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이야기' 아닌 '사랑 이야기'입니다
'성공 이야기' 아닌 '사랑 이야기'입니다
  • 박지호
  • 승인 2007.11.26 0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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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의 지휘자 차인홍 교수, 그가 진 사랑의 빚

‘휠체어의 지휘자’로 불리는 차인홍 교수(라이트주립대학, 49). 그가 소아마비에 걸려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2살 때다.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그는 재활원에 맡겨졌다. 배고픔과 추위보다 희망 없는 미래로 인한 서글픔이 더 컸다. 재활원을 졸업한 뒤 중학교 진학도 포기해야 했다. 24살까지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우연히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것이 그의 삶의 변곡점이 되었다. 암울한 미래를 보며 절망하는 대신 바이올린을 켜는 것을 즐기며 자신을 다듬어 나갔다.

1982년 차 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주변의 도움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신시내티 음대에서 세계적인 라쌀 4중주단의 지도를 받고, 뉴욕시립대학교 브루클린 음악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대전시향의 악장을 맡았다. 이후 다시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에서 지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치열한 관문을 뚫고 오하이오 주 라이트주립대학에 바이올린 교수 겸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임명됐다. 현재는 라이트주립대학 종신교수로 있으면서, 틈틈이 미국을 비롯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선음악회 등으로 이웃을 섬기고 있다.

차 교수는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둔 셈이다. 자식을 일류 음악대학에 보내겠다고, 이름난 음악가로 만들겠다고 치맛바람 휘날리며 갖은 애를 써도 뜻을 이루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불우했던 장애인이 미국 대학교에 교수까지 됐다는 것만으로도 화젯거리다. 하지만 진정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거둔 성공이라는 열매가 아닌 삶에 대한 그의 태도다. 그리고 지금의 차인홍이 되리라고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지난날 기꺼이 사랑의 씨앗을 뿌려온 사람들의 헌신이다.

   
 
  ▲ 차인홍 교수는 암울한 미래를 보며 절망하는 대신 바이올린을 켜는 것을 즐기며 자신을 다듬어 나갔다. (사진 제공 : 밀알 선교단)  
 
가장 극악한 환경에서, 가장 고상한 아름다움을 누리다

차 교수는 육신의 장애와 불우한 환경에 주저앉지 않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삶을 즐겼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환경을 탓하며 절망하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집중했다. 할 수 있는 일은 간단했다. 바이올린을 켜는 것 말고는 달리 없었다. 그렇다고 음악가나 교수가 되리라는 야심찬 목표를 갖고 이를 악다문 것이 아니다.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첼로의 황제가 된 피에르 푸르니에가 “살기 위해 음악을 하지 말고 행복하기 위해 음악을 하라”고 당부하던 말을 차 교수는 진작부터 실천하고 있었다.

차 교수가 바이올린을 처음 잡았을 때다. “틈만 나면 바이올린을 켜곤 했다. 그냥 음악이 너무 좋았다. 좋아서 하는 연습만큼 효과적인 것이 있을까. 선생님이 한마디만 해도 열심히 따라 했다. 의자도, 악보대도 없었지만, 세계적인 음악가가 부럽지 않았다. 연습하다 줄이 끊어지면 다시 이어서 연습했다.”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 중에서)

   
 
  ▲ 14년 만에 다시 모인 베데스다 4중주단. 차 교수는 "14년 만에 모여 연주를 하는 데도 마치 계속 연습을 해온 것처럼 호흡이 잘 맞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재활원에 있던 학생들 중 선발된 4명으로 베데스다 4중주단이 꾸려졌다. 고달픈 시간의 연속이었다. 단독 주택에서 소위 합숙 훈련까지 하며 혹독한 연습을 했다. 다 같이 연습하기엔 집이 너무 좁았던 탓에 차 교수는 연탄광을 연습실로 삼아야 했다. 악기가 연탄에 닿을 만큼 비좁았고, 통풍이 되지 않아 냄새도 지독했고, 채광 역시 좋지 않았다. 겨울에는 성긴 문틈을 파고드는 칼바람에 몸을 떨어야 했다.

“찬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연탄 가루들과 싸우면서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불평보다는 “어떻게 앉아야 연탄 가루를 덜 마실 수 있나?” 생각했다. “왜 이 추위 속에서 바이올린을 붙잡고 있나?”라는 생각보다 “어떻게 추위를 이길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추위를 이기는 방법은 한 가지다. 쉴 새 없이 바이올린을 켜면 된다. 추위를 이길 수 없더라도 최소한 손가락이 얼어붙지 않을 수 있다.”(<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 중에서)

차 교수는 “쾨쾨한 연탄광 속에서 추위에 떨며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지만, 내 영혼은 바이올린 소리에서 깊은 위로와 안식을 얻고 있었고, 음악이 주는 아름다움의 매력에 젖어 있었다. 가장 극악한 환경에서 나는 음악을 통해 가장 고상한 아름다움을 누리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차인홍을 만들어낸 사람들

   
 
  ▲ 차 교수의 재활원 졸업식 때 강민자 선생과 찍은 사진.  
 
차 교수가 바이올린을 잡게 된 것은 강민자 선생 덕분이다. 대전 유성으로 온천을 즐기러 가던 강 선생은 그날따라 재활원 주변을 지나갔고, 재활원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고 싶다”는 제안을 하게 된다. 강 선생은 개인 시간을 쪼개 재활원 아이들에게 무료로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당시 강 선생은 대전에서도 꽤 이름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강 선생의 문하생은 수십 명에 달했다. 대부분 지역 유지의 자녀들이었다. 정기적으로 문하생들의 연주회가 있었는데, 8명을 선발해 무대에 세웠다. 강 선생은 차 교수도 늘 그 자리에 서도록 했다. 발표회 비용은커녕 연주회 의상조차 없었던 차 교수를, 유력한 자녀들 중 한 명을 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후 차 교수는 젠 영이라는 미국인 여성의 도움으로 음악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었다. 그녀는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을 찾아 재활원을 방문하게 됐다. 미군 부대 버스를 빌려 부대 극장에 아이들을 데려가기도 하고, 식수차를 동원해 멀리 부여까지 소풍을 다녀오기도 했다. 봉사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났던 젠 영은 재활원 아이들이 눈에 어른거려, 자비량으로 재활원을 다시 찾았다. 손에는 옷 가방 하나와 전축 한 대가 들려 있었다. TV는커녕 라디오도 듣지 못했던 시절 젠 영의 선물은 차 교수에게는 그야말로 보물이었다.

“전축이라는 귀한 물건이 생겼다. 모차르트·바흐·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처음 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동에 휩싸였다. 바이올린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숨이 막힐 듯했다. 틈만 나면 전축 옆에서 살았다. 똑같은 곡을 듣고, 또 듣고, 또 다시 들었다. 선율의 흐름 속에 어느새 몸과 마음도 함께 싣게 됐다.”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 중에서)

   
 
  ▲ 2007년 밀알의 밤 때 뉴욕 가스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차인홍 교수.  
 
차 교수를 포함해 베데스다 4중주단은 뜻하지 않은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김태경 목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던 김 목사는 베데스다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며, 연주회 일정 등을 관리하면서 대외적인 일을 도맡았다. 또 이들의 유학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아산재단의 도움을 받도록 도왔고, 제대 후에는 자신의 진로를 수정하면서 유학길까지 동행했다. 차 교수를 비롯해 베데스다 4중주단이 안정적으로 정착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김 목사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공에 도취되거나 장애로 움츠러들지도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석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갔을 때는 대전 시립교향악단의 정두영 선생이 많이 도왔다. 장애인이라고 오디션까지 보지 못하게 하고, 칠판이 너무 높고 강의실이 2층이라는 이유로 교수 임용을 거절하는 한국 사회에서, 휠체어를 탄 차 교수를 악장으로 기용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했다. 악장이라면 교향악단에서 굉장한 위치다. 연주회 때도 따로 인사를 하고 박수를 받을 정도다. 정 선생은 숱한 청탁이 있었지만 거절하고, 실력을 기준으로 선발한 것이다.

차 교수는 “나는 철저하게 사랑의 빚을 많이 진 사람이다. 내게 사랑을 주시는 분들과의 수많은 만남으로 인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사람들은 우연이라 말하지만 차 교수는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셨음을 느꼈다. 그러기에 자신의 성공에 도취되어 으스대지 않을 수 있고, 육체적인 장애로 인해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한사코 성공 이야기로 비춰지길 거부했다. 사람과 하나님의 사랑이 배어 있는 사랑 이야기로 다가가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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