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있어야 할 사람들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사람들
  • 정병선
  • 승인 2008.02.1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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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인' 심층 분석 리포트 (3)

나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세 가지 범주의 사람들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왜 그런 사람들이 양산된 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한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째, 자기 이해의 과정 없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의존적인 그리스도인, 지식이 없는 열성으로만 뭉쳐있는 사람들로는 교회 왕국을 세울 수는 있겠으나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는 어렵다는 것. 둘째, 매사에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사람들로는 어떤 일도 창조적으로 해낼 수 없다는 것. 셋째, 개인적인 신앙에 안주하는 사람들 역시 교회의 외형을 크게 하는 데는 일조할 수 있으나 교회의 체질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해가 되기 십상이라는 걸 말했다. 나는 정말 아픈 마음으로, 나의 수치를 폭로하는 심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양산된 것은 전적으로 목회자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1. 깨어있는 열정의 사람

한국 교회의 새로운 미래를 활짝 열어가기 위해서는 신앙과 정신이 깨어있는 아멘파가 필요하다. 목회자들이 던져주는 쪽 복음, 쉬운 복음, 종교화된 복음에 만족하지 않고 온전한 복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알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성경은 지식이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다고(잠19:2), 미련한 자는 지식을 미워한다고 했다(잠1:22). 또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잠11:9). 바울은 구원 얻은 새사람을 가리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라고 했다(골3:10). 그렇다. 복음은 지식에까지 미쳐야 한다. 지성과 세계관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복음은 종교적 세계에 갇혀 신앙이라는 게토 안에 머물게 된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통치하는 광대한 세계의 현실을 신앙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삶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복음 고유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복음은 인간의 인격과 존재 전체를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피부에서 뼈 속 깊이까지, 생각과 의지와 감성까지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 복음은 부분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복음이 한 사람을 만나면 그 복음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전인(全人)과 전생(全生)을 변화시킨다. 그런데 만일 지성을 새롭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인을 새롭게 하며, 전생을 새롭게 할 수 있겠는가? 인간과 삶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 지성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법. 때문에 지성이 구원받지 못하고서는 구원이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목회자는 성도들의 지성을 구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성경적인 세계관을 열어주는 데 집중해야 한다. 만일 지성을 구원하는 데 집중하지 않고 신앙적 열심을 강화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그런 목회는 목회의 본령을 벗어난 ‘삯꾼 목회’요 ‘매춘 목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격과 지성을 변화시키는 목회,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가 먼저 자기 지성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목회적 방법론을 배우는 일에 정신없이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멀티 세계를 볼 수 있는 지성을 단련하는 일에 정진해야 한다. 그래서 쪼가리 성경 지식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진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목회자, 성경적인 지혜의 눈으로 세상과 삶을 읽어낼 수 있는 목회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책무라고 믿는다.

성도들 역시 내면의 공허감을 신앙적인 열심과 심리적인 확신으로 채우겠다고 덤빌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생활을 반추하는 성찰을 통해 흐트러진 삶을 정돈하는 데 힘써야 한다. 어둠과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과 삶을 저주하거나 원망하기보다는 현실의 빛과 어둠을 긍정하고 보듬으며 초극할 수 있어야 한다. 말씀에 대해서는 ‘예’ 하고, 말씀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니오’ 할 수 있는 예리한 분별력과 겸손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저 눈 감고 목회자를 따라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목회자와 함께 눈을 뜨고 동행할 수 있는 성도,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뜨겁게 헌신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성도를 일컬어 나는 깨어 있는 아멘파라고 부르고 싶다. 교회 안에 깨어있는 아멘파가 많아질 때 한국 교회는 주님의 몸인 교회로 아름답게 회복되어져 갈 것이다.

2. 옳고도 아름다운 사람
 
한국 교회의 새로운 미래를 활짝 열어가기 위해서는 옳고도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신앙에만 투철한 사람이 아니라 인간미가 풍성한 사람이 돼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기독교인 만들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예수를 따름으로 진정한 인간의 길을 가라고 구원하신 것이다. 그렇다. 구원이란 길게 말할 게 없다. 그냥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 단지 인간이 되는 것이면 충분하다.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그 인간됨을 회복하는 것, 온 세계를 만드신 분과 소통하고, 또 그분이 만드신 온 세계와 소통하며 사는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다움은 반드시 사람다움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다움이란 어떤 모습일까? 사람과 삶을 읽어내는 데 탁월한 소설가 박완서 씨의 생각을 빌리는 것보다 더 좋은 설명이 없을 것 같다. 그분은 예수님을 ‘옳고도 아름다운 분’이라고 불렀다. 참으로 기막히게 잘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옳고도 아름다운 분’ 그렇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셨다. 예수님은 시니컬한 냉소주의자가 아니셨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낡고 부패한 종교의 틀과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누구보다도 따뜻한 분이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하시면서도 죄인을 내치지 않으셨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머리를 쳐든 사람이 아니면 누구든지 사랑으로 품으셨다.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죄인을 정죄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용서하시고 보듬으신 후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미래를 향해 보내시는 분이셨다. 그분은 진실로 옳고도 아름다운 분이셨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 그분처럼 옳으시고, 그분처럼 아름다운 분이 또 있을까. 그분은 진실로 인간의 참 전형이셨다.
 
사람이 옳은 길을 가면서 옳은 길을 가지 못하는 사람을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옳은 길을 가면서도 옳은 길을 가지 못하는 자를 보듬어 주기는 정말 어렵다. 아마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일을 멋지게 해냈다. 그분은 그런 삶을 살아냄으로써 예수를 믿는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말없는 말을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누구보다도 옳은 사람이 돼야 한다. ‘적당히’는 통하지 않는다.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옳음’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옳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옳음’에는 반드시 ‘아름다움’이 동반되어야 한다. 옳은데 아름답지 못한 사람, 아름다운데 옳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부족하다. 진정 옳으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답고, 진정 아름다우면서도 항상 옳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인간이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말이다. 그렇다. 옳고도 아름다운 분이셨던 예수님 안에 인간의 원형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그 인간의 원형을 회복해가야 하는 사람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는 것 아니다. 어쩌면 이생에서는 불가능한 도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옳고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영원히 불가능한 도전을 꿈꾸며 도달할 수 없는 희망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 아니던가. 우리가 아직은 예수님처럼 온전하지 못하지만 옳음과 아름다움을 붙잡기 위해 분투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교회는 새로워질 것이다. 사람들이 와서 쉴만한 교회, 편견과 독선이 사라지고 나그네가 짐을 풀 수 있는 교회, 치유와 회복이 있는 교회, 사랑 깊은 만남이 있는 교회, 세상과 구원의 축복을 나누는 교회, 복의 근원인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교회를 넘어 하나님나라에 사로잡힌 사람

한국 교회의 새로운 미래를 활짝 열어가기 위해서는 교회가 강조하는 영적 세계에 함몰되지 않고 일상에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걸 중시하는 자가 필요하다. 신앙은 신앙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신앙은 하나님을 위해 주어진 것도 아니다. 신앙은 오직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니다. 신앙은 존재를 포함한 실존의 변화를 위해 주어진 은총이요 도구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을 가진 자는 생활의 현장이 달라져야 한다. 진정한 신앙의 승부는 교회 안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고 날마다 반복되는 작은 일상에서, 교회 밖에서 결정 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교회는 끊임없이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회 밖으로 성도들을 나가도록 독려해야 한다. 직장과 가정이 신앙의 삶을 사는 진정한 터전이 되도록 해주어야 한다. 교회 봉사보다는 생활의 현장에서 구원에 합당한 삶,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일에 목숨을 걸게 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것이 진정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라는 걸 믿어야 한다. 왜? 교회는 도피성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세상이 보란 듯이 교회라는 높은 성을 쌓아서는 안 되니까.
 
교회는 세상 앞에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녹아 들어가야 한다. 교회가 세상 속으로 녹아들어가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수록 교회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살아날 것이다. 교회가 세상과 담을 쌓을수록 오히려 세상을 닮아갈 것이고, 세상과의 담을 헐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수록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의 에너지와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세상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려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세상을 진심으로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신 것처럼 교회 또한 세상을 사랑한다면 세상에 교회를 주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교회를 주어야만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넘어 하나님나라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필요하다. 비록 하나님나라의 삶을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것처럼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뜬 구름 잡는 것 같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제 역할을 감당하려면 그 어려운 길을 가는 성도들이 많아져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삶이라는 것이 본래 자기 욕심이나 이기심과는 반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봉사하려는 사람은 많아도 하나님나라에 헌신하려는 자는 많지 않고, 하나님을 부리려는 사람은 많아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는 자는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교회의 미래를 진정으로 열어가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머무는 자들보다는 교회를 넘어 하나님나라의 삶에 헌신하는 성도들이 많아져야만 한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교회를 반역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 안에서 해야 할 일은 최소화하고, 교회 밖에서 해야 할 일은 최대화하자는 이야기다. 교회 안에서 지나치게 바쁘게 살지 말자는 이야기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찾지 말자는 이야기다. 진짜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 곳은 교회 안이 아니라 세상에서라는 이야기다. 교회 밖 인생의 현장에서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불 꺼진 등이요 짠맛을 잃은 소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바로 불 꺼진 등이요 맛 잃은 소금의 신세 그대로다. 인생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에 속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기가 어렵다. 심히 어렵다. 하여, 그 예날 디오게네스가 참사람을 찾기 위해 대낮인데도 등불을 들고 거리를 배회했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도 그리스도인을 찾기 위해 불이라도 켜야 할 판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믿는다. 불을 켜 들고 찾고 또 찾으면 분명히 그런 자들이 곳곳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나라 방식과 상관없이 성공한 그리스도인들 말고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교회가 이런 믿음을 갖고 힘써 그런 자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위로와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런 성도들이 많아질 것이다. 또 그런 성도들을 많이 배출하는 교회와 목회자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럴 때 한국 교회는 새로운 미래로, 구원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될 것이다.
 
4. 독립을 넘어 상호의존적인 사람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사람의 성장 과정을 3단계로 구분했다. 사람이 태어나면 전적으로 부모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의존적인 단계의 삶을 살아간다. 그 후 사춘기가 되면 독립적인 단계로 발전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성장을 멈춘다고 한다. 아니, 어쩌면 독립적인 단계까지도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나이를 먹었어도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를 의지한다든지, 책임 있게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사람은 때가 되면 반드시 의존적 단계에서 독립적 단계로 성장해야 하는데 우리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점차 부모의 돌봄을 받는 기간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인지라 독립하지 못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개중에는 능력 있는 부모 둔 것을 은근히 자랑하며 부모의 지원 받는 것을 특권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동물들도 때가 되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새끼들을 독립시키는데 말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독립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수치 중에 수치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자기 몫을 살아내려면 독립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독립적 단계만으로는 부족하다. 상호의존적 단계로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인생이란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나 홀로는 존재할 수도 없고, 한 순간조차도 살아갈 수 없다. 공기가 없이 어떻게 호흡할 수 있으며, 농부가 없이 어떻게 아침을 먹으며, 옷 만드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입으며, 건축가가 없이 어떻게 집안에서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는가? 부모 없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는가? 너 없이 나는 설 수 없다. 너 없이 나는 존재조차 할 수 없다. 이것이 생명의 진실이며 삶의 진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독립만으로는 부족하다. 독립을 넘어 너의 필요와 도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상호의존적인 삶을 살아갈 줄 아는 단계로 성장해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유아독존의 폐쇄된 나라가 아니다. 너를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상호의존적인 세계가 하나님나라의 본질이다.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세계,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가락을 넣어도 물지 않는 세계, 모든 생명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소통의 세계, 피차 돌보고 돌봄을 받는 사랑의 세계, 상호의존적인 세계가 바로 하나님나라다. 하나님은 한 생명체,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완벽하게 주지 않았다. 다른 생명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셨다. 나무는 공기와 비가 있어야 광합성 작용을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람은 나무가 광합성 작용을 하고 내뿜는 산소를 마셔야 살아갈 수 있도록 멋지게 고안되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200억이나 되는 세포도 세포마다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만일 정보가 막히면 세포는 약화되어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고, 암세포로 변질되어 몸을 망가뜨린다.

이처럼 모든 생명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네트워크가 있기 때문에 산다. 유아독존의 태도는 하나님나라의 삶이 아닐 뿐만 아니라 생명의 본질에도 어긋난다. 그런데 비판적인 사람, 냉소적인 사람은 이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치 자기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재단한다. 특히 기독교인이 그렇다. 기독교인의 진리 독과점주의는 양보할 수 없는 진리의 절대성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독과점주의는 매우 위험한 태도임에 틀림없다.

왜냐? 진리는 고유한 절대성에도 불구하고 닫힌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의 절대성은 닫혀있는 절대가 아니라 무한히 열려있는 절대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과거의 역사 속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관통하며 오늘까지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성경이 열린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그동안 성경의 열린 진리를 가르쳐오면서도 성경과는 다르게 닫힌 절대성에 사로잡혀 있을까? 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세상을 품어내고 대화하지 못할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 이건 뭘 말하는가? 완전하게 진리를 인식을 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없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을 내 잣대위에 올려놓고 내 맘대로 평가하고 흔들어도 좋을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성경은 하나님이 각기 다양한 은사를 주셨다고 말한다. 이 말은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없어도 좋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없어도 좋을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런 말씀을 달달 외우면서도 그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듣지는 않는다. 아니, 듣지를 못한다. 그래서 상호의존적인 단계로 성장하지 못하고 끝없이 의존적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일상에까지 스며들어온 나머지 믿음이 자랄수록 더 의존적이 되어간다. 어쩌면 교회가 성도들의 의존적인 태도를 더 강화시켜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교회 안에 묶어두기 편하니까. 독립적인 단계나 상호의존적인 단계로 자라게 되면 목회자가 설 땅이 점점 좁아질 테니까.
 
하지만 솔직히 생각해보자. 목회자가 설 땅이 좁아지는 게 그렇게 큰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의 리더십이 약해지면 교회가 무너질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사실은 목회자가 설 땅이 지금보다 좁아져야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다. 우리의 진짜 싸움은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목회자가 설 땅이 넓어지느냐 좁아지느냐에 있지 않다.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것, 하나님나라를 위해 교회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는 것, 그것이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의 싸움이요 책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의존적인 단계나 독립적인 단계를 넘어 상호의존적인 단계로 성숙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상호의존적인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증언하고 보여줄 수 있게 될 것이다.

5.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주님의 신부인 교회, 세상의 소망인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두서없는 이야기를 했다. 이제 글을 마치며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열심히 교회 나가고 충성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의 최선은 아니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알기 위해 힘쓰고, 하나님나라를 닮아가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쉬지 않고 길을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한다. 그런 문제는 목사나 고민할 문제라며 외면하는 것은 교회를 수렁에 빠뜨리는 일이며 교회다운 모습도 아니다. 목사와 성도들이 함께 부둥켜안고 교회의 문제를 아파하며,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손을 맞잡고 애쓰는 것이 진정 교회를 사랑하는 길이요 충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제넘은 이야기 한 마디만 더 하겠다. 잠잠히 교회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교회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를 듣노라면 나도 모르게 그리스도인들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목자 없이 유리방황하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심히 아파했던 예수님의 마음이 밀려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정말이지 한국 교회를 붙잡고 한바탕 꺼억 울고 싶어진다.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왜 교회가 이러냐고? 왜 설교가 저러냐고? 하지만 할 수가 없다. 거대한 아우성에 묻혀 들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들으려고 하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까. 이미 세상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교회의 힘찬 외침 앞에서 성도들은 언제든지 굴종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기를 원하고, 눈뜨게 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포기한 채 눈을 감으려 드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목회자에게 엎드려 손을 벌리는 데만 익숙하니까.
 
그렇다. 교회마다 독립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한다. 한국 교회 안에서 깨어있는 열정의 사람, 옳고도 아름다운 사람, 교회를 넘어 하나님나라에 사로잡힌 사람, 독립을 넘어 상호의존적인 사람, 닫힌 진리를 넘어 열린 진리의 사람이 많이 배출되기를. 그런 사람들로 교회가 출렁이기를. 

정병선 목사 / 전 수원 한길교회 담임

* 필자는 16년 동안 담임목회를 한 후 지금은 새빛기독실업인회 지도 목사와 자유설교자, 자유기고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대장간에서 펴낸 <어느 목회자의 고백>, <신앙의 마스터 클래스>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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