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쳐 목사의 열차 여행, 조선이 받은 축복
가우쳐 목사의 열차 여행, 조선이 받은 축복
  • 양국주
  • 승인 2008.03.18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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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년 전 워싱턴행 열차에서 일어난 3일간의 기적

1883년 9월, 황제 고종의 특명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 중이던 11명의 보빙 사절단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시카고를 경유하는 워싱턴행 기차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단장으로는 고종의 외척 민영익 대감이고, 그 수행원 가운데는 홍영식과 서광범, 유길준 등 많은 개혁파 인사들이 함께했다.

열차 안에서 이들은 워싱턴의 유력한 감리교 목사인 죤 프랭클린 가우쳐(John f. Goucher 1845-1922) 감독을 만난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펴고 서양 오랑캐인 양이를 몰아내야 한다고 서슬이 시퍼렇던 직후인지라 1882년 미국과 조선 사이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지기는 하였지만 이들이 벽안의 서양 목사를 만나 조선 땅으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청탁했을 리 만무했다.

   
 
  ▲ 쟌 가우쳐 목사(1845-1922).  
 
당시 볼티모어 시내에 위치한 러브리레인감리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죤 가우쳐와의 만남은 조선 기독교 역사의 중대한 촉매 역할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존 웨슬레가 일으킨 회심 운동의 결과로 영국 감리교회가 탄생하였고, 1772년에는 영국 감리교회가 미국에 파송한 선교사 죠셉 필모어와 후일 감독이 된 후랜시스 애쉬버리가  공동목회를 시작하면서 러브리레인감리교회가 미국 감리교회의 어머니 교회가 된 것이다. 이 교회를 통해 여섯 명의 감독이 배출되었고 재벌이었던 처가의 도움으로 가우쳐 목사는 볼티모어여자대학을 만들어 1908년까지 총장으로 교육 사업에 헌신하기도 하였다.

가우쳐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목회와 교육, 선교에 남다른 헌신을 하였다. 특히 그가 보빙 사절단을 만날 무렵에는 중국과 인도, 일본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갖고 사역을 구체화할 무렵이었다. 일본 선교에 열정을 불태우던 가우쳐에게 전해진 미지의 나라 ‘조선’은 새로운 미전도 종족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하였다. 워싱턴을 향하던 보빙 사절단과의 3일간 기차 여행이 조선 선교가 얼마나 응답 받는 기도제목이 되었던 가는 볼티모어로 돌아와 가우쳐가 취한 일련의 행동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가우쳐 목사, 자신의 지갑을 열어

우선 그는 아내와 자신의 이름으로 2,000불의 헌금을 감리교 해외 선교부 파울러 감독에게 조선 선교의 종자 헌금을 보내었다. 이후 연이어 보내온 가우쳐의 헌금 3,000불이 보태져 조선 선교의 가능성 타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해외 선교부의 결론은 부정적이었다.

가우쳐는 낙망하지 않고 일본에 주재하던 맥클레이(Robert S. Maclay)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알아보도록 부탁하였다.

“만일 은둔국인 조선에 선교 사역을 위해 그 나라를 답사하고 선교부를 설치할 만한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교도 땅에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일본이 그 영예스러운 일을 맡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주 적절한 것이며 당신이 그 사역을 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이 교회에서 지금껏 해온 봉사에 걸맞은 보탬이 될 것입니다.”

1884년 6월, 가우쳐의 부탁을 받은 맥클레이는 외교부의 주사로 있던 김옥균의 주선으로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학교와 병원 사역에 대한 윤허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 선교의 새 장이 열린 셈이다. 결국 가우쳐의 헌신과 맥클레이 선교사의 과감한 정탐은 은둔의 나라 조선이 오랜 폐쇄회로에서 벗어나 빗장을 열도록 도와주었다. 

맥클레이의 황제 접견 사실과 보고를 접한 감리교 해외 선교부가 선교 기관지 <가스펠 인 올 랜드(The Gospel in All Lands)>에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글을 실었다. 선교지에 실린 글을 보고 감동 받은 성도들의 헌금이 각지에서 답지했다. 또한 감리교에 있던 <에드버킷> 신문의 주필로 있던 버클리(James M. Buckley)가 조선에 관한 기사를 무려 15회나 기고하여 조선 선교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오하이오 주에 사는 슬로콤(J. Slocam)이 1,000불을 보내왔고 아홉 살배기 캘리포니아 소녀가 조선 선교를 위해 써달라며 9불을 헌금하였다.

   
 
  ▲ 가우쳐 목사가 조선 선교를 시작하며 건축(1884년)하여 오늘에 이른 러브리레인 교회.  
 
맥클레이 선교사의 고백처럼 ‘고종황제의 선교 윤허는 주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강물처럼 왕의 마음이 주의 손”에 달려 있어 “주님은 그가 원하시는 곳 어디로든지 왕의 마음을 돌리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일본과 조선 선교를 위해 자신의 지갑을 열던 1883년은 새 예배당 건축을 위해 건축비가 한 푼이라도 귀한 때였다. 성전 건축에 목회의 평생 희망을 거는 요즈음의 목회 세태와는 거꾸로 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도성을 찾는 가우쳐 목사에게 있어 선교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교회의 헌금으로 선교지를 돕는 겉치레 선교 헌신자가 아니었다. 가우쳐 목사 자신의 지갑을 열어 선교의 미문을 열어나간 것이다. 

맥클레이의 담력 있는 정탐 여행을 통해 조선 선교가 가능해진 이면에는 이와 같은 가우쳐 목사의 끈질긴 헌신과 열정이 없었던들 불가능했을는지도 모른다. 맥클레이는 이듬해 아펜젤러를, 그리고 스크랜튼 모자를 조선으로 보내 조선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

장로교 목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목사 아펜젤러가 동시에 입국하여 조선 선교의 새 날을 연 때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이었다. 하나님은 조선의 지평을 열기 위해 우선 가우쳐 목사 부부의 지갑을 열게 했고, 캘리포니아의 어린 소녀에게 감동을 주어 9불을 헌금하도록 하였다. 하나님나라에는 헌금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과부의 엽전 두 렙 돈이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과 그 나라를 향한 열정의 사람들이 만들어나가는 기적, 믿음의 사람들은 지갑을 열고 하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 믿음에 걸맞은 결실을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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