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한 자의 고난
무죄한 자의 고난
  • 정용섭
  • 승인 2008.04.03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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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학기말에 학생들에게 집중적으로 "무죄한 자의 고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이럴 때는 나도 참 난감하고 답답하다. 학생들은 무언가 속 시원한 대답을 기대하고 물었을 텐데 나도 그들보다 별로 생각이 깊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혹 '병원 24시'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는데, 불의의 사고를 만난다거나 불치병에 걸려 투병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이유나 위로를 제시하기가 힘들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장애를 갖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볼 때는 더하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의·사랑·전능과 같은 속성의 하나님 바로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런 숙명적 고난의 이유를 해명할 길이 막막하다. 의롭지 않든지, 아니면 전능하지 않든지, 아니면 인간 세상의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무감정의 존재이어야만 이런 이유가 그나마 조금이라고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직신학의 신정론(神正論, Theodizee)이라는 주제로 어느 정도 대답을 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인리히 오트가 정리한 것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답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욥의 대답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무지로 말하였습니다.…당신에 대해서는 내가 듣기만 했으나 이제는 내가 당신을 눈으로 봅니다." 즉, 이런 궁극적인 고난에 관한 질문에는 하나님만이 대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십자가 신학의 대답으로서 악과 고난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몰트만이 지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이런 논리로 집필된 책이다. 셋째는 부활 신학의 입장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무의미성이라는 무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넷째는 종말론적 대답으로서 마지막 날이 이르면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윤리적 대답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면서 끊임없이 고난과 악에 대항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답들이 나름대로의 성서적․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하나의 대답이 악과 고난과 무의미성의 모든 근원적 문제를 완전하게 풀어줄 수 없다는 점에서 이제 우리는 종합적으로 접근해보려고 한다.

우선 이 세상은 여전히 비밀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이 문제를 풀어 가는 게 좋을 듯 싶다.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이라서 그런지 늘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것만을 참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의 인식 능력을 약간만이라도 세밀하게 들여다 보면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이유 없는 고난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그래서 신비한 현상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책상 위에 귤이 놓여 있다. 이게 무엇일까? 어디서 왔을까? 왜 이 시간에 내 앞에서 있어서 나의 미각을 자극하는 것일까? 당연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하나의 귤이 완성되려면 태양과 물과 탄소가 물리·화학작용을 일으켜야 하며, 어느 농부의 손을 빌려 이런 준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 태양의 출처는 어디이며, 지구의 물과 탄소는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우리는 그 자세한 경로를 알지 못한다. 과학자들의 설명은 우리가 과학의 원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범주 안에 들어온 현상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게 없다.

한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서도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이 피투적 존재로서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마당에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해서 완벽한 대답을 바란다는 것은 속된 말로 장님이 코끼리 만져 보고 모든 실체를 말하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작은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만 어렴풋이 짐작하며 살아갈 뿐이지 이것이 전체적으로 어떤 근원과 목표를 갖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렇다면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한 질문 앞에서 "우리가 아는 것이 없다"는 대답으로 설명이 충분한 것일까? 솔직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보충해보자.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생명 형식과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 형식의 세계가 도래할 때 우리는 이 모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이유 없는 고난은 흡사 수술을 받고 있는 중환자의 경우와 비슷해서, 현재는 고통으로 견딜 수 없지만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면 그 고통의 이유를 알게 되고 훨씬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아무런 고난과 아픔 없이 사는 것을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시작된다면 그때는 여기서 고난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절대적인 세계에서는 그 이전의 상대적인 세계가 별 큰 의미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가 예수의 부활에서 이미 선취되었다고 기독교인들은 믿는다. 이유 없는 고난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십자가가 비록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사건이었지만 부활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지향된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이유 없는 고난이 언젠가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고난의 미학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결국 극복되어야 할 사건이라는 점에서 비록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의미로 지양되는 날을 향해 희망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정용섭 / 샘터교회 목사·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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