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무엇이 문제인가
방언, 무엇이 문제인가
  • 정용섭
  • 승인 2007.11.16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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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로 드리는 기도를 방언이라고 한다. 한쪽에서는 이런 방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사로 생각하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공연한 일이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과연 방언,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에 관련된 몇 가지 논점을 정리해보자.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분명한 경험으로 자리하고 있는 방언 현상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소리다. 이런 이상한 소리로 나타나는 방언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에서는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방언을 제법 많이들 했다. 학생회장이었던 필자도 그들 틈에 끼어서 방언을 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방언이 막 터지려는 그 순간에 절제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혀가 안으로 말려들면서 나오는 그런 소리라는 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부흥강사는 방언을 가르쳐준다고 하면서, 할렐루야를 수백 번 반복적으로 외치게 했다. 물론 교회 강단에 무릎 꿇고 엎드려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할렐루야를 외쳐대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열정과 그걸 소리로 만들어내야 할 구강 기능이 그걸 따라가지 못할 경우에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그런 게 가장 일반적인 방언 현상이다.

또 하나의 다른 방언 현상은 외국어로 터지는 기도이다. 이건 내가 직접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전해들은 말로는, 당사자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독일어·일본어, 심지어 러시아어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심층심리학의 도움이나 언어학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이와 비슷한 신비한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흔하게 일어난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정확하게는 그런 설들이 있으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의 스티그마가 직접 몸에 나타나는 이들도 있고, 마리아의 현현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외국어로 나타나는 방언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기독교적인 은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방언이 생물학이나 심층심리학의 도움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성서가 그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고린도교회에도 방언이 있었으며, 바울도 그런 경험이 많았고, 사도행전이 보도하는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에서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로 방언 현상이 크게 일어났다는 건 분명하다. 도대체 방언에 관한 성서의 보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까닭

일단 구약은 접어두어야 한다. 구약에서 사용되는 방언이라는 낱말은 지방의 토속 언어라는 의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약 중에서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가 이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데, 사도행전보다는 고린도전서가 우리의 논의에서 훨씬 더 유용하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초기 역사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특별한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문서이기 때문에 방언에 대한 보도의 역사적 진정성을 확보하기가 힘들다. 이에 비해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직접 진술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에 대해 언급한다. 특히 14장에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한다. 아마 그 당시 고린도교회는 이런 신비한 현상들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것 같다. 바울이 거기서 말하려는 요점은 모든 은사가 교회의 덕을 위해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방언은 주로 여자 신자들에게서 자주 나타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34절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고 지침을 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듣기에 낯 뜨거운 가르침이지만, 이것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고린도교회의 신비주의적 경향이 심각했다는 의미이다. 그것의 가장 큰 원인은 방언하는 여자들에게 있었다.

우리가 조금 꼼꼼히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문맥을 검토하면 바울이 방언 현상을 억제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방언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양적으로도 많다.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9절) 그리고 바울은 예언이 방언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이렇게 명시적으로 지적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9절) 또한 그는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방언하지 말라고 했다.(28절)

바울이 결론 부분에서 예언도 사모하고, 방언도 금하지 말라고 충고했다는(39절) 점에서 방언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즉 바울이 방언을 허용했을까? 이건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그는 지금 방언 현상을 가타부타 말하려는 게 아니라 소극적인 입장에서 고린도교회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바울의 강조점은 방언이 신앙의 본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덕을 심하게 훼손할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에 대한 경계다.

방언을 하려면 골방에서 혼자 하라

한국 교회는 왜 구약성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신약성서도 아주 일부에서만, 그것도 소극적으로, 실제로는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방언을, 더구나 예수는 전혀 언급하지도 않으신 방언을 그렇게 중요한 신앙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왜곡이다.

바울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마시라. 방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은 골방에서 혼자 하시라.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라는 바울의 명시적 언급에 기대서 통역 없는 방언은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서 지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실제로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신비한 언어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끼리 서로 소통되는 길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흡사 무당들의 접신과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의 예를 들겠다. 우리 교회에 만으로 두 살이 갓 넘은 여자 아이가 있는데, 요즘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새로운 말을 많이 배우는 모양이다. 교회에서도 말을 많이 한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그 아이의 엄마는 거의 정확하게 알아듣는다. 엄마가 아이의 통역사 노릇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살면서 비슷한 발음만 들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방언 통역도 역시, 내가 직접 그런 현상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런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방언과 통역의 신학적, 혹은 신앙적, 더 나아가서 선교적 의미는 매우 크다. 우선 방언 행위가 그것이다.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발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방언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과 그 진술은 근본적으로 방언이다. 사도신경만 보더라도 그렇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방언이나 마찬가지로 들릴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도 역시 방언이다.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먹고 마신다는 성만찬의 신앙도 역시 방언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과 모든 행위는 이 세상에서 신비한 방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언어의 창조력 회복해야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의 신비를 모두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신비가 사라진 예배와 설교가 바로 그것의 단적인 증거다. 오늘의 예배는 청중들의 종교적 감수성을 만족시키는 데만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설교는 세상살이의 요령을 전하는 일에만 작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론적 생명의 세계에 연결되어 있는 신앙 언어들이 단지 설교자들의 말장난으로 떨어져버렸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성서 언어가 존재론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또는 존재론적으로 담고 있는 그 궁극적인 세계를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매튜 폭스는 히브리어 ‘다바르’를 단지 ‘말씀’이라고 번역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다바르가 이렇게 의사소통 수단으로 격하되면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폭스에 의하면 다바르는 ‘말씀’이 아니라 ‘창조 능력’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창조가 하나님의 다바르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창세기의 진술이 이에 대한 증거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도 역시 말씀이라기보다는 창조 능력으로 번역되는 게 옳을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언어는 그것 자체로 궁극적인 의미를 확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창조 능력과의 연관성 안에서만 그 능력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언어는 창조의 신비를 열어주는 문이며, 길이어야 한다.

오늘 교회의 언어는 이런 능력을 하루빨리 회복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경쟁력을 제고하는 언어만을 발전시키겠지만 그리스도교는 비록 이들에게 방언처럼 들릴지 몰라도 창조 능력과 창조 신비를 열어내는 언어를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생산과 소비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언어에 머물겠지만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담지하고 있는 생명의 언어들을 발설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낯설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언어는 결국 방언이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대로 방언은 통역되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하나님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통역되어야 한다. 칭의와 성화와 종말은 통역되어야 한다. 이 통역이 곧 신학이고 설교다. 문제는 오늘 설교자들이 이런 신앙 용어를 통역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통역할 생각도 아예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런 신앙 언어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서로 알아듣게 대화하지도 못한다. 이런 현상은 통역자 없는 방언 행위처럼 말씀의 위반이다. 청중들은 물론이지만 설교자들도 신앙 언어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알려고 노력한다면 그나마 새로워질 가능성이 있지만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고쳐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들이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죄, 숙명주의, 도덕주의, 이원론적 세계관, 기복적인 가치관, 성공주의 등등, 교회 안에서 작동되고 있는 이런 가르침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생산해내는 신앙의 왜곡이다. 그들은 방언하듯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런 방언에 매료될 수도 있고, 실제로 서로 통하는 게 있을지 모르지만 훨씬 많은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오히려 소외될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을 다시 확인하자. 방언은 통역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는 침묵해야 한다. 거꾸로 세상에서 방언일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들은 진리론적 토대에서 번역·통역·해석되어야 한다.

우리 한국 교회는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았을까? 골방에 모여서 통역하는 사람도 없이 자신들끼리 방언에 심취하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신비로운 신앙적 언어를 보편적인 지평에서 과감하게 통역하는, 세상과 역사를 향해 개방된 공동체인가?

정용섭 목사 / 샘터교회 담임·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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