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은 바보, 입은 바보
입은 바보, 입은 바보
  • 김기현
  • 승인 2008.04.03 1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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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은 바보, 입은 바보” 저희 집 둘째 딸 말입니다. 웬 뜬금없이 “입은 바보”라고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던 아내가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막 웃습니다. 얘기인즉슨, 우리 둘째가 여자아이인데다가 똑 부러지게 말을 잘하는 편이라, 말을 주의해서 하라고 아내가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된단다”고 타일렀답니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는 말이 유치원 다닐 당시의 아이라 입을 놀리면 안 된다고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입은 바보”라고 했던 겁니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옮긴 분들을 심층 면접 조사한 결과 중에 개신교는 너무 시끄럽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시쳇말로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지요. 목소리가 크다는 겁니다. 그 예로 든 것이 ‘할렐루야’나 ‘아멘’을 외치라고 강요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덮어놓고 무조건 믿으라는 식으로 강제하는 것이 싫다고 합니다. 조금은 내면을 성찰하고 숙고할 여유도 허용하지 않아서 싫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은 많은데, 쓸 말은 없다는 것이지요. 빈 수레가 요란하고 빈 깡통이 시끄럽다 했는데 현재 개신교가 딱 그 모양인가 봅니다. 바보 같은 입을 잘못 놀린 결과가 아닐는지요.

하지만 여기에 조심스레 이의를 제기하고픈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설교나 찬양 중에 청중이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소망스런 모습이란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 예배가 시끄럽다고 하지만, 비교 대상이 흑인 교회라면 우리는 정말로 정숙합니다. 그들의 예배 실황을 조금 보니, 이건 아예 난장판입니다. 설교자가 간단한 한두 문장으로 말씀을 선포하면, 청중들도 이에 질세라 아예 문장으로 반응합니다. 차라리 ‘랩 배틀’이더군요.

출애굽기에서는 애굽의 백성들이(출 11:7), 여호수아서에서는 가나안 백성들이(수 10:21)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에 나타난 놀라운 기적으로 인해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와 신자를 향한 말쟁이라는 비판과 냉소는 우리들의 말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어나 문장, 문법으로는 아무 흠이 없지만,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신자에게 듣기를 원하는 말은 땅이 아닌 하늘의 말, 속되지 않은 신성한 언어입니다. 우리 안에 하늘이 없으니 아무리 세련되고 논리적으로 설명한들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게다가 시끄럽게 여기는 것은 결국 우리말에 하나님의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의 많고 적음이나, 소리의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전혀 반향하지 못한 탓입니다.

본시 기독교는 말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분은 또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성경과 역사와 자연과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들을 보낸 것이 몇 번이냐고 물으십니다.(마 23:37) 몇 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숱하게 많다는 것입니다. 하여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여러 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 1:1, 공동)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시니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듣지 않고 말만 하는 기도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건너 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먼저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대화하는 두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때때로 말이 서로 엉켜서 동시에 말을 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서 분노로 서로 소리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한 사람이 말하면 상대방은 듣습니다. 주의 깊게 들은 다음 말이 끝나면 그제야 말을 합니다. 그래서 대화를 소통, 곧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이 오고 가야 하는 법이지요.

현재 개신교는 듣지 않고 말을 합니다. 대표적으로 기도를 보면 됩니다. 조용한 묵상 기도를 하든, 시끄럽게 통성 기도를 하든지 간에 일방적으로 하나님 앞에 말을 하기는 매일반인 듯합니다. 기도하는 내내 하나님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냅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많이 청구하고서는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기도가 마치면 얼른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듣지 않고 말을 많이 하니, 시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입이 방정이라 하였는데, 하여튼 입은 바보입니다.

요즘 영성 훈련에서 침묵이 많이 강조됩니다. 말을 줄이고 잠잠하는 것이 분주하고 산만한 마음을 제어하는 좋은 방법이다. 말을 많이 하면 공허해집니다. 허나 말을 줄이면 충만해집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심판이 많습니다(약 3:1). 말을 적게 하면 적어도 심판을 적게 받습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아집니다(약 3:2). 말을 줄이면 그만큼 실수도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말이 많으면 바람과 달리 쓸모없는 말이 더 많아질 뿐입니다. 우리는 말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을 알지만, 하나님은 말의 많고 적음으로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말씀하기에 우리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고 지금도 말씀하신다면, 그리고 대화의 기본 요건이 먼저 듣고 말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시니 듣고 있다 보니 결국 외적으로는 침묵입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그만큼 풍성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로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침묵은 말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말을 들음입니다.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침묵은 힘이 들어 고달프지만, 하나님의 말을 들으려고 하면 침묵은 기쁨이 있습니다.

이방인과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혀를 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혀는 바보입니다. 무에 그리 하고픈 말이 많은지 핸드폰을 손에서 떼지 못합니다. 하나님에게 그런 식으로 행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말합니다. 결국 불신자들이 보기에, 그리고 우리 자신이 보기에도 성도들의 말이 한낱 혀를 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듣지 않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말에 어떠한 신성함이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시끄러운 것입니다.

서은이 말처럼, 입은 바보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하는 말은 바보입니다. 혀를 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그리고 급히 혀를 놀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말해야 합니다. 말과 글로 주님 위해 살겠다고 하는 저는 요 며칠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아멘!”

김기현 / 부산 수정로침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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