬양하기에 바쁩니다. 그러한 잘못이 자신에게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힘쓰는 일에는 게으릅니다. 아니 그런 차원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이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참된 회개는 마땅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새로움을 얻는 일로 결론지어져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읽은 다윗의 회개 시편은 참으로 귀합니다. 그는 회개의 기도를 올리면서, 자신의 죄를 씻어달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10절부터 12절에 나오는 기도에서 다윗의 간절한 바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다윗은 자신을 고치는 일은 자신의 노력으로 해서 될 일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고 그의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해주시지 않는 한 그에게는 희망이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자신이 다시는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새롭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십자가는 ‘용서 자판기’가 아닙니다. 자신을 고치는 일 없이, 동일한 잘못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그때마다 회개라는 동전을 넣어 용서라는 제품을 꺼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본성의 연약함을 생각한다면, 동일한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지만, 우리로서는 하나님 앞에서 거듭거듭 새로워지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용서라는 물건을 내어 주는 자판기가 아니라, 죄로 물든 우리의 존재를 씻어주시며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에 힘입고 살아가면, 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한 번 되돌아보십시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지난날을 살아오면서, 알게 그리고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작게 혹은 크게,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얄궂게도 내가 입은 상처만 기억하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입힌 상처는 별로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니,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입은 상처보다 더 많은 상처, 더 깊은 상처를 주고 살아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굳게 하고 딱딱하게 만들어, 웬만한 잘못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행동하며, 내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일로매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내 이웃만이 아니라 마침내 나 자신까지 불행하게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혹,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와 용서의 교리를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여, 죄책감이 들 때마다 회개의 기도를 드림으로 양심에 위로를 삼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에게는 위로와 평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환각 상태에 빠진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 같은 회개의 기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용서의 은혜를 얻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회개를 보고 역겨움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유일한, 참된 방안은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마음에 새기고, 성령의 은총을 힘입어, 첫째, 참된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진정한 용서를 선물로 받고, 둘째, 그 은혜와 사랑을 힘입어 자신의 죄로 인해 이웃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며, 셋째, 성령의 은총으로 변화를 받도록 더욱 영적 생활에 힘쓰는 일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고, 그 은총과 축복은 우리를 환각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구체적으로 현실 안으로 들어가,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치르게 만들어줄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날로 새로워져 갈 것입니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세상은 우리의 회개와 용서를 보고 ‘사랑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 회개, 그런 용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함께 꿈꾸고 함께 갈망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오, 주님,
저희가 그동안 갈구하고 또한 간증했던 회개와 용서가
박도섭의 것만큼이나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이며 환각적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희로 인해 주님께서 얼마나 욕을 당하셨습니까?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진실한 회개와 진실한 용서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희의 회개와 용서로 인해
주님께서 살아계심이 증거되게 하소서.
오, 주님,
참된 회개와 용서에 있어
저희를 능하게 하소서.
아멘.


*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의 연속 설교가 영화 '밀양'을 소재로 4주간 연재됩니다.
* "값을 지불하라" 동영상 설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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