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시나이 반도에는 시내산이 없다?
[연재] 시나이 반도에는 시내산이 없다?
  • 성기문
  • 승인 2007.11.1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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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 국경은 어디에 있었나?

들어가는 말

필자는 밥 코루눅 박사와 그의 베이스연구소(The Base Institute)가 공식적으로 내놓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 가설(소위 라오즈산[아몬드산])과 관련된 여러 가지 논증의 일부를 나름대로 요약해서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그 후에 다른 학자들과 고고학적 증거들과 비교해서 필자의 견해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 연재 글을 진행 중이다(필자가 이번 논쟁의 [요약적] 토대로 삼고 있는 이 일련의 주장들의 영어 원문은 http://www.baseinstitute.org/features/mtsinai%20research.htm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논쟁과 관련해서 2008년 1월경에 이집트-시나이 반도-요르단(-시리아)을 돌아보는 출애굽 루트 스터디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moses_torah).

우리는 지금까지 2회에 걸쳐서 시내산과 미디안의 위치에 대한 고대의 증거와 성경상의 증거를 살펴보았으며, 이제부터 시내산과 미디안의 위치와 관련된 몇 가지 직접적인 성경상의 증거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은 이집트의 국경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질문 하나: 이집트의 동/북쪽 경계는 어디였을까?

성경이 말하는 이집트의 국경
고래(古來)로부터 시나이 반도가 이집트 땅이 아니었다는 주장과는 달리, 구약성경은 이집트의 동/북쪽 경계를 나일강(히브리어로는 ‘예오레’다[사 19:7, 8])이나 ‘수에즈만’이 아니라, ‘이집트 시내’[일반적으로 이곳이 현재의 엘-아리쉬라고 본다]로 규정하고 있다.

민수기 34:2-5과 여호수아서 15:1-4을 보자. 두 구절들은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하게 될, 이스라엘의 서쪽 경계를 아스몬에서 이집트 시내[이 표현은 와디 즉 건천으로 번역해야 옳다]까지로서, 지중해까지 이른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또한 유다의 경계이며 마찬가지로 시므온의 경계가 되었다(참조. 요세푸스, 유대상고사 5권, 1장 XXII 82). 또한 여호수아서 15:20-21, 23, 45-47은 유다 지파의 전체 경계를 말해주는데, 여기서도 이집트 시내가 유다 지파의 경계라고 말해준다.

열왕기상 8:65에서는 솔로몬이 축제를 벌였는데, “하마스 입구로부터 이집트 시내까지” 큰 군중이 솔로몬과 함께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처럼 이스라엘 영토의 전부를 일컫는 표현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역대기하 7:8에서도 반복된다. 열왕기하 24:7에서는 바벨론 왕이 이집트 시내[우리말 성경은 ‘애굽 강’이라고 오역하였다]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의 이집트 왕의 모든 소유를 빼앗았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 말은 이집트의 전초 기지들과 국경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제거되어 봉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서 27:12-13에서는 야웨가 앗수르의 강들의 운하부터와 이집트 시내까지에서 포로들을 귀환시키시겠다는 말씀이 언급된다. 이것은 그 표현상 북쪽과 남쪽의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영토의 경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집트 문헌이 말하는 이집트 경계
주전 15세기 투트모세 3세는 므깃도 전투에 대한 언급에서 타루(Tharu)와 가사(Gaza)가 시리아 지역과 대면하고 있는 이집트의 국경 도시들로서 반역하였던 것을 말하고 있다. 주전 14세기의 하렘합 왕은 위대한 칙령이라고 불리는 기록을 남겼는데, 나일 강의 선박의 왕래를 방해하는 자는 그의 코를 자르고 타루로 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로 타루는 ‘코가 금지된 장소’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아마도 타루는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변방 지역으로 이해되었던 것 같다. 주전 14-13세기의 람세스 2세의 증언을 살펴보면, 이집트의 국경을 넘어서서 북진하는 람세스 2세가 타루의 요새를 지났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은 타루가 이집트에 속한 국경 도시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알렉산더의 이집트 정벌 이후에 이 지역의 이름은 헬라화되어 ‘리노콜루라’(Rhinocolura)라고 불렸다. 물론 그 의미는 ‘코가 부인된 장소’다. 이젠 전설 같은 별명이 그곳의 공식 명칭이 된 것이다. 이곳에 대한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언급은 주전 3세기의 파피루스 옥시링쿠스로서,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들을 언급하면서 이 지명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주전 2세기의 자료에 따르면, 리노콜루라 다음에 라피아가 있다고 말한다. 즉 이집트의 영토를 떠나 첫 번째 도시가 라피아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라피아가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공적인 국경 지역이다. 주전 1세기의 헬라역사가 스트라보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해안도시를 언급하면서 “가자[가사], 라피아, 리노콜루라”라고 말한다.

칠십인역(주전 300-150년)의 증거
칠십인역은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말로 번역한 것으로서, 이집트, 혹은 헬라적 유대인들의 정서와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는 책이다. 칠십인역은 전설과는 달리, 어떤 일관되고 정확한 번역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문자적/의역, 혹은 정확성/부정확성은 책들마다 차이가 있으며, 심지어 한 책 내부에서도 다른 경우가 있다. 다른 구약 책들에 비하면, 오경은 일반적으로 문자적 번역의 원칙을 추구하지만, 전부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유한 히브리 성경책과 헬라 성경책을 비교해보는 것은 성경 해석상 중요한 증거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사야서 27:12의 이집트 시내를 칠십인역은 리노코루라(철자 하나의 차이는 무시할 수 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앞서 논의한 자료들의 분석해볼 때,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지역이 각 시대와 사람들에 따라서, 히브리어로 이집트 시내로,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타루로, 헬라인들에게는 리노콜루라로, 그리고 현대아랍어로 (와디) 엘 아리쉬로 불린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질문 둘: 시나이 반도는 출애굽 당시에 진공 상태였나?

시내산이 시나이 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 군대가 주둔하고 있지 않았다거나, 심지어 아무도 없었다는 의견을 내세운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 후에 바로 이집트를 떠났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시나이 반도를 가로 질러야 비로소 이집트를 떠날 수 있었다면, 그러한 말은 너무 성급한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광야나 혹은 사막이더라도 이미 모세 시대에 누구누구의 광야라는 식으로 소유권이나 연관성이 이미 제기된 상태였다. 즉 브엘세바의 광야, 모압의 광야, 유다의 광야 등. 사실 시나이 반도가 이집트 땅이었다면, 이집트 반도라고 불렸어야 했다. 이집트는 우리와 같이 DMZ였던가, 아니면 이집트의 통제를 받는 명실상부한 이집트의 영토였던가?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를 통제하였다는 증거들
비록 정황적인 증거지만,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혹은 가나안과의 경계가 이집트 시내였다면, 그 국경선이 그쪽에 수직으로 내려와 다시 현재의 수에즈 운하와 일치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그 지역에 발달해 있는 여러 가지 도로들을 따라 국경이 나눠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 전역을 자신들의 공식적인 경계라고 여기지 않았더라도 지속적으로 자국의 통제하에 두었다는 결론은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시나이 반도의 남부에 이집트가 오랫동안 관리하던 다양한 보석류뿐만 아니라, 구리광산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 특별히 유명한 구리광산(사라부트 엘카딤[현재 사라빗 엘-카딤])은 소위 시내산에서 50-60마일 떨어져 있다. 이곳에는 광산을 캘 노예들과 그들을 관리할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은 쓸모없는 광야가 아니라, 이집트의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모세가 인해전술로 이들을 모두 몰살시키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출애굽’하여 이스라엘을 그쪽으로 몰고 갔을 이유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대략적으로 이집트의 경계와 시나이 반도의 통제권에 대해서 다루어보았다. 성경과 고대 문헌의 증거에 따르면, 이집트의 경계는 수에즈 운하 지역이 아니라, ‘이집트 시내’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시나이 반도는 오래전부터 귀금속과 구리로 인해서 이집트 군대와 거주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집트의 군사적 통제하에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 호에는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무사하고 빠르게 광야를 지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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