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계시 받았어!"
"나 계시 받았어!"
  • 정용섭
  • 승인 2008.01.2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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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님의 '자기계시'

간혹 "내가 어젯밤 기도하는 중에 계시를 받았어"라는 말을 듣곤 한다. 이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충분하게 해석이 되지 않는다면 위험성이 많다. 크게 두 가지 관점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런 경험에서 언급되는 계시는 흡사 점쟁이들이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듯이 무언가 비의적인 성격이 아주 농후하다.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비밀스럽게 보여주는 사건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보려고만 한다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자기 알림이다. 따라서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자기에게만 특별하게 알려주는 어떤 비밀로 생각하는 한 이런 계시는 잘못된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문제는 위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인데, 계시를 어떤 소유물처럼 생각한다는 점이다. 물론 성서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이들이 많이 등장해서 그 비밀을 선포했다. 그들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소유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계시를 소유한 게 아니라 계시가 그들을 소유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계시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사로잡힐 뿐이다.

이런 사태를 확실하게 규정해줄 수 있는 신학 용어가 바로 '하나님의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 Gottes)다. 신론과 계시론이 결합되어 있는 이 신학 용어를 소화하기만 해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많은 부분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용어는 주로 헤겔 이후로 바르트에 의해서 신론의 중심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기독교의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다." 이 말은 곧 하나님과 계시의 동일화를 뜻한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계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계시가 곧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곧 계시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충분히 소화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론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옥황상제처럼 어느 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고, 자기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린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 구조에서는 하나님과 계시가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런 세계의 존재 방식 안에 들어와 있게 된다. 이런 사유 방식이 아니라 계시가 곧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계시로서 존재한다. 계시가 곧 하나님의 존재다.

이 말은 하나님과 하나님나라가 동일하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을 구분해서 생각한다. 하나님은 원래 따로 존재하고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펼쳐나가는 나라도 따로 있다고 말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을 실체론적 존재론 안에 가두어버리게 격이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은 곧 하나님나라다. 하나님은 어떤 사물처럼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서, 즉 그의 통치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로서 존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늘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역시 그렇게 존재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예컨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비유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인간과 똑같은 인격적인 대상물로 여긴다. 이런 생각이 비약되면 신인동형동성론으로 발전된다. 하나님 자체인 하나님나라는 어떤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이다. 흡사 바람처럼, 사랑처럼 실체가 아니라 어떤 힘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와 통치의 궁극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세계의 비밀로서(융엘) 존재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시 주제로 돌아오자. 계시는 곧 하나님의 자기 알림이다. 계시가 곧 하나님이다. 계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함부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지 말자. 구약시대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했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고 보게 되는 경우는 우리가 죽든지, 아니면 이 우주의 종말이 오는 때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완전히 알지 못하듯 계시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 판넨베르크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체 역사로서 자기를 알리는 분이라는 점에서 아직은 은폐된 분이다. 아직은 종말이 오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특별히 그의 부활을 통해서 종말에 일어날 그 계시가 선취적으로 발생했다고 우리는 믿는다.

따라서 오늘 우리 신학자들과 기독교인들에게 맡겨진 숙제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어떻게 참된 궁극적 계시인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그냥 믿는 게 아니라 믿을 만한 근거를 제시하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당연히 인간들의 세계 경험과 그 해석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종말과 계시는 이 세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용섭 / 샘터교회 목사·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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