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가 믿는 하나님, 나도 믿어도 될까요?"
"아저씨가 믿는 하나님, 나도 믿어도 될까요?"
  • 박지호
  • 승인 2008.03.12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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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예수 전한 강상구 장로

   
 
  ▲ 맨해튼 사무실 앞에서 만난 강상구 장로. 강 장로는 임 씨의 동생이 얼마 전 안수집사가 됐다며 기뻐했다.  
 
“아저씨, 아저씨가 믿는 예수님, 나도 믿으면 안 될까요?”

강상구 장로(예닮회)는 귀를 의심했다. 교회라면, 예수쟁이라면 치를 떨던 임수연(가명) 씨의 입에서 예수 믿겠다는 말이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소리를 지르면서 병실을 뛰쳐나왔어요. 병원에서 기차역까지 15분 걸리는데, 거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없어요. 어찌나 기뻤던지 날아온 것 같아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돌아오는 기차에 앉아서 울고 있더라고요.”

맨해튼에 있는 정원교회에서 열린 예닮회 모임에서 강 장로는 당시의 감격을 그렇게 표현했다. 예닮회는 월 1회 맨해튼 근처에서 일하는 실업인들이 점심때마다 모여서 기도하는 모임이다.

강 장로가 임 씨를 처음 만난 건 7년 전이다. 서로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강 장로 집의 아래층에 세 들어 살던 할머니가 임 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려준 게 계기가 되었다.

임 씨는 당시로부터 35년 전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던 흑인 병사를 따라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왔다. 임 씨의 행복한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흑인과 결혼한다는 이유로 한국의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임 씨는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흑인 남편과도 헤어졌고,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주변엔 영주권을 해결해보려는 남자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영주권만 받으면 임 씨를 버리고 떠났다. 임 씨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함께 살던 남자는 임 씨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돈이 될 만한 물건까지 모조리 챙겨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세상 물정에 어둡던 임 씨가 여기저기서 돈을 떼인 것도 수차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임 씨에게 상처를 준 상대는 하나같이 크리스천들이었다. 임 씨가 교회 얘기만 꺼내면 손사래를 쳤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강 장로가 아래층 할머니와 엘머스트병원을 찾았을 땐 임 씨는 이미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는 길어야 3개월이라며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귀띔했다. 할머니가 “같은 교회 다니는 장로님”이라고 강 장로를 소개했지만 임 씨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강 장로가 병실을 나서면서 “매일 들를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부탁하라”고 했지만, 임 씨는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부탁할 게 뭐 있겠냐”며 퉁명스런 대꾸만 남겼다.

강 장로는 임 씨를 이렇게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풍진 세상, 고생하고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하나님마저 모르고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무한 인생인가 싶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교회만 다니는 사람’을 만나 갖은 상처를 받은 것도 크리스천의 한 사람으로 못내 미안했다. 강 장로는 입으로 예수를 전하는 대신 행동으로, 마음으로 예수님을 전하기로 마음먹고 최선을 다해 임 씨를 섬겼다.

그날 이후로 강 장로는 임 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병원을 찾았다. 맨해튼 사무실에서 병원까지 1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매일 왕복했다. 병원 음식에 힘들어하던 임 씨를 위해 점심때마다 한인 마트를 들러 도시락을 사들고 병원을 향했다. 유난히 김을 좋아했던 임 씨를 위해 김을 꼭 챙겼다. 틈틈이 읽으라며 짧은 간증이 담긴 책을 선물해주기도 하고, 주말엔 아내와 함께 찾아가 임 씨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렇게 한 달 반 정도 지났을까. 병원에선 더 이상 손 쓸 수가 없다며 자메이카에 있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임 씨를 옮겼다. 그간 자신의 병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던 임 씨도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지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강 장로는 함께 기도라고 하고 싶지만 임 씨의 거부 반응 때문에 말도 못 꺼내고 속으로만 임 씨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난데없이 임 씨가 “아저씨가 믿는 예수님을 믿고 싶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이후로 임 씨의 몸은 갈수록 수척해지는데, 그의 얼굴엔 날로 평온함이 더했다. 돈, 건강, 남편, 가족까지 모두 잃고 상처뿐인 생을 마감하지만, 진정한 소망을 발견했기에 임 씨는 오히려 행복했다. 그렇게 또 한 달이 흐르고 며칠 뒤 의사가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얘기했다. 강 장로는 마지막을 앞두고 임 씨에게 가족들의 목소리라도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에 임 씨를 설득해 가족들의 연락처를 얻어냈다. 관심 없는 척 외면하던 임 씨는 30년 동안 간직하고 있던 꼬깃꼬깃한 종잇조각을 강 장로에게 건넸다. 

강 장로는 그길로 달려가 한국에 연락했다. 임 씨의 상태를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임 씨의 목소리를 들으라며 가족들에게 호스피스 병동 전화번호를 남겼다. 생전 울리지 않던 병실 전화기가 울어댔다. 대화하는 시간보다 흐느끼는 시간이 더 길었다. 한국에 있는 식구들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임 씨는 보고 싶다는 말만 되뇌었다. 그게 가족들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리곤 이틀 뒤인 2001년 8월 30일 임 씨는 세상을 떠났다. 55세의 나이였다.

임 씨가 세상을 떠난 뒤 임 씨의 막내 동생이 한국에서 강 장로를 찾았다. 가족들도 챙기지 못했는데 생면부지의 남이 병수발에서부터 장례식까지 챙겼으니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막내 동생은 장례식 비용이라며 건넸지만, 강 장로는 한사코 거절했다. 임 씨의 동생은 하는 수 없이 강 장로가 다니는 교회를 찾아가 사연을 전하고 장례비를 헌금했다. 목사도 교인들도 까맣게 모르던 일이었다.

얼마 뒤 목사는 강 장로를 불러 임 씨의 동생이 다녀갔다고 전하면서, “강 장로님이 믿는 예수님을 저희도 믿겠다”고 동생 내외가 남긴 말을 대신 전했다. “언제나 복음을 전하되 필요하면 말을 사용하라”는 프란체스코의 말을 강 장로는 그렇게 실천한 것이다.

예닮회는?

맨해튼 근교에서 일하는 크리스천 실업인들이 매월 1회 점심시간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교제를 나누는 자발적인 모임이다. 올해로 5년째를 맞았다. 한 번 모일 때마다 적지 않은 돈을 밥값에 쓰는 대신 당일 점심을 예배로 대체하고, 점심 값을 헌금하기로 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연말에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 작년에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할렘에 있는 노숙인들에게 무료로 안경을 맞춰주었다. 현재 30여 명이 모이고 있다. 추첨에 의해 임원을 뽑고 임기는 1년이라는 것과 개인 사정으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도 그날 점심값을 다음 모임에 헌금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규칙은 없는 자유로운 기도 모임이다.

   
 
  ▲ 연령대도, 직종도 다양한 예닮회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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