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과 기복의 가파른 경계선에서
축복과 기복의 가파른 경계선에서
  • 김기현
  • 승인 2007.11.0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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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의 [깨끗한 부자]를 읽고

아, 어지럽다

대개 책을 읽기 전에 그 책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이미 갖고 있다. 이것을 흔히 편견이라 한다. 하지만 아무런 전제나 배경이 없이는 절대로 책을 읽을 수 없으니 그 자체가 그리 죄될 일은 아니다. 게다가 해석학에 따르면 선입견은 개방성만 가진다면, 선이해가 될 수 있다고 하니 바른 독서법이라고 강변해도 큰 흠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 전제가 책의 내용과 맞물리면서 변형과 성숙하는 해석학적 순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독서의 과정을 통해 선이해가 많이 부정되기도 하지만, 확정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김동호의 <깨끗한 부자>를 읽으면서 부정과 확정의 과정을 무척이나 많이 경험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하였다. 아내가 읽고서 무척 감명 받았다고 해서 ‘역시 김동호 목사님이구나’라고 하였고, <기독교사상>을 중심으로 벌어진 청부론 vs 청빈론 논쟁을 관전하면서 ‘결국 고지론자인 김동호 목사님은 어쩔 수 없구나’ 사이를 종잡지 못하고 헤매었으니 공격적 책읽기는커녕 평범한 서평 글 하나 쓰기에 부끄럽다.

변명으로 들릴 테지만, 이런 혼란이 반드시 나의 지적인 무지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그러면 이 혼란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 책은 성서적 축복과 무속적 또는 세속적 기복 사상을 모두 담고 있다. 축복은 하나님을 추구하지만, 기복은 재물을 지향한다. 이 책은 축복의 강조와 기복의 거부로 읽힐 여지가 많고, 기복의 옹호와 축복의 왜곡으로 보일 소지도 다분히 많다. 김동호의 주장을 살펴보면 분명해 진다. 책의 제목처럼 그리스도인은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깨끗하다와 부자가 서로 결합하기에 뭔가 어색하다. 깨끗한 삶은 분명 성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깨끗함은 추구의 대상이지만, 부자는 추구의 가치는 아니다. 그럼에도 깨끗함이라는 단어가 부자를 수식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은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 한다, 또는 그런 부자가 되어도 좋다”는 명제에 대한 가치 판단이 흔들린다. 만약 저자가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하는 신자에 관해서 말했다면, 또는 제자는 부자가 되라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다면, 판단은 훨씬 수월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고, 이는 본서에 대한 평가를 어렵게 하고 논쟁의 중심에 서게 한다.

   
 
  ▲ 나는 김동호가 통과해야 할 바늘귀는 누가라고 생각한다. 만약 누가가 요청하는 자발적 나눔의 잣대를 통과한다면, 세련된 기복주의라거나 포장된 물질주의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의 입장에 가장 친화적이랄 수 있는 누가의 시각으로도 통과할 수 없다면, 그의 주장은 더 위험한 기복주의요, 거부되어야 할 물질주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청부론은 누가의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가?  
 
가난과 나눔의 제자도 : 마가 vs 누가

그런데 김동호가 위치한 애매한 지점이 성경에서 기인한 측면이 있다. 정작 분명한 판단 기준을 제공해야 할 성경이 단 하나의 획일적 규준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구약은 물질적 축복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풍성함을 알려주는 하나의 표지라고 말한다. 반면에 신약은 그 물질적 형통함이 도리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상반된 주장을 한다. 신약, 특히 복음서 안에서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재물에 대한 서로 일치하면서도 대립되는 관점을 노출하고 있다. 양자의 관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마가는 ‘자발적 가난’으로, 누가는 ‘자발적 나눔’이다.

마가는 우리로 하여금 재물을 위시한 세상의 관계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뒤좇을 것을 명령한다. 제자의 따름은 직업과 가족(1:16-20, 2:13-14)의 포기와 단절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타협이나 순응이 있을 수 없으며, 대가와 보상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9:33-35, 10:35-45) 십자가의 길은 타산적인 조건이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재물에 있어서 가난에 이를 정도로 총체적이고 무제한적인 순종이 요구된다.

누가도 마가와 일치하여 신자는 모든 소유를 버려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14:33) 그럼에도 갈릴리의 부유한 여인들의 섬김(8:1-3)과 삭개오를(19:1-10)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마가와 달리 재물의 포기가 아니라 올바른 사용에 관심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들은 철저하게 가난한 삶을 사시는 주님을 돕는데 사용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교회와 제자들(2장과 4장) 역시 철저한 포기보다는 소유의 나눔을 실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는 마가와 달리 재물의 문자적인 포기를 우리에게 종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가와 같이 전적인 포기의 기준을 보존하면서도 실천에 있어서 자발적인 순종과 자유의 여지를 넉넉하게 허용한다.

두 복음서의 재물관을 선명하게 대조해 주는 것이 부자 청년 이야기이다. 근심하며 돌아가는 부자 청년을 보고서 베드로는 자신들은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무엇을 버렸느냐에 관해서 마가와 누가는 차이가 드러난다. 마가는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다(막10:28)고 보고하는 반면에 누가는 베드로가 우리가 ‘우리의 것’을 버렸다(눅 18:28)고 말한다. 마가는 모든 ‘소유물’의 포기를, 누가는 모든 소유물에 대한 ‘소유권’의 포기를 말한다. 하지만 양자는 ‘소유욕’의 부정에는 동의한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옛 세상과 단절이 마가처럼 재물의 포기를 통해서 구현될 수도 있고, 누가처럼 재물의 올바른 사용, 즉 나눔을 통해서 실현된다. 어느 것이 옳은가? 분명한 것은 성서는 이 양자의 재물관을 긍정한다는 점이다. 재물 자체를 완전히 단념하든지 재물 사용의 주도권을 주님께 드리고 나누는 삶을 살든, 그것은 재물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보여주는 행위이며, 재물에 대한 제자의 마땅한 반응 양식임에 틀림없다.

내가 마가와 누가의 견해를 대조한 까닭은 김동호와 김영봉이 서로 근거하고 있는 토대가 누가와 마가에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부자 되기를 바라지 않는 김영봉(<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IVP, 230)과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김동호(28)의 사이의 거리는 멀어 보이지만,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다. 김영봉과 김동호의 입장이 마가와 누가의 관계와 비슷하다. 김영봉은 ‘자발적 가난’에, 김동호는 ‘자발적 나눔’에 강조점을 둔다.

두 사람의 입장이 그렇게 간단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김영봉의 경우에 진정한 부는 쌓음이 아니라 나눔에 있으며(4장), 나눔을 통해서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 더불어 누리는 행복을 얻는다(10장)고 말한다는 점에서 ‘가난’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김동호도 “세상의 불평등을 치유하는 부자가 되라”(11장)에서, 그리고 더러운 부자가 되느니 차라리 깨끗한 빈자가 되겠다는 그의 결의에서 ‘가난’을 피하거나 정죄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분명히 김영봉은 마가에 더 가깝다. 비록 그가 영성적 가난(3장)과 영성적 나눔(10장)의 실천을 언급하고, 예수님도 ‘영성적 가난’과 ‘영성적 나눔’을 말씀하셨다(김영봉, 231)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한계나 만족이 없고(16), 그리스도 안의 새 자아는 부자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에서 김영봉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결국 영성적 가난에 더 근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김동호는 모두에 언급한 것처럼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굳이 분류한다면, 나눔의 제자도에 근접한다. 그는 돈은 복도 아니지만,(1장) 악도 아니라고 본다.(3장) 따라서 마가가 요구하는 바와 같이 철저한 포기의 삶보다는 재물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봉사하는 삶에 무게를 둔다.(3부)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고 바른 수입과 하나님과 특히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올바른 물질 사용을 일관되게 가르친다는 점에서 누가의 영성적 나눔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구의 바늘귀를 통과할 것인가?

만약 김동호의 주장이 영성적 나눔의 입장과 일치한다면, - 나는 이 점에 있어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파른 경계선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으므로, 김동호의 생각이 나눔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 그에 대한 많은 비판을 잘못된 기준에 따른 것이다. 김동호 비판론자들이 나눔을 실현하는 제자도를 주장하는 김동호에게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제자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보기에 첫째로 성서의 가난과 나눔의 사상을 적절하게 구분하지 않은 채로 사용한다는 것과 둘째는, 철저한 포기의 관점으로 적절한 나눔의 시각을 비판하는 것이 문제이다. 자발적 가난이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말하는 바와 같은 다양한 제자도의 모습을 단 하나의 시각으로 재단하고 환원하려는 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김동호 목사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논쟁의 비생산성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영성적 가난은 나눔의 실천이 담지하는 현실 안주의 경향을 채근할 수 있고, 영성적 나눔은 가난의 영성이 내포하는 영적 개결성의 순도가 순결주의로 함몰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논쟁은 기실 누가 옳으냐의 문제로 흐르는 듯이 보여서 안타깝다. 서로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일방적인 주장만을 되풀이 한다. 이는 성서의 제자도의 다양성을 간과하여 생긴 피할 수 없는 귀결이다. 이제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비판과 교정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청부는 누가의 기준을 통과하는가?

나는 김동호가 통과해야 할 바늘귀는 누가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김동호의 주장에 적대적인 마가의 기준 보다는 우호적인 누가의 기준을 통해서 김동호의 주장을 평가하는 것이 타당한 태도일 것이다. 만약 누가가 요청하는 자발적 나눔의 잣대를 김동호 목사의 책이 통과한다면, 그의 청부론은 세련된 기복주의라거나 포/위장된 물질주의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만약에 그의 입장에 가장 친화적이랄 수 있는 누가의 시각으로도 그가 주장하는 깨끗한 부자가 통과할 수 없다면, 그의 주장은 더 위험한 기복주의요, 거부되어야 할 물질주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청부론은 누가의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가?

먼저, 깨끗함을 강조하는 것은 누가의 기준에 합당하다. 누가는 부와 재물의 축적에 집착하는 부자 관원(18:23)과 어리석은 부자(12:13-21) 이야기를 통해 교회 공동체 내부의 부자들이 자행하는 그릇된 제자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은 제자됨의 존재 가치보다는 소유 가치를 더 숭상한다. 김동호 또한 재물에 지나친 애착을 두는 소유형의 신자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존재형의 신자를 주장한다.(67) 그러므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소유에 두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인간답게 존재하는 데에 두고 사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68-69)

그리고 누가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6:19-31)에서 개인적 쾌락에 탐닉하느라 문전의 약자를 돌아보지 않은 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재물의 부당한 획득과 오용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김동호 역시 돈에는 다른 사람의 몫도 포함되어 있으며, 세금, 임금, 노동, 빚, 구제를 강력히 요청한다는 점에서 누가가 비판하는 잘못된 부자들과 궤를 달리한다.(9장) 이런 면에서 누가의 요구에 철저히 부응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부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누가와 달리 김동호는 가난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부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부함과 강함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눈을 가져라. 부함과 강함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자세를 버려라. 할 수 있는 대로 강한 자가 되라. 높은 자가 되라. 부한 자가 되라. 뛰어난 사람이 되라. 그렇게 되기를 힘쓰라.”(196) 누가복음뿐 아니라 성서 그 어디에도 물질적 부를 추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부는 단지 하나님의 자비의 외적 발현에 불과하다. 하나님 임재의 풍성함은 물질적 풍요로 나타날 수 있지만, 부의 풍요로 하나님의 풍성함을 측량할 수 없다. 누가는 일관되게 부의 위험성을 알리고 더 나아가 부자들은 도리어 화를 받게 될 것을 경고한다.(6:24-26) 물론 부자이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 것은 아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을 섬길 위험을 많이 갖고 있고, 실제로 그렇다는 것의 반영이다.

김동호는 이 경고를 너무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반드시 잘못이 아니라는 예외에서 그리스도인이 부를 추구하는 것은 좋다, 더 나아가 당연하다는 일반론을 추론해 낸다. 대형 교회나 소형 교회 모두 외적인 크기나 규모로 판단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작은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며, 대형 교회도 건강할 수 있으므로 자신은 그런 대형 교회를 추구한다고 한다.(70) 모든 부가 더럽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깨끗한 부도 있으므로 자신은 청부가 되겠다고 한다. 부와 부자, 그것도 깨끗한 부자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응당 잘못이다.(193) 하지만 부자로서 제자가 되는 것은 빈자보다 훨씬 더 맘몬주의에 함몰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예외를 일반화하는 듯이 보이며, 다른 한편으로 부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성서에 주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는 김동호와 달리 부의 긍정적인 측면에서 부자가 되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도리어 부의 위험성에서 가난한 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이것은 가치와 위치의 역전이다.(마리아의 노래, 1:46-55) 부함보다는 가난이, 집착보다는 나눔이, 자신을 위한 낭비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베풂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당연 윤리이다. 그런 점에서 김동호가 부를 추구해도 좋다는 것은 가치와 위치의 전도된 새 세상의 비전을 체화하지 못한 듯싶다. 나는 묻고 싶다. 성경은 누가 복되다고 말하는가? 가난한 자인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부자인가?

우리는 지나치게 부유하다

이 책이 ‘성경적 관점에 부합한가?’라는 질문과 함께 ‘신자들에게 적절한 목회요, 설교인가?’라는 두 가지 시험을 받아야 한다. 이 책은 일차적으로 저자가 사역하는 교회와 신자를 향해 설교되고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그 교회의 삶의 정황에서 독해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내가 보기에 후자의 물음에도 그리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을 것 같다. 설교란 모름지기 청중을 전제하고, 책이란 독자와의 소통이다. 그러면 그 교회는 가난한가? 추정하건대, 담임목사에게 부자가 될 정도의 사례비를 제공하고, 100억 원대의 교회를 건축(150-152)한 것으로 보아 부유한 교회이다. 시샘을 드러내고 표현하면, 억쑤로 부자 교회, 부자 목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부유한 교회와 교인들을 향해 부자가 되라고 설교하는 것은 바른 목회자요, 바른 설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교회에서 마태처럼 마음의 가난함을 설교하고, 빌립보서의 바울처럼 자족하라는 법을 배우라고 설교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마태의 요구를 따라 맘몬으로서의 돈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가난한 마음으로 살라고 설교하는 것, 그리고 빌립보서의 가르침을 따라 자족하는 삶을 살라고 강조하는 설교가 가장 적적할 것이다. 말씀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요, 잠자는 청중을 일깨우는 설교가 된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부유하라고, 충분히 나누워 줄 수 있을 만큼 부자가 되라고 설교하는 것은 결국 설교를 통한 교회와 사회의 정화 작용과 비판 기능을 상실하고, 잘못된 현실을 합리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될 수 있다. 더러운 부자가 철철 넘쳐나는 현실에서 깨끗한 경제 활동의 촉구는 쉽지 않은 설교이고, 강력한 사회 비판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지나친 소유가 불러들인 악성 가난(2장)이 교회와 신자의 삶 속에서도 판을 치는 작금의 상황에서 깨끗한 부자가 되라고 설교하기보다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히 13:5) 설교해야 한다.

권영길 민노당 대표가 지난 대선 때 한 말이 한 시사 코미디에서 회자하는 모양이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정치인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또 해야 한다. 그러나 종교인은 이렇게 질문해야 마땅하다. “여러분 왜 행복하려고 합니까? 왜 살림살이가 좀 나아져야 합니까?” 죽을 힘을 다해 부자가 되어서는 곧 바로 죽어버리는 이 참담한 현실에서 기독교가 굳이 부자가 되라고 해야 하는 걸까? 이제 좀 숨 돌리고 왜 우리가 부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최소한 교회 안에서만은, 설교를 통해서만은 한번쯤 아니 자주 들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는 BC 카드 회사가 아니고, 김동호는 김정은이 아니다. 제자의 길은 한계가 없고, 재물의 길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는 만족함이 없어야 하고, 재물에 관하여는 있는 바에 만족해야겠다.

읽어도 좋을 책?

아무래도 결론을 조금 통속적으로 마쳐야 할 것 같다. 나도 이제 나눔의 삶을 살아야겠다. 실제로 우리가 나눔의 삶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재물이 없어서가 아니다. 마음이 없어서이다.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김동호처럼 보다 많은 나눔의 삶을 살 것을 결심해 본다. 돈에 집착하기보다는 돈을 향하여 호통을 치고 비웃어 주리라.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거저 주는 삶을 실천하리라. “돈에 대하여 가장 모독적인 행위, 즉 돈을 주어 버려라”(리처드 포스터, <돈 섹스 권력>, 두란노, 73)

통상적으로 서평은 책 읽기를 권유하는 것으로 마친다. 그렇다면 축복과 기복 사이에서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즐길 수 있는 이 책을 나는 권할 수 있을까? “읽어도 좋을 책, 그러나 ‘반드시’ 읽을 필요는 없는 책. 누군가 갖고 있다면 빌려 보면 좋을 책, 그러나 ‘반드시’ 구입해서 읽는 것은 고민해 봐야 할 책.”

김기현 목사는 부산 수정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침신대와 경성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 이 글은 <공격적 책읽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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