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 설날 풍경화
신의주 설날 풍경화
  • 양국주
  • 승인 2008.02.0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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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남북적십자회담 기간 중 북한 명절에 관한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북쪽에서는 설날에 무얼 하고 지냅니까?”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지냅니다.” 엄동설한에 왠 수영을? 신정 설만 있고 구정 설이 없던 탓에 설 개념이 없던 북한 인사들이 급한 마음에 동문서답을 한 것이다. 이제는 북에도 설날이 생겨 10년 전부터 3일간의 연휴를 즐긴다.

11시 무렵 단동에서 조중 친선 다리를 건너는 국제열차는 세관 검색을 마친 후 오후 2시 15분 평양을 향해 달린다. 몸은 1,000m 압록강 철교를 건너기도 전인데 마음은 이미 구천을 떠돌듯 의주를 거쳐 영변과 룡천을 거쳐 선천으로 떠나 있다.

밤새워 휘황찬란한 불빛을 받아서일까? 신의주 역 회색빛 광장을 휘감는 칼바람을 맞은 듯 김일성 수령의 동상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신의주 역사 벽면에 룡천과 피안으로 떠나는 열차 시간표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떤 이는 무료한 듯 때가 잔뜩 낀 장의자에 드러눕기도 하고, 어떤 이는 도시락을 꺼내 요기하고 있다. 어둑한 실내, 북한 어느 곳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매캐한 곰팡이 냄새다. 잃어버린 고향의 모습이련가? 평양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내 마음의 고향 신의주, 플랫폼에 내세운 ‘청년 신의주’ 간판과는 딴판이다.

민족의 자존심을 한껏 드높였던 손기정 선수가 신의주 철교를 건너 안동현(단동)까지 달리는 마라톤 경주에서 일등을 하고 황소를 부상으로 챙겼던 전설 같은 시절, 손기정에게는 세계를 달릴 꿈이 있었다. 1930년대 프린스턴대학을 유학하고 돌아온 윤하영과 한경직 목사, 기독교 부흥 운동의 불씨를 지핀 이성봉 목사가 조선 교회의 터전을 닦던 꿈이 무르익던 곳 또한 신의주다. 어디 그뿐인가? 강계 출신의 미녀가 우신여관 아랫목에서 옷고름을 풀어 일주 김진우를 낚아채고 적지 않은 작품을 챙긴 후 이당 김은호에게 똑같은 수작을 걸다가 혼쭐이 났던 곳 또한 신의주였다.

   
 
  ▲ 압록강 철교 사이로 우뚝 솟은 신의주 마적동의 방직 공장 (사진 제공 : 양국주)  
 
설날에는 질기게 오래 살라는 뜻으로 국수를 먹거나 순대를 먹는다지만, 접대원에게 청한 음식은 조찰떡과 가자미식해, 단고기와 조선 된장국이었다. 거기에 깍두기까지. 복숭아 속살처럼 투명하고 노란색의 조찰떡은 쫄깃쫄깃한 찰기에 달짝지근한 미각이 혀끝을 마비시켰다. 조찹쌀을 으깨어 만든 향긋함 하나로 음식의 격을 이다지도 높일 수 있다는 말인가? 싱싱한 가자미에 무와 마늘, 생강 등의 양념을 넣고 삭혀 만든 젓갈, 새콤하고 매운 맛 때문에 별미로 이름난 가자미식해는 원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었다. 아버님 고향이 청진인 워싱턴 특파원이 버릇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꿈의 음식이 가자미식해다. 그분이 평소에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해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듯 가슴에 담아 나누고 싶은 탓이다.
 
평양에서 낙랑 구역의 단고기 집을 즐겨 찾았지만 맛으로는 안산관의 단고기 집을 따라잡지 못한다. 낙랑 단고기 집은 규모가 커서 평양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재미로 추천할 만한 곳이지만, 보통강 변에 위치한 안산관은 가정집 같은 분위기에 산책할 정원까지 있어 아늑한 분위기가 편안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다.
 
대체로 북한 음식은 자연의 향과 맛깔스러움을 간직한 듯하다. 양념 재료가 넉넉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조선 음식의 순수함을 이어가는 이유라면 구차한 변명일까? 그러나 신의주 설날 음식의 백미는 단연 조선식 된장국이다. 시금치에 연두부를 담아 말갛게 끓여 내온 된장국, 더함도 덜함도 없는 지상 최고의 순백미가 가득한 음식이다.

   
 
  ▲ 조선식 된장이 정갈스런 향으로 돋보이는 식탁. (사진 제공 : 양국주)  
 
춘절을 맞아 10억의 인구가 민족 대이동을 하는 중국 때문에 지구의 지축마저 들썩거리는데, 제 고향 찾아 나서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어려운 형국이 작금의 북한이다. 통행증 없이는 이웃 마을조차 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음식도 좋고 가슴 적실 정취도 좋지만 이웃 마을조차 마음대로 휘젓고 다닐 형편이 아니라면 설날에 무슨 흥취가 있을까? 또 다른 10년, 신의주에서 달라진 설날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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