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성공이 없다"
"성경에는 성공이 없다"
  • 김영봉
  • 승인 2008.01.01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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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3:22~25…'성공 신화' 대신 '성실 신화'를 이루게 하소서

1.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성공 신화’의 탁월한 모델로 알려져 있는 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많이 밝아지고 활력이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 외신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도덕성이 아니라 능력을 선택했다”고 평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에게 여러 가지의 도덕적인 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루어낸 놀라운 성공들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압도적인 득표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으로 임명된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도 역시 성공에 관해선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만한 분입니다. 한 대학교에서 14년 동안 네 번이나 연속으로 직선제 총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다시는 볼 수 없는 진기록이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4년 동안 학교를 눈부시게 발전시켰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새 정부에서는 성공 신화의 주인공들이 전면에 포진될 전망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캠프에서 내걸었던 구호가 ‘대한민국 국민 성공 시대’였습니다. 선거 운동원들은 선거 기간 내내 “국민 여러분, 성공하세요!”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명박 후보에 대한 요지부동의 지지도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 이론이 많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성공하고 싶은 국민들의 열망’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높아만 가는 청년 실업이 사회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국민의 다수가 패배의식에 젖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공의 상징이랄 수 있는 대통령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나, 그 대통령이 나에게도 성공 신화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성공 신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뉴스앤조이 자료사진)  
 
이렇게, 우리의 조국에서는 ‘성공에의 열망’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작년까지 ‘부자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했는데, 이제는 ‘성공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웅크리고 살던 사람들이 기지개를 펴고 성공을 위한 도약을 시도할 마음의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과거를 털어버리고 새로이 다가오는 한 해를 준비하면서 뭔가 새로운 꿈을 품는 시기이기에 더욱 더 성공 신화에 대한 국민의 염원은 강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2007년을 보내고 2008년을 맞이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누구는 새로운 사업이 잘 되기를 꿈꾸고, 누구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을 꿈꿀 것입니다. 누구는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꿈꾸고, 또 누구는 좋은 집을 사는 것을 꿈꿀 것입니다. 사람마다 꿈의 대상은 모두 다르지만, 그 모든 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저도 역시, 2007년도의 저의 삶과 목회가 좋은 열매를 맺었기를 바랍니다. 2008년도에도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도 제 인생의 성공을 꿈꾸고 있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2.
성공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공은 우리 모두가 하나도 예외 없이 염원하는 바입니다. 심리적인 병이 있지 않고서야, 자신이 하는 일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성공과 관계하여 우리가 잠시 생각해보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진리의 길을 따라 걷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꼭 생각해보아야 할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성공’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개역개정판>을 보면, 구약성경에는 딱 2번 나옵니다. <새번역>을 보면, ‘성공’이라는 말이 구약에만 17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성공을 이루기 위한 교훈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떤 번역을 따르든지 간에, ‘성공’이라는 말이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영어 번역본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는 거의 나오지 않고, 구약성경에만 몇 번 나오는데, ‘성공하라’는 명령도 없고, 성공을 위한 비결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참,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까? 지금이나 성경이 쓰여지던 옛날에나, 인간은 모두 자신이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며 성공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성공에 대한 가르침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성공인데, 성경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성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무엇을 추구하라는 뜻입니까? 실패를 추구하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실패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보십시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렘 29:11).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희망의 본질은 성공 아니던가요? 미래에 성공하리라는 기대감이 있을 때 희망이 생기지 않던가요? 그런데 왜 성경은 성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을까요?

3.
‘성경에는 성공이 없다’라는 사실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경이 일관되게 제시하는, 믿는 사람에게 기대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실’(faithfulness)이라는 사실입니다. ‘성실’, ‘신실’ 혹은 ‘충성’으로 번역되는 이 말을 성경에서 찾아보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합쳐보면,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공이 아니라 성실을 원한다!” ‘성공’이라는 말은 얼마나 매력 있는 말입니까? 반면, ‘성실’이라는 말은 얼마나  매력 없어 보입니까? 우리 국어사전에 보니 성실을 이렇게 정의해놓았습니다. “정성스럽고 참되어 실속이 있음.” 이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신실’이라는 말은 “믿음성 있고 진실함”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히브리어나 헬라어도 비슷한 뜻입니다. 성실성 혹은 신실성이 좋은 덕목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덕목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실’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게 떠오르는 친구가 있습니다. 사실, 군대에서 훈련 받는 동안에 만났다가 더 이상 교분을 나누지 못했으니 친구라고도 할 수 없겠지요. 저는, 지금은 없어진 ‘석사장교’라는 특수 과정(?) 출신입니다. 이 특수 과정은, 석사과정을 마친 사람들 중에서 선발하여 장교 훈련을 시킨 다음 소위로 임관시키면서 곧바로 전역시킵니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소집하여 소위 ‘총알받이 소대장’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부대입니다. 이 과제를 위해 영천에서 4개월 동안 장교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때 같은 내무반에 지독하리만큼 성실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성실성은 밤에 보초 설 때 빛을 발했습니다. 그곳은 훈련소이므로 누가 침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훈련 과정의 하나로써 밤에 시간을 정하여 보초를 서게 합니다. 그냥 훈련의 한 과정으로서 보초를 서게 한 것입니다. 저희에게 지급된 총에는 실탄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보초를 서는 사람들이 그 일에 성실하게 임하게 되질 않습니다. 보초 시간에 우리는 보통 한쪽 구석에서 잠을 자거나, 둘러 앉아 잡담하거나, 어두운 불빛 아래서 책을 읽거나, 혹은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렇게 불성실한 다른 훈련병들을 비웃듯, 세 시간 동안 정해진 곳에서 부동자세로 보초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심지어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군인 정신에 투철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의 전공이 철학이었는데, 내무반 전우들은 그 친구의 지독한 성실성을 두고, “저렇게 앞뒤가 꽉 막혀가지고야 어떻게 철학을 연구하는지 모르겠다”고 빈정대곤 했습니다. 신학을 전공하고 그 부대에 들어간 저는 가끔 그 친구에게서 일종의 열등감을 느끼곤 했었습니다. 저는 자주 다음과 같은 질문에 봉착했습니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저렇게 성실한데, 신학을 전공한 너는 왜 그렇게 불성실하냐?” 하지만 저는 아무 위험도 없는 훈련소에서 세 시간 동안 부동자세로 서서 경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그 친구의 성실성 앞에서 ‘회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친구의 성실성을 비웃었습니다.

저의 이 기억은, 이 세대가 ‘성실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를 잘 묘사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세대는 ‘성실성’을 가장 따분하고 재미없고 가망성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나가기 위해서는 성실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요령을 피울 줄도 알고, 꾀를 부릴 줄도 알고, 때로는 파격적인 언행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신랑감 중에서 가장 인기 없는 신랑감이 ‘성실한 사람’입니다.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 후보는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로 성실성은 우리 시대에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성실함이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힌,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군대에서 만난 그 친구가 성실함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실함은 동시에 매우 창조적입니다. 요령은 없지만 여유가 있습니다. 술수는 없지만 전략은 있습니다. 파격은 없지만 창조적인 변형은 있습니다. 진실하고 성실하고 신실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는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세상은 성실이라는 미덕을 반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을 칭송하기보다는 비웃습니다.

4.
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공’에 대해서는 성경이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고, 성경에서 가장 높이 사는 ‘성실성’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세상이 추구하는 방향이 정반대로 엇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제대로 믿어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따라 살자니 세상에서 인기 없는 사람이 될 것이고, 세상을 따라 성공을 추구하며 살자니 성경의 말씀을 역행하는 것이 되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고민에 답하기 위해, 성경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 그 사람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요셉은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하나이며, 따라서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성공의 비결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요셉은 성공을 위해 분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어릴 적에 꿈을 많이 꿨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뭔가 심상치 않은 미래를 예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셉이 적극적으로 추구한 꿈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뭔가 큰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꿈은 요셉의 마음 어디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이야기를 성공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잘못 읽은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전심을 다하고 진실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위대한 이유는 불굴의 투지로써 ‘성공 신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성실 신화’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 태도가 결국 그를 이집트의 총리로 만든 것입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노예의 일에 성실했습니다. 노예의 일이 어떤 것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치고, 노예가 하는 그런 허드렛일을 즐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 때문에 남의 나라에 노예로 팔려온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세월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열 사람이면 여덟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음모를 꾸미지도 않았습니다. 노예로서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살아보기 위해 머리를 짜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노예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러한 삶의 태도가 지속되자 집주인 보디발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주인의 부인이 그를 유혹했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혹을 했습니다. 만일 인생 역전을 꿈꾼 사람이었다면 그 유혹을 이용할 음모를 꾸몄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힌 기회입니까?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것 아닙니까? 그 유혹을 받아들이고, 그 부인을 통해서 뭔가 모사를 도모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야심 있는 청년이라면 그 부인이 자신을 유혹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그 부인을 유혹할 계책을 꾸몄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을 믿어준 주인을 배신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노예로서 자신의 신분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유혹을 뿌리쳤고, 결국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떨어졌을 때, 그도 사람인 이상 어찌 낙심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금세 마음을 수습하여 자신이 처한 상황에 성실했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 떨어졌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성실했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여도 그 일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로 인해 간수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실성은 그의 변함없는 삶의 태도였습니다. 그렇게 일관되게 성실했을 때 간수의 마음이 동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성실성은 항상 그에게 이롭게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성실성 때문에 감옥에 떨어졌습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진실이 언제나 먹히고 성실성이 언제나 먹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실하게 살다가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성공하기 위해 성실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바른 길이므로 성실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성실성을 통해 이집트의 총리에 오르지만, 그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총리가 되었을 때, 그는 ‘아, 내가 드디어 성공을 이루었다!’고 만세 부르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는 총리가 된 다음에 필경 부패하고 타락했을 것입니다. 그의 목적은 성실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총리가 된 다음에도 그는 일관되게 성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살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사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것이 요셉의 성공이었습니다.

5.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그렇게 일관되게 성실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일관된 성실성의 원인을, 저는 그의 하나님 신앙에서밖에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아니고는 성실함으로 삶을 일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진실할 것을 기대하시며, 하나님께서 작은 일에 충성하기를 바라시며, 그렇게 살아가는 나를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이 없이는, 그렇게 일관되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진실하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살아있다면, 마땅히 성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산다고 해서 늘 만사형통하고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장담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늘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성공한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 있는 한 그 어떤 일을 이룬다 해도 성공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성경에서는 ‘성공하라!’고 말하지 않고, ‘성실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지 맥도날드(George McDonald)는 “하나님 없이 무슨 일을 도모한다면, 참혹하게 실패하거나, 아니면 성공은 하지만 그 성공으로 인해 더 참혹한 운명을 만날 것이다”(In whatever man does without God, he must fail miserably or succeed more miserably)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예를 찾아보자면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성공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신실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실패도 결국 성공이 되며,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공도 결국 실패가 되고 맙니다.

얼마 전, CNN에서 방송된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시청자들이 자신의 질문을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보낸 것을 방송국에서 선정하여 틀어주고 후보들이 그 질문에 대해 답하는 형식으로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질문자 중 어떤 사람이 성경책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믿으십니까? 다른 책이 아니라, 바로 이 책! 이 책을 믿으십니까? 대답해 주십시오.”(Do you believe this book? This book, specifically this book! Do you believe this book? Answer me!) 이 질문에 대해 후보들은 아주 불편해 했습니다. 약간만 실수했다가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표를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비기독교인들의 증오를 살 수 있는, 아주 위험천만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여러 후보들이 진땀을 빼면서 대답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의 답변이 제게는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어느 당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고, 어느 후보를 지지하거나 깎아 내리자는 것도 아닙니다. 순수히 신앙적인 시각에서 예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 볼 때, 그 후보는 정치적인 역량도 뛰어나고, 행정 능력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사적인 생활 양상을 생각하면, 신앙인이라고 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성경을 지혜의 책이라고 믿고 있고, 지금도 자주 읽고 있습니다. 과거에 제가 위기를 겪을 때는 더 자주 읽고 지혜와 용기를 얻곤 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지혜의 책’으로만 오해하고 있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성공하는 삶의 기술을 찾으려고 힘쓰는지요? 그들은 성경을 뒤져가면서 자신들의 삶에 이로운 교훈들을 찾아 적용하려고 힘씁니다. 하지만 성경이 그들에게 들이대는 도전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립니다. 성경을 자주 읽는다는 사람이 패륜아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성경을 자주 읽는다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분투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성경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비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바르고 참되게 살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공의 길로 안내하는 책이 아니라, 진실되게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성실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6.
저나 여러분이나,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나, 올해에는 자신이 도모하는 모든 일에서 성공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서든 큰일에서든, 자신이 바라고 노력하는 일에서 좋은 결실을 맺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며 마음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이 아니라 ‘성실’을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성공을 이루는 데 있기보다는 성실하게 사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실하게 살아 성공할 때, 우리는 그 성공으로 인해 타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공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 성공 때문에 타락하게 됩니다. 성실하게 살아갈 때, 실패도 영원히 실패로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실패 가운데서도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그 사람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런 말씀을 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유, 목사님! 누가 성실하게 살아야 좋다는 것을 모르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실을 기대하신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쉽나요? 눈 뜨고 있는 상태에서 코를 베어가는 이 비정한 사회에서 어떻게 늘 진실하고 성실하게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반칙을 하는데, 어떻게 저만 규칙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혹시 목회하는 분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목회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런 유혹이 없는 줄 아시나요? 하루에도 몇 번씩 반칙을 쓰고 싶은 유혹, 요령을 피우고 싶은 유혹을 마주합니다. 가끔, 술수와 음모를 사용하고 싶은 유혹도 없지 않습니다. 목회 현장이나 DC의 슬럼가에 있는 가게나 혹은 쉐라톤호텔의 회의실이나, 성실함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성실함과 진실함과 신실함을 지키기에 더 유리한 곳이 있고 더 불리한 곳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입니다. 성실함과 진실함과 신실함은 하나님의 길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 있을 때, 지금의 상황과 상관없이 진정한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술수와 요령과 사기와 반칙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있다 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얻고 승진할 때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희망 없어 보이는 상황을 견뎠을까요? 그는 지하 감옥에서 간수들의 신임을 받고 높임을 얻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살아야 했을까요?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미래의 모든 일을 그분께 맡기고, 오늘은 다만 주어지는 일에 성실했고 진실했으며 또한 신실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7.
여러분 중에는, 노예로 팔려온 요셉의 신세처럼 혹은 모함을 받아 죄수로 전락한 요셉의 신세처럼, 딱한 신세에 처한 분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성공하겠다는 앙심이 마음에 사무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이라면 잠시 물러나, 보디발의 집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정성을 다하던 요셉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둡고 침침한 감옥에서 자신의 일에 성실했던 요셉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당한 상황에서 가장 훌륭한 선택은 모든 원한과 분노를 내려놓고,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일을 정성껏 받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한 말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골 3:23)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작은 일에 성실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앞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때까지 여러분이 하실 일은 그저 전심을 다하고 맡겨진 일에 진실하게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 요셉의 전성기와 같은 시기를 지내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인정하고 신뢰하며, 여러분의 손이 닿는 모든 일이 형통하고 있습니까? 그때가 성실함이 더욱 필요해지는 때입니다. 일이 잘 될 때 유혹이 더 많은 법입니다. 고난 중에서 넘어지는 사람보다 번영 중에 넘어지는 사람이 더 많은 법입니다. 일이 잘 될 때 마음은 부풀고 눈은 높아져서 헛디디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에 계신 분들은 더욱 더 성실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더 큰 성공을 위해 분투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낮추고 정성을 다해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킬 수 있고, 바른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 바이러스가 유행입니다. 깨어있어야 할 때입니다. “성경에는 성공이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일에 성공할 수 있기를 추구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 하나님께 대한 더 큰 믿음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싸구려 성공주의에 마음 팔리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하셨듯이 앞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즉 성실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의 삶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실하신 주님,
주님의 그 성품을 닮아
저희도 성실함에 있어 성공하게 하소서.
앞뒤가 꽉 막힌 성실함이 아니라
창조적이며 진취적인 성실함을 저희에게 주옵소서.
낮고 어둡고 좁은 길을 걸을 때나
높고 밝고 넓은 길을 걸을 때나
늘 신실하고 진실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고, 지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주님을 진실되게 믿게 하소서.
아멘.

* 이 글은 2007년 12월 30일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설교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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