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중독에는 약이 없다
목회 중독에는 약이 없다
  • 김종희
  • 승인 2008.11.20 18:45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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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겉은 충성, 헌신, 희생처럼 보이나, 속은 자기만족 충족

국어사전을 보면 중독(中毒)이라는 단어를 "1. 생체가 음식물이나 약물의 독성에 의하여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일. 2. 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 3.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지만, 사실은 다 엮여 있다. 술이든 마약이든, 그것을 지나치게 탐닉하는 바람에, 그로 인해서 기능 장애가 일어나서, 판단력도 비정상이 되는데도, 그것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를 말한다.

누구나 중독되기로 작심을 하고 무엇인가에 자신을 내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다. 가볍게 하루 이틀 저녁마다 한 잔 두 잔 홀짝홀짝 마시다가 어느새 알코올 중독이 된다. 더 멋지게 노래를 부르고 더 화려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몽환적인 뭔가를 갈구하다가 어느새 마약가루 속에 코를 처박는다. 섹스 중독도, 쇼핑 중독도 다 그런 식이다. 처음부터 자신이 그것에 중독될 거라는 걸 예상하지 않는다. 중독이 된 다음에도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경우 역시 드물다.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컴퓨터 게임 중독, 섹스 중독, 쇼핑 중독……. 쉽게 듣는 단어들이다. 남녀노소를 안 가리고 누구나 중독될 수 있는 것들이다. 목사들은 주로 무엇에 잘 중독될까. 목사들끼리 얘기할 때 목사들이 조심해야 할 세 가지 유혹으로 돈, 여자, 명예를 꼽는다. 돈에 중독된 목사, 여자에 중독된 목사, 명예에 중독된 목사 들은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밤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흔하다. 세 가지에 번들로 중독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런 단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증세가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목회 중독’이다. 앞에서 언급한 중독과의 차이점은 목사들에게서만 나타난다는 점이다. 목사가 돈과 여자와 명예에 중독되었으면 볼 장 다 본 셈이다. 그런데 이런 데 중독된 사람들에게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 ‘목회 중독’이다.

목회를 안 하면 견딜 수가 없다. 내 인생이 가치 없는 쓰레기처럼 느껴진다.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비정상이 되어간다. 그래서 벌어지는 해괴망측한 일들을 보라.

70세 정년이면 세상적으로 볼 때 할 만큼 했다. 공무원도 60대 중반이면 나가야 하고, 일반 기업에서 60대는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갈수록 고령화 사회가 되어서 60대를 제2의 청춘이라고도 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대책이 시급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70세가 현역에서 은퇴하기가 너무 빠르다고 말할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런데 목사가 그렇게 한다.

많은 교단들이 목사 정년을 70세로 정하고 있다. 매년 총회를 열 때마다 교단들이 돌아가면서 목회 정년을 75세로 늘리자는 안건을 꺼내든다. 해마다 뻥튀기처럼 쏟아져 나오는 수천 명의 젊은 예비 목사들의 따가운 눈총과 사회적 흐름에 역행한다는 차가운 여론 때문에 번번이 부결되고 있다. 하지만 고령화 사회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목사 정년 연장 문제는 계속 튀어나올 것이다.

어느 교단에 소속된 목사가 70세가 되어서 은퇴를 해야 했다. 그가 갑자기 총회에 질문을 했다. '만 70세’라면 '71세 생일 1년 전인 70세 생일'을 뜻하는 것인가, '71세 생일 하루 바로 전날'을 뜻하는 것인가 물었다. 왜 이런 기발한 질문을 했겠는가. 그 까닭을 모르겠으면 이 글을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총회의 답변을 놓고 교회 안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목회를 364일 더 하기 위해서 교회를 콩가루 집안으로 만들었다.

내가 잘 아는 그는 10여 년 전에도 워낙 머리가 비상했다. 그런데 70세까지도 저렇게 머리가 잘 돌아갈 줄은 몰랐다. 70세가 되어서도 팽팽 돌아가는 두뇌를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도 목회를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저렇게 비상한 머리로 계속 목회하면 정말 큰일을 낼 것 같기도 하다.

옛날 사람들 중에 호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른 경우가 많지만 대개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물론 나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 때문에 호적 나이와 실제 나이를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구사하는 경우도 많다. 결혼할 때는 실제 나이보다 적은 호적 나이를 들이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 나이가 몇 살 많다고 해서 결혼 생활이 파탄나지는 않는다. 나이를 속였다는 이유로 파탄 날 결혼 생활이라면 이미 다른 문제로도 얼마든지 파경에 이를 만큼 문제가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직(公職)의 경우는 좀 다르다. 사생활에서야 얼마든지 고무줄 나이를 가질 수 있지만, 공직에서는 공적인 나이를 적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많은 목사들이 실제 나이와 법정 나이를 '적절히' 구사해서 제 욕심을 채운다. 여기서 '적절히'는 '제 멋대로'라는 뜻이다. 그건 목회를 공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공직이라고 생각한다면 실제 나이보다 부풀려진 호적 나이가 아무리 억울해도 승복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요즘은 돈의 힘이 절대적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노회장이나 총회장, 연합기관 회장에 출마할 때 나이의 힘이 훨씬 셌다. 그래서 후보들 간에 질적인 차이가 별로 없으면 연장자를 추대하는 것이 관례였고 미덕이었다. 그때는 실제 나이든 호적 나이든 숫자가 많은 걸 들이대서 감투를 썼다.

그런데 교회에서 정년을 맞아 은퇴할 때가 가까워오면 숫자 많은 게 덕이 아니고 독이 된다. 나이를 낮춰야 한다. 실제 나이보다 정년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게 기록되었다면서 5년을 더 목회하고 3억 원을 받은 목사도 있다. 챙길 거 챙기고 조용히 75세에 은퇴했으면 그저 넘어갔을 텐데, 후임 선정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바람에 문제가 불거졌다. 이런 예는 늦가을 길거리에서 나뒹구는 낙엽들처럼 널렸다.

구약 성경에 멜기세덱이 있다. 아론 계열의 제사장 라인이 주류였다는데, 그쪽 혈통의 질이 영 시원치 않았는지 하나님은 멜기세덱을 비주류의 대표 주자로 세웠다. 멜기세덱은 예수님의 모형으로까지 일컬음을 받았다. 그는 아비도 어미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처럼 영원한 제사장으로 불렸다. 대단한 존재다.

우리 동네에도 현대판 '멜기세덱'이 있다. 성경의 멜기세덱과 차이가 있다면, 아비, 어미, 시작은 있는데, 끝이 없다는 것이다. 분명 태어난 날이 있으므로 나이가 있을 텐데, 아무도 그의 나이를 모른다. 따라서 목회 정년이란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일 뿐이다. 흔히들 '벽에 똥칠한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는 강단 위 의자 방석에 똥칠하는 순간까지도 강대상을 남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혹시 아들이라면 모를까. 왜?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이니까.

우리 동네에 멜기세덱의 라이벌이 있다. 그는 여자 교인들과 몇 년 동안 사귀다가 들통 나는 바람에(본인은 자백했다고 하지만) 잠시 목회를 쉬다가, 자기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는데 자기를 징계한 노회는 불법을 했다면서, 당당히 목회에 복귀했다. 불륜을 저지른 자기는 하나님 용서를 받았는데, 불륜을 저지른 자를 징계한 노회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하는 역설과 역전의 진리여!

얼핏 보면 다들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고, 교인들을 겸손하게 섬기고,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기 위해서 저런 몰상식한 짓을 거리낌 없이 벌인다고 착각할지 모르겠다. 보통 때 같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소리인데 콧구멍으로 마약가루를 흠뻑 들이킨 다음 뿅간 상태에서 질러대는 희한한 소리를 듣고, 그가 득음(得音)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착각하는 것과 똑같다.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섹스 중독, 게임 중독 등의 장애에 대해서 사회적 대책을 강구하는 목소리도 많고, 치료 프로그램도 개발되고 있다. 근데 목회 중독에는 약이 없다. 그걸 중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충성과 헌신과 희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스갯소리 하나 하겠다.

옛날 버전. 천국에서 예수님이 보좌에 앉아 계셨다. 집사가 왔다. 예수님은 의자에 앉은 채로 "그래, 수고했다. 어서 와라" 하고 말로만 맞이한다. 장로가 왔다. 의자에서 일어나 "어이쿠, 너도 왔구나, 정말 반갑다" 하고 환하게 웃으면서 맞이한다. 목사가 왔다. 의자에서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달려가서 얼싸안으면서 "네가 어떻게 여기를 왔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구나" 하면서 감격에 젖은 눈물을 흘린다.

요즘 버전. 목사가 천국에 왔다. 예수님이 보좌에서 일어나지를 않으신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얼굴을 찡그리고 몸을 웅크린다. 목사는 너무 이상했다. "예수님, 왜 그러세요. 제가 왔는데 기쁘지 않으세요?" 예수님 가라사대, "너 또 내 자리 뺏으려고 왔지!"

목회 중독에는 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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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ice 2011-12-28 06:06:32
A provocative insihgt! Just what we need!

reader 2008-11-24 16:27:11
일반화의 오류에 대해서 지적해 달라고 했는데, 제가 원래 쓴 글은 목회중독만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 아니라, 일반적인 비판중독 현상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 전에 김기자님이 쓴 글에 대한 저의 평가도 있으니 찾아서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학교 때, 논리학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셨다고 하니, 앞으로 그런 염려는 안해도 되겠네요.

reader 2008-11-24 16:17:41
사적인 이름을 거론해서 글을 쓰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달리 붙일 제목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냉소적이고 거칠게 비판하는 것이 원래 의도된 계획이었다는 말에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냉소적인 비판과 슬픔과 안타까움에 바탕을 둔 비판의 글은 분명히 구별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나만이 아니라, 읽는 모든 독자들의 평가할 몫이라고 봅니다. 둘째로, 홍어X에 관한 표현문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일반 방송이나 언론에서 왜 생식기에 관한 표현을 직접하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들이 모두 위선자라서 그럴까요? 내가 보기에는 언론용어로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정한 가이드라인이 있지 않은가 짐작해 봅니다. 뉴스앤조이도 일반언론의 범주에 든다면 참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사적인 영역에서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개인의 인격의 문제이므로 거론할 가치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공적인 용어로 사용하기가 적합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세째로, 비판중독에 관해서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할 말이 없겠지요, 다만 김기자님의 지금보다 더 신랄하고 냉소적인 강도높은 비판의 글이 어떨른지 지켜볼 뿐입니다. 네째로, 김기자님의 사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저는 기본적으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정보는 김기자님이 스스로 밝힌 그 정도입니다. 저는 다만 쓰여진 글을 보고 평가할 뿐이고, 짐작할 뿐입니다. 김기자님의 글에 사적인 감정이 얼마나 게재되었는지 밝혀달라고 했는데, 본인이 더 잘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요? 하늘을 우러러 글을 쓰는데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면 그로써 된 것이지요, 다만 제 3자는 쓰여진 글의 표현을 보고 짐작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기자가 쓴 글을 보고 마음이 상할 그런 위인은 아닙니다. 막말로 기자의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그 언론사의 편집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안보면 그만입니다. 제가 미주뉴스앤조이가 창간될 때부터 지켜본 것은 그만큼 나름대로 관심과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나름대로 따끔한 비판도 하면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제 글은 비록 댓글의 수준이지만, 책임감있게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만 밝혀둡니다.

시제이에스 2008-11-24 09:15:51
누가 어느 뉴스게시판에 그러더군요. 예수님의 후손들이 대형교회 유명목사들로부터 예수님 이름 사용에 대한 로열티만 챙겨도 돈 엄청 벌거라고.

reader 2008-11-23 16:02:51
저의 댓글에 대해서 반응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그만큼 불쾌하셨다면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번에 댓글을 쓰게 된 계기는 지난번 '홍어X' 사건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김기자님의 글이 거칠어지고 냉소적으로 되어간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인터넷언론의 속성상 더 많은 관심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면, 더 이상 할말이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번 쯤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요? 비판중독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하나의 방법은 마땅이 비판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필요이상으로 비판의 강도를 가하거나 더 거칠고 냉소적인 표현을 쓰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낀다면 그럴 가능성이 큰 것이지요. 이것은 각자가 판단할 문제라고 봅니다. 이 점은 저역시도 예외가 아니니까요. 그동안 김기자님의 글은 긍정적인 글보다 부정적인 글이 분명히 더 많았습니다. 물론 그 만큼 교계에 문제가 많기도 하지만, 관점의 차이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일반화의 오류에 대해서 반문하셨는데, 그것은 논리학교과서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상식적으로도 판단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가령 한국에는 5만이 넘는 목사와 교회가 있고 미주에는 3천이 넘는 교회와 목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단정적으로 말한 어떤 명제에 대하여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많다면 그것은 일반화의 논리에 맞을 것이고, 반대로, 해당되는 실례가 적거나, 잘모르겠다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것이지요. 세째로 제가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저는 정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비리를 저지른 목사나 그 누구에 대해서도 비호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마땅이 공적으로 지적하여 바로 잡아야 된다고 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비리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기자에 대해서도 사적인 감정이 게재되거나, 주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진다면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공적인 대상이니까요. 네째로, 김기자님의 아픈 경험에 대해서는 저 역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교회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만약에 그런 선입관이 앞서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필요이상으로 비판하고 싶은 유혹도 느낄테니까요. 어떠한 선입관과 감정도 배제된 개관적이고 진실한 보도야말로 그 자체로서 권위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구태여 다른 비평이 필요없다고 생각됩니다. 평가는 어차피 독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쓰다보니 길어졌습니다. 쓸데없는 간섭이라 여겨진다면 무시해 버리시고 일말의 참고가 된다면 저로서도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김기자님의 건승을 빌고 더 좋은 글을 기대해 보겟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